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의 삶과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해 강렬한 화학반응을 나타내는 단색 일변도의 폭발이다. 일본의 기성 문학계를 등지고 오로지 글만을 쓰기 위해 스스로 혼자가 된 겐지의 뒷모습은, 시골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강렬한 주행만을 꿈꾸는 주인공 오토바이의 실루엣과 겹쳐 보인다. 야생의 삶. 극단적인 즉흥으로만 방향성을 얻는 주행. 소유에는 무관심하고 자유에만 탐닉하는 반자본주의적 사고, 반자유주의적-나는 현대의 자유주의와 개념 자체로의 자유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신경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비웃고 경멸하고야마는 자기 방어 시스템.
독자로서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외면한 채 작품 전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로서 오토바이의 주행이나 두 사람의 거친 삶만 걸러내어 읽기가 힘들다. 겐지가 종종 강압적으로 느껴질만큼 자신의 생각을 눈 앞에까지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피로 적어내려간 도그마의 필사, 상처 입은 동물이 공포로 인한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송곳니와 어금니를 갈아대는 경련 가득한 턱과도 같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이런 종류의 결말에서 나는 일본 문화에서 느끼곤 하는 묘한 탐미주의와 다시 한 번 마주한다. 그런 종류의 탐미주의란 궁극적으로는 해체를 통해 아련한 뒷맛을 남긴채 사라지는데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내게 있어 일본의 미는 완성됨으로써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이 미다’ 라는 전언을 남김으로써 완수되는 과업이다. 그래서 이 완수된 과업마저도 끝내는 어떤 형태로 남아있기를 거부한다. 일견 허무주의에의 집착으로만 보이는 것, 생에서 다할 수 있는 모든 노력 또는 전력을 끌어올려 공든 탑을 쌓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터뜨리는 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밀도를 높이고 높이다가 결국 폭발하고야 마는 자기학대에의 노스탤지어, 삶을 갈아내어 마침내 오른 장인의 경지와 그곳에서 스스로 떨어지는 자살과도 같은 모순에 대한 본능적 동경. 모든 것이 소진되고 가루가 되어버리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는 자기파괴적 충동, 타나토스적이라고 할 법한 이 운동성이 특히 일본의 근현대 문학에서 자주 얼굴을 내미는 모습이다.
그래서 작품의 초반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귀신의 모습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반짝하고 빛나는 작가의 아이디어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귀신이야말로 없으면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 파괴의 상징으로 귀신만큼 적합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작품을 감싸고 도는 오토바이의 기운은 씩씩하다기 보다는 험상궂다는 표현이 적절하고, 그래서 애수가 서려있다. 위협해야만 하는 자는 언제나 불안하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로 인해 주민이 이탈하는 바닷가의 시골 마을, 출처를 알려주지 않은채 거대한 돈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도주해야만 하는 여자, 온갖 부정과 부패와 몰지각으로 쌓아올린 도시의 마천루는 겐지가 그려내는 현대 일본인의 우울한 자화상이자 사회의 세태상이며,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를 태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속의 주행을 해내야만 하는 남자가 그나마 작가의 이상적인 인간상에 가까울 것이다. 무심함, 불변함, 언제까지나 움직이는 자의 주행을 멋지게 해내면 그만인 그 남자는 오토바이로서의 겐지가 태우고 싶은 또다른 자신이자 등장하길 바라마지 않는 환상적 종류의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언제나 쫓아주는 달이 있다면, 외로운 라이더에게 동지이자 따뜻한 불안이 되어주지 않을까.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는 작가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거친 동정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