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더 이상 패션이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여실히 깨닫는다. 너무나도 다양한, 자신만의 개성을 한껏 뽐내는 남성들을 보면 절로 시선이 옮겨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서, 패션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꽤 중요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사실은 남성에게서 패션을 배워보고 싶었다.
책 <사토리얼리스트 맨>의 저자 스콧 슈만은 세계적인 패션 블로그의 운영자이자, 스트리트 패션 사진의 선구자라고 한다.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멋의 소유자였다. 자신이 사진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책 <사토리얼리스트 맨>은 그 사진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책은 마치 패션 화보집 같았다. 제복부터 스트리트 룩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화려한 옷의 세계에 빠져 후루룩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그 후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책의 내용을 따라가보았는데, 가장 재미있었고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패션 아이템을 다루는 페이지였다. 남성들이 자주 착용하는 아이템들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등을 본인의 경험을 더해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설명문을 읽고 있으면 그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아해지는 기분이 든다. '우아해지는 기분'이라는 표현이 핵심인데, 그 이유는 책 <사토리얼리스트 맨>을 읽으며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나의 패션관이 변화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20살 초반, 내가 가장 패션에 미쳐있었던 시기였다. 매일 고군분투하며 '오늘 뭐 입지?'를 결정했던 것 같다. 똑같은 아이템을 반복해서 입고 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매일의 내가 달라 보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편안함보다는 독특함을 추구했다. 그러니 불편한 아이템들은 한두 번 입고 옷장에 처박아두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옷을 사기도 했었다. 당시의 나는 패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특한 개성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편안한 멋이 진정한 멋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화려하고 눈길을 사로잡아도 보는 사람마저 불편하게 만드는 옷은 결코 멋있다고 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옷을 과소비하는 습관을 많이 버릴 수 있었다. 계속 입을 것 같은 옷,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았다. 그럼에도 매일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동네에 잠깐 나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다른 착장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한정된 예산 안에서 나는 질보다 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책 <사토리얼리스트 맨> 중 다음의 문장이 있었다 :
돈이 없어서 제일 좋은 것으로 삽니다.
나는 이 문장이 퍽- 가슴에 꽂혔는데, 돈이 없어서 싼 것을 산다는 나의 신조와 정 반대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가장 좋은 것을 산다니..., 그제야 책에서 아이템만큼이나 강조했던 것이 떠올랐다. 바로 '소재'였다.
좋은 옷을 사는 과정은 단순히 좋은 아이템을 덥석 고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나에게 꼭 맞는 핏을 찾기 위한 수선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소재 또한 패션의 주요 요소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 것. 그간 나의 구매 행태를 돌아보았을 때, 결코 고려하지 않았던 영역들임에 틀림없었다. 그저 옷 자체의 독특함에만 초점을 두었지, 그 옷이 어떠한 기장과 핏으로 나와 매치될지, 옷의 소재가 어떤지 등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내 방 옷장 속의 옷들을 떠올려 보았다. 딱히 좋은 소재가 없었다.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패셔너블하다는 느낌은 이 같은 디테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똑같은 흰 티셔츠를 입어도 누구는 후줄근하고 누구는 멋이 넘치는 이유는 자신에게 잘 맞는 핏과 훌륭한 소재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옷장 속 옷을 전부 버려버리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며 이후 옷을 살 때면, 오프라인 매장을 이용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접 가서 입고 만져보며, 나에게 맞는 옷을 사는 기쁨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단 한 벌의 옷이라도 찰떡같은 한 벌이라면, 매일 그 옷을 입는다 해도 패셔너블할 수 있다는 진리를, 책 <사토리얼리스트 맨>을 통해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