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지 기자 시절, 전자업계를 꽤나 열심히 출입했습니다. 2014~2016년 즈음에 출입했는데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고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섰죠. 반도체 붐이 일어나는 와중에 중국이 메모리 시장에 진출했죠. LG에서도 구본무 회장이 2선으로 사실상 물러나고 구본준 부회장 체제가 만들어졌죠. 출입하는 기간 많은 일이 있는 건 기자에겐 좋은 일입니다.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할 수 있거든요.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사건은 조성진 LG전자 부회장(당시 사장)이 해외 전시장에 전시된 삼성의 세탁기 문을 파손하며 생긴 속칭 '세탁기 전쟁'이었습니다.
네, 이 글은 제가 이번주에 고심 끝에 LG에어컨을 사게 된 계기에 대한 글입니다. 서두가 길었는데, 본론은 더 깁니다.
'세탁기 전쟁'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조성진 부회장이 해외 전시회에 가서 삼성관을 둘러 보다가 삼성 세탁기의 문을 두 손으로 강하게 눌렀고, 그 문이 파손됐습니다. 삼성 측에서는 이를 경쟁사 제품 이미지를 망치기 위한 고의 파손으로 보고 고발했습니다. 당시 삼성 가전 총괄은 윤부근 부회장(당시 사장) 이었습니다. 조 부회장 측은 "세탁기 문이 너무 약해서"라고 말하며 삼성의 자존심을 건드렸죠. 둘은 소송전으로 세게 붙었다가 청와대가 주최한 모임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구본무 회장이 만나 화해하기로 합의하면서 싱겁게 마무리 됩니다.
이 일과 에어컨 구매가 무슨 상관일까요. 뒷 배경을 알면 재밋습니다.
윤부근과 조성진은 각사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윤 부회장은 울릉도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한양대를 나왔습니다. SKY 출신은 아닌거죠. 조 부회장은 공고가 최종학력입니다. 둘 다 경제가 어렵던 시절에 삼성과 LG에 들어가 죽기살기로 일했죠. 둘 다 꿈이 컸고, 윗 사람한테 아부하면서 크기 보다는 자기 실력을 확실히 가지고 간 엔지니어로 유명합니다. 조 부회장 같은 경우는 세탁기 개발 과정에서 상사와 의견 마찰이 있자 아예 책상을 들고 옥상으로 가서 일주일간 시위를 했던 경험도 있다고 합니다.
윤 부회장은 소니를 무너트리고 삼성을 세계 1등 TV 업체로 만듭니다. 당시 30cm이던 TV 두께를 7cm로 만들때 까지 한달간 연구소에서 나오지도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조 부회장은 LG를 세계 세탁기 1등으로 만듭니다. 지금도 세탁기를 부품 하나까지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어 '세탁기 박사'로 불리죠.
LG는 고졸인 조성진을 사장으로 발탁하며 가전사업 전체를 맡깁니다. 조 부회장은 자신의 특기인 '모듈화'를 통해 생산 단가를 크게 낮춤과 동시에 LG 가전에 '프리미엄'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자극받은 삼성은 TV라는 훨씬 큰 사업을 하는 윤부근을 동생 격인 가전에 배치하는 승부수를 띄웁니다. 드디어 둘 간의 진검승부가 시작된 거죠.
자, 여기서부터 세탁기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윤 부회장은 TV에서 그랬듯 삼성 가전을 세계 1위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정체돼 있던 세계 가전 시장에 혁신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세탁기나 냉장고가 스마트폰처럼 1년마다 파격적인 신제품이 나오지 않잖아요. 윤부근은 이같은 고정관념을 바꾸려 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기획한거죠.
문제의 세탁기는 이같은 경쟁의 산물이었습니다. 삼성은 입구가 수평이 아닌 윗 방향으로 기울여 진 드럼 세탁기를 내놨습니다. 세탁물을 꺼낼 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고객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죠. 좋은 시도입니다. 문제는, 문을 기울이면 문을 고정하는 힌지도 기울어진다는 것이고 그러면 힌지가 수직 방향일 때보다는 문이 감당할 수 있는 하중이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집에 문이 기울여져서 설치됐다고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조 부회장이 이 세탁기를 본 겁니다. 그리고 "이 문이 무게를 받쳐주나"하는 의문을 가진 것이죠. 그리고 눌렀는데 문의 힌지가 조금 파손된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그걸 왜 눌러봐" 하실 분이 많으시겠죠. 삼성 측은 세탁기 문이 15kg의 하중을 견딜 수 있게 설계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세탁기 문에 세탁물 같은 걸 걸어도 15kg은 넘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런데 LG의 세탁기 문은 200kg까지 견디도록 설계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매달릴 수 있다는 얘기죠. 조 부회장은 "이런 구조가 200kg를 견디나" 이런 의문을 품었던 거죠.
자, 세탁물을 넣기 편하고 문이 15kg의 하중만 견디는 세탁기가 좋을까요? 아니면 조금 불편해도 문이 충분한 하중을 견디는 세탁기가 좋을까요?
저는 이 부분이 삼성과 LG가 가전을 만드는 철학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돌고 돌아 에어컨 얘기를 하겠습니다.
하이마트를 갔습니다. 삼성과 LG의 제품을 하나씩 추천받았습니다. 삼성 에어컨은 무풍 기능이 있고, 공기청정 필터를 반영구적으로 써도 됩니다. (그리고 예쁩니다.) LG에어컨은 무풍 기능도 없고, 공기 청정 필터도 정기적으로 갈아줘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안예뻐요.) 이렇게 보면 삼성 것을 사야 합니다. 전 애들 때문에 에어컨을 사는데, 잘 때 에어컨을 키면 애들은 무조건 춥다 합니다. 끄면 덥다 하고요. 이럴 때 무풍 기능이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아, 참. 가격은 두 제품이 정확히 같았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보면 무풍에어컨을 쓰다가 불편을 겪은 사례가 눈에 띕니다. 에어컨 내부에 습기가 찼다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아마 작은 구멍으로 미세한 바람을 내다가 생기는 일종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기능을 갖추고 유지보수 비용도 들지 않지만 고객 불만이 눈에 띄는 제품을 구매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런 기능은 없더라도 고객 불만이 덜 눈에 띄는 제품을 구매해야 할까요.
저는 이제껏 제돈주고 산 가전제품은 모두 삼성 것을 썼습니다. 아버지가 삼성전자 출신이셔서 어려서부터 삼성 제품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죠. 혼수 가전도 모두 삼성이었습니다. 최근에 의류건조기도 삼성 것을 샀죠.
그러나 이번엔 LG 제품을 선택했습니다. 에어컨은, 수리할 일이 생기면 너무 골치 아픕니다. 뭔가를 점검하려면 수리 기사님들이 실외기에 매달려서 점검도 하시고 그러는데 그걸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부담됩니다.
전 삼성 제품의 내구력이 LG보다 떨어진다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삼성의 실험적(?) 제품의 성능을 누리는 일종의 '댓가'가 있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죠. 물론 그 댓가가 있을 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아버지만 해도 잔고장 없이 무풍에어컨을 잘 쓰고 계시고요. 그러나 저는 에어컨 만큼은 고장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잡자고 결정했습니다.
이게 제가 이번에 LG 에어컨을 산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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