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화폐 시스템에서 본원통화(base money, monetary base)의 의미는 과거 시대의 본원통화와는 다르다. 과거의 본원통화가 ‘가치 저장의 신뢰 기반’으로 작동했었다면, 현대 화폐에서 본원통화는 ‘신용통화 시스템을 위해 구성된 신뢰 매개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제 본원통화는 신용통화(credit money) 시스템에 종속적이라는 의미다.
사토시의 논문이 현대 화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기 때문에, 암호화폐에 대한 논의 중에는 ‘화폐론’에 대한 것이 매우 흔하다. 그런 논의들은 ‘법정화폐의 문제’를 지적하여 폭로하기도 하고, ‘중앙은행’이 없는 ‘암호화폐’가 화폐 수요와 공급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적을 담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한 쟁점들이다. 그러나 본 포스트에서는 그런 쟁점을 다루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슈를 다루어 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쟁점과 연관된 요소들은 언급을 할 생각이다.
법정화폐와 사적 거래, 금융 시스템
현대 화폐는 법정화폐와 그것을 이용하는 사적 거래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폐의 기능적 요소를 충족시키는 금융이 융합되어 만드는 현상이다. 경제학의 화폐 금융론은 바로 이 현상계 내에서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상들을 식별해내고, 그 대상들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는 학문이다.
화폐 금융론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 화폐 시스템에서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본원통화’(M1)과 ‘신용통화’(M2/M3)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현상은 실물 거래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과학적 탐구를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화폐적 분석만으로도 경제현상들에 대한 ‘상당한’ 설명력을 확보할 수 있고, 그러한 설명력은 심지어 ‘수행적(performative)이기까지 해서 화폐현상에 영향을 줌으로써 실물 경제에 ‘의도’를 실현실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화폐 금융론은 화폐 현상들을 거시적 화폐론과 미시적 금융론으로 설명하고 구성한다. 그 결과 그들이 보여주는 대략의 Big Picture는 다음 그림과 같은 것이다.
화폐 시스템은 ‘본원통화’(M1)의 발권을 기초로, 화폐적 계약들로 구성된 사적 거래와 사적 거래에서 요구되는 화폐 기능성을 담은 금융 서비스(대출, 보험, 지불 등) 가 ‘신용통화’(M2/M3)를 창출함으로써 작동한다.
이 그림을 기준으로 다시 금융업을 설명한다면, ‘사적 거래’에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화폐의 기능이지만 개별 거래자가 만들기 어려운 기능을 ‘신뢰 인프라’를 구축하고 그 위에 서비스 시스템을 올려서 ‘거래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은 ‘실제의 거래’가 아닌 ‘화폐의 거래’를 통해 ‘신용통화’를 창출하고, ‘신용통화’를 운용하여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거래자들에게 제공하여 이익을 낸다.
복잡하게 표현했지만 이 말의 핵심은 이것이다.
‘금융기관은 스스로 보유한 본원통화(신뢰 기반)보다 많은 돈(M2/M3)을 장부 상에서 만들어내고 이를 팔아서 장사를 한다’
현대 화폐 시스템은 금융의 이러한 지위를 ‘외생변수’와 같이 취급하며, M2나 M3 운용의 수익이 당연히 금융의 몫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상황에서 전자화폐인 ‘암호화폐’의 등장은 최소한 ‘M2나 M3 운용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꺼리를 잠식 당하거나’, ‘M2나 M3를 금융이 독점적으로 운용하여 수익을 독점했음’을 보통 사람들이 모두 인식하게 되는 ‘위험’을 의미했다. 나아가 M2와 M3 운용의 영역 전반으로 암호화폐가 세력을 확대할 가능성 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암호화폐와 현대 화폐 시스템
암호화폐가 현대 화폐 시스템이 제공하는 가치를 충분하게 제공할 수 있을까? 혹은 현대 화폐 시스템의 일부를 보완하는 것일까?
먼저 암호화폐의 전자화폐적 기능성은 금융 서비스가 제공한 몇 가지 기능을 대체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실시간 송금이다. 금융은 화폐가 가진 시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게 해주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 중에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은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이다. 법정 화폐는 대개 실물 매체를 통해 발권되므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며, 이는 화폐에게 시간과 공간적 제약을 부여하기 때문에, 흐르는 속도의 제약과 이동에 따른 비용이 발생한다. 금융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서비스’를 통해 화폐의 기능을 보완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지구상에서 네트워크에 접근 가능한 모든 위치에 있는 거래자에게 유동성을 실시간으로 공급하는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실물 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특성이다. 그런 점에서 암호화폐는 그 자체로 현대 화폐 시스템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대체하는 영역이 있다.
그 다음 영역은 ‘스마트 계약’이다. 이는 이더리움에 의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인데, 화폐가 ‘사적 거래’를 통해 ‘다른 기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화폐는 ‘거래’를 매개하므로 ‘계약’ 안에 화폐에 부가할 기능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화폐를 확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으로 법정화폐와 결합된 금융 서비스가 제공할 수 없는 영역까지 암호화폐의 기능을 확장한다.
그러나 ‘스마트 계약’에 의해 M2나 M3 전체를 대체할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왜냐하면 M2나 M3가 만들어지는 메카니즘을 ‘계약’으로 모두 환원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이 러시아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를 경우, A가 B에게 100원을 주기로 한다’와 같은 간단한 계약도 ‘한국이 러시아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른다’는 조건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오프체인’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오라클’이라고 부르며, ‘오라클’이 공격당하여 실제와 다른 진리값을 ‘온체인’으로 제공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다양한 고안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만만치 않다.
또한 ‘A가 전세를 구하기 위해 보증금 1,000만원을 빌리려 한다’는 상황은 A가 1,000만원을 가지고 있고 빌려줄 의향이 있는 B를 만나서 빌려주기로 결정되기 전에는 ‘온체인’에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설혹 A가 블록체인 상에 ‘1,000만원이 필요하다’는 유동성 수요를 제기하더라도 ‘온체인’ 이벤트 만으로 A에게 유동성을 공급할 B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중간에 다양한 오프체인 프로세스가 개입되지 않으면 M2를 발생시키는 ‘계약’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이유에서 아직 암호화폐는 현대 화폐 시스템을 대체할 수 없다. M2를 대체할 수 있는 ‘암호화폐적 프로세스’의 구성요소들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스마트 계약’ 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이것의 양적 문제에 대해 다룰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들에서 흔히 봤던 ‘신용 창출 승수’ 같은 것을 포함해서..
정부와 금융당국이 이정도 수준으로 논의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진지하게 현상을 분석하는 자세라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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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보게 만들려면 '세'가 더 커져야 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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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용이 매우 전문적인데도 이해가 되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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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셨다니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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