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故 심일소령 공적진위 확인-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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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16포병대대장)

김성은 1950년 6월 25일 당시 6사단 16포병대대장으로 보직되어 있었다. 그는 1986년 5월 24일 16포병대대 주둔지에서 실시되었던 증언청취에 임했다. 증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김성, 최갑석(군수경리담당), 박영재(정보장교), 김운한(군수장교), 김장근(1중대장), 정오경(3중대장) 등이었으며, 김성 주관으로 당시 참모·중대장이 좌담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성의 증언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1월~3월간 포병 최초의 포병전공특별교육을 받았다. 피교육중 3.27부로 제16포병 대대장 명령을 받고 4월3일 부임하다, 대대에 부임 후 천전 북방 야산에서 전 장교 조회 하에 A포대의 주간 RSOP를 실시하고, 다음날 야간 RSOP를 소양강변에서 B포대로 하여금 실시하다. 그 결과에 따라 급속한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본인이 교육받고 온 교재로 4월10일부터 5월6일까지 전 장교를 주식후 기 식당에서 1시간~1시간 30분 식 실시하다, 동시에 각 포대별로 맹훈련에 돌입 부대대장, S-3, S-2 등은 교육감독. S-1, S-4는 인사나 후방지원에 대한 훈련을 하다. 5월10일경 대위 4명 서울에 교육차 가고, 전포대장이 포대장 대리로 훈련을 실시하다. 포술훈련은 숙련의 도가 최상급으로 보았다. 6월10일경부터는 전 부대 휴식을 취하며 정비(장비)중이었다. 우리의 훈련장소는 △99고지 부근 일대와 천전(샘밭) 북방 작은 통솔발 일대이다. 그리고 전방 예비진지 진입훈련도 했었다.(이용은 못했지만) 1950년 6월 25일 05.00경 7연대 S-2 김동명 대위의 전화로 적 남침을 알았다. 대대 본부에 연락하여 비상출동준비 명령을 내리고, JEEP차가 오는 대로 대대에 가다. 각 장교 숙소에는 연락병을 보내고 우선 포 2문을 농고교 북방 옥산포 사이 길 동측 잔디밭에 방열하고 본부에 오니 a포대장을 그리고 보내고, 포 2문 편성하여 천전(샘밭) 지서 동북방에 방열시키다. 그때가 0800경이 된 것 같다. 전방에서 피난대열과 지게를 지고 소총탄약을 운반하러온 민간인들을 보다. 0900경에야 4대식 배치했다. A포대에 나가니 모진강 옆의 적 포연이 보이는데 우리 포?는 닫지 않고 적 포탄은 우리 포진지 후방에 낙하하다. 이때 포진지의 지형물을 이용해야겠다고 느겼다. 1100경부터~1430경까지 우두산 OP에서 7연대장 임부택 중령과 둘이 있었다. 1400경 돌연 옥산포 북방에 차량종대 출현 쌍안경으로 보니 적의 전차행렬이었다. OP부근 몇 100m 밖에 적 포탄 낙하에도 처음 경험이라서인지 바로 옆에 떨어진 것 같았다. OP라는 말 뿐이지, 연대나 포병대나 통신수단은 연락밖에 없었다. 옥산포에 날아난 적 전차들 보고 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 전차가 소양교를 차지하면 포병을 어떻게 철수하지? 하는 것이 나의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우두산 동측의 소양강 옆목으로 “홴벨트, 뚫고 도강하는 훈련을 한 일이 있기에 그대로 하기로 생각하고! 나는 연대장에게 물었다. 연대장님, 옥산포에 대전차포를 배치했습니까?하고 물으니, 2문이 있어!하고 대답하는데, 옥산포 쪽에서 대돌과 연기 그곳에서 충천하였다. 그러더니 옥산포 북방 어귀에서 있던 전차들이 전부 돌아 북방으로 갔다. 나는, 연대장님. 계획대로 소양강을 끼고 합시다. 하니 임연대장도 그렇게 합시다 하고 OP에서 일어선 것이 1430경으로 본다. 조식 겸 점심은 OP에서 1400경 전차가 날아나기 직전, 우리 대대 보급하사관이 중?장조림을 박은 주먹밥을 갖고 왔기에 연대장과 먹었다. 다음 OP를 예정대로 봉의산에 정하기로 하고, 포병을 철수하여 각 포대 예비진지로 방열시키다. 천전에 갔던 포 1문 가신 사고가 우두산 남방 노상에서 있었다. 소양강 남으로 진지 편성 후는 통신연락도 잘 되고 교육받은 대로 정상적인 포병 운용하게 되었다. 각 진지를 돌아보고 대대CP(춘사)에 들리다 되었다. 부대대장 양원변 대위와 S-4김운한 중위, 최갑석, 정기후 상사들로부터 완전 이동되었다는 보고.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7연대는 우두산 일대와 소양강변 완전 장악. 25일 밤은 무사히 지내다. 2400경 교육갔던 장교가 왔다. 6월 26일 0800경부터 적 보병 출현.. 소양교 북서방 도로 2열종대 행진 포사 일분산 도주. 1000경 금강봉 남방 소양강 열목에 적 보병 약 1개 소대 벗고 건너오려다 포병의 사격으로 거의 떠내려가고 몇 명만 벗은 채 도주 소양강 상류 쪽에 적 대부대가 출현했다는 보고로 포병 사격 요청있었으나 사거리 ?? 사격 못하다. 1200경 적 전차 2대 소양교 북방 서부(화천 도로)에 출현 이를 HE와 WP탄으로 포격.. 급히 도주하다. 1200경부터 99고지 남방 보리밭에 적 보병 나타나기 시작. 6월 26일 1200시 이후, 99고지 부근은 우리 포병 항상 훈련하든 곳이다. 적의 포격도 심해졌지만 아군의 포격도 많아졌다. 1300경 나도 OP에 가다. 7연대장. 사단장 김종오 대령 G-3양중호 중령 등이 있 조금 후에 19연대장 문병권 대령도 오다. 금강봉(99고지) 남방 보리밭의 황색?가 어는덧 청흑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목격한 사람 외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포병 2개 포대 8문이 포격 개시하다. 연속적 10분하면 황색이 되고 중지하면 청색이 되고 하는 숨바꼭질 가는 느낌이었다. 시한탄 생각이 나서 포대에 물으니 B포대에만 약 60여발 있다고 해서순발신?과 혼용?격을 하니 훈련 때보다도 더욱 재미있는 효과적 전투를 아 보병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1500경 되자 적은 거의 없고 절룩거리며 가는 것이 보였다. 1500경 적의 각종 포격이 약 30분 내 극심했다. 시가지에 또 봉의산에 많이 멀어지고 아 포진지의 피해는 별로 없었다. 적 출현으로 1600경까지 포격을 계속하다. 이후는 산발적인 적 출현이며 적의 포격도 산발적인 것이 되었다. 홍천 지구 사?이 급하게 되어 야간에 A포병대를 홍천 북방 성산리로 출발시키다. 7R는 소양강 상류를 도강한 적과 접촉중. 춘천지구 전투뿐만 아니라 후퇴하면서 계속 그러했다. 그것은 포병의 1차 임무인 대포병?을 못했고 시종 보병지원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사거리 ??)지형지물 이용은 아 대대의 습관화된 것이다. 교육훈련을 끝내고 전투가 발생되었기에 초일만 당황하고 2일차가지 바빴지만 이후는 각 장병들이 나의 수족과 같이 움직였다. 특히 포병은 전투시 철모를 꼭 쓰도록 철저히 감독했다.”

김성이 25일 14시경 우두산에서 제7연대장과 함께 옥산포 일대에서 적 전차 행렬을 쌍안경으로 관측했고 제7연대장이 대전차포 2문을 배치했다고 말했다. 이후 옥산포 일대에서 연기가 충천했고 전 전차가 북방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이는 마치 대전차포 소대장 심일이 적 전차(자주포)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혀 북쪽으로 도망한 것 것처럼 보이지만, 공격주체, 공격방법, 파괴대수 등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 없다. 따라서 김성의 증언이 심일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심일의 공적이 있는 것처럼 증언을 호도하여 활용하고 있다.

6사단 전투상보(2종), 제16포병대대 역사일지, 1968년 이전의 공식기록, 참전자들의 증언이 심일의 공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김성의 증언이 25일 심일이 적 전차(자주포)를 파괴했다는 증거자료로 채택하기에는 많은 제한사항이 있다. 26일 12시경 적 전차 2대가 소양교 북방 서부(화천도로)에 출현하자 포병사격으로 적을 쫓아냈다고 증언했다. 이는 26일 낮에 적 자주포가 소양교에 돌입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따라서 25일 또는 26일 심일이 적 전차(자주포)를 파괴했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객관적이고 교차 비교하여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오히려 아 포병의 사격으로 심대한 피해를 입는 북괴군은 26일 옥산포 이남으로 진출하지 못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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