감정이입과 몰입을 할 수 있었던 영화 황해

in aaa •  6 years ago 

그 당시 나는 호주 유학 후 이민의 길을 걷고 있었다.
비싼 물가의 압박, 비자 문제의 압박, 영어를 더 잘 해야 한다는 압박... 여러가지 심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들에 시달리며 정신도 피폐해지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으나 워낙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다보니 집에서 쉬는 시간에도 영화 하나를 끝까지 감상하기가 힘들었다. 뭔가 더 생산적인 일로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영화를 틀었다가도 금세 끄던 때였다.
주말이면 한인슈퍼에 가서 그리운 식재료를 사고 교민잡지를 집어들고 한국영화 DVD 뭐 있나 둘러보다보면 마음속의 어딘가에 힐링이 되는 느낌을 받곤했다.

그날 황해를 왜 골랐는지 떠올려보면
스포일러 0% 상태였고
김윤석 나오는건 다 재미있지 않나? 하는 이미지가 있었고
황해 라는 제목의 캘리그라피가 인상적이었다.
yellowsea.png

 
 
 


아래부턴 치사량의 스포일러


 
 
 

이건 초반부터 굉장히 몰입해서 다른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휘몰아치는 잡생각에 영화를 꺼버리지 않고 쭉 계속 볼 수 있던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주인공 김구남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밖에 없는 설정상의 공통점이 여러개 있었다.

돈에 대한 절박함.

y1.png

[도박에 져서 돈을 내는 구남]

y2.png

[퇴직금 봉투를 받고 나오자 마자 액수를 확인하는 구남]

타지에서 재정난에 허덕이면서 살다보면 손에 쥐는 현금이 굉장히 달콤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다음달 지출해야만 하는 돈이라도 잠시 손에 쥘 때면 내것같은 환상을 즐길 수 있다. 김구남이 돈을 만지는 장면에서 그러한 절박함이 느껴졌다. 돈을 받았을 때의 그 갈증해소와도 같은 느낌. 돈을 써야만(?)할 때의 그 아까움.

안깎는 수염

한국에서는 면도를 깔끔하게 하는 것이 미덕이다. 안그랬다간 이상하게 보고 잔소리 태클이 들어온다. 호주에는 그런게 없어서 한국 남자들 상당수가 해방감에 그런지 수염을 그냥 안깎는다. 나도 안깎는 습관이 들어버린지 오래. 면도를 하면 면도날도 닳고 피부도 아프고 운나쁘게 실수하면 피도 난다. 면도를 안하는게 개이득인 것이다.
재중동포인 구남이도 대충 그런 마인드로 수염을 안깎은 느낌이었다.

시티 내 역송금업체

중국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주인공. 일을 하면서 중국인들을 상대하고 유창하게 중국어로 얘기한다. 번화가 어딘가에 차를 멈추니 한국인들이 모여있고, 그곳에 다가가 한국어로 이야기를 한다. 메이저 은행권의 외환 송금 절차를 거치는 대신 중개업자의 개인 계좌를 통해서 하는 송금 관련 얘기를 한다. 그게 더 빠르고 떼이는 수수료가 저렴해서 호주에 있는 한국사람들도 많이들 그렇게 한다.
물론 황해에 나온 인물들은 조선족의 사투리를 쓰고 나처럼 이민 1세대가 될까 말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몇세대에 걸쳐 정착이 된 사람들이다. 그래도 공통점만이 눈에 들어왔었다.

밀입국

물론 이딴것에 공감이라든가 동질감을 느낄 수는 없다. 배를 타고 생사를 건 밀입국을 하는 사람의 각도에서 본 한국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저런 모습의 한국도 있구나.
wow.png

비행기표가 비싸서, 내세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자주 갈 수 없었다. 몇년만에 겸사겸사 몰아서 방문하면서 느껴지는 복잡한 심경. 이렇게 달라졌구나, 이렇게 그대로구나, 고향이지만 낯설었던 그 모습은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각도였지 저런정도는 아니었었다.

외국인 노동자

높은 인건비에 경제적인 손익을 따져서, 그리고 부수적으로 선진국이니 삶의 질이 더 높을 것을 기대하며 외국인 노동자는 이국행을 결심한다. 현지사람들의 여유있어 보이는 생활속에 초짜 외국인 노동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허드렛일 마다않고 가까스로 구한 일자리에서 의외의 박봉에 차별과 박탈감을 느낀다. 점점 각박해져서 그런지 그 짜증을 초면에 만만한줄 알고 한국인에게 쏟아내는 황당한 경우를 몇차례 당해 보았다.
구남이도 그런걸 겪는 장면이 있다.
out.png
식당에서 식후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는데 조선족 말투로 '다 드셨으면 나가요' 라고 하며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하는 종업원.
기대하지 않았던 반가운 동포의 언어, 그러나 훅 들어오는 무례함, 너무 황당해서 그냥 대꾸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
근데 지금 리뷰를 쓰느라 다시 보니 구남이가 심하게 오랬동안 뽕 뽑으며 죽치고 있었다는걸 알게되었다. 무료커피를 7잔째 가져다 마시고 있는 모습이 전 장면에 나왔다. 그래도 처음 볼 때는 이걸 발견 못해서 그냥 공감요소였다.

그 이후의 액션활극은 화려했지만 다소 과장되고 유치한 면도 있는데다가 스토리도 복잡해서 몰입감이 조금 떨어지기는 했다. 그래도 상당히 고퀄리티의 액션씬이 길게 나와서 영화 한편 제대로 감상한다는 포만감이 느껴졌다.

뉴스에서 조선족 여성의 살인보도를 보고 자신의 아내인것 같아서 경찰에 전화해서 피해자 신원이 리화자 맞는지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전화받는 경찰은 "선생님" 이라는 존칭을 꼬박꼬박 붙여주며 안된다는 원칙을 반복 대답한다. 물론 원칙대로 하는게 맞다. 하지만 김구남 입장에서도 타국에서 겪는 그 좌절감과 답답함이란... 안타깝지만 또하나의 깊은 공감요소였다.

막바지에 주인공은 어떻게든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탄다.
한국에서는 의지할데 하나 없이 모두가 적이었다.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가면 그래도 지친몸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감정이입을 해서 계속 주인공을 응원했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풀어나기 보다는 그냥 살인청부업도 하지 말고 행복을 찾기만 바랬다. 결국 주인공은 한국과 중국의 중간인 "황해"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수장된다.

구남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는데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걸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하는 질문과 함께 진한 여운이 남았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이 영화도 상징하는바가 엄청나죠..
근데 다른건 다 빼고 하정우 먹방만봐도 그 값은 다 하는거같습니다

이 영화를 찍고 거하게 말아먹고 다음에 나온게 곡성이죠...

편의점 황해정식... 김먹기... 찐감자... 열무김치... 최고죠 네

저도 영화를 본지 오래되었는데, 생산적인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여전하네요~^^;; 다행히 그때보다, 좋아하는 거에 더 빠져들게는 되었지만요..

진짜 강렬했던 영화중에 하나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안끌려서 안봤는데 그것 참 엄청 유명하더라구요.
(황해를 개그프로로 알았음.;)
언제 애들 재워놓고아내라 봐야되겠습니다. ㅠ ㅠ

인간의 본성, 욕망과 내적갈등도 잘 나타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정우의 먹방에 많이 뭍혔지만 그런 것도 관람의 한 포인트인듯 해요~!!

  ·  6 years ago (edited)

리뷰 재밌게 읽었습니다.~ 헙 커피를 7잔이나 먹었었나요? 황해는 분위기가 좀 쓸쓸했던 거로 기억에 남아있네요. 톤 때문인거 같기도 하고.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마지막에 배에서 선장이 주인공시신을 바다에 던지우게 되죠. 그리곤 선장은 유유히 아무일없었다는듯 떠나가고.. 하정우를 있게한 하나의 큰작품으로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