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이미지 by @gamiee
정신분석의 주요 가정 중 하나는 생애 초기 경험이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어떤 경험인지에 관해서는 1950년대 들어 존 볼비(John Bowlby, 1907-1990)라는 정신분석 지향의 정신과 의사가 구체화시키게 됩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을 만든 장본인인데요. 생애 초기, 즉 생후 2년 동안의 엄마-자녀 상호관계의 패턴이 이후 모든 인간관계의 초석이 된다는 것을 많은 연구들을 통해 밝혔죠.
애착이론은 매우 상식적입니다. 즉, 엄마와 안정적인 관계 패턴을 형성한 아이는 나중에 다른 인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감(basic trust)을 유지할 수 있고 친밀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보일 가능성이 낮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안정한 관계 패턴을 형성한 아이는 다른 사람을 불신하기 쉽고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서도 어려움을 경험하기 쉽습니다. 일시적으로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기 쉽죠.
그렇다면 불안정한 관계 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착이론이 태동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및 학문적 배경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비는 1907년생으로 영국인입니다. 볼비가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던 시기와 맞물려 있죠.
이 시기의 대세 심리학은 단연코 정신분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신분석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자극-반응(행동)이라는 눈에 보이는 영역을 통해서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행동주의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의 이 두 사조는 아이 양육에 관해서는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기본적인 욕구(입고 먹고 자는)를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그 이외의 것은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음식에 관한 아이의 일차적 추동(drive)을 감소시키는 것이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행동주의에서는 음식이라는 무조건 자극(unconditional stimulus)에 대한 아이의 자동적 반응이 음식을 제공하는 엄마라는 조건적 자극(conditional stimulus)으로 대치되는 것이 엄마에 대한 아이의 사랑의 근간이라 보았죠. 사용하는 용어만 다르지 사실 똑같은 말이죠.
이런 대세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계기는 WHO의 조사였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게 된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모양입니다. 볼비는 이 연구의 실무자로서, 1950년에 고아가 된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관한 조사를 위해 유럽과 미국을 돌았습니다. 미국에 간 볼비는 부모가 없거나 부모와 떨어져 고아원이나 병원에서 사는 영유아들에 관한 연구로 이미 유명했던 Spitz(1887-1974)나 Goldfarb를 만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볼비가 이후 펴내게 되는 조사 결과[Maternal care and mental health(1952)]의 이론적 틀을 제공합니다.
Spitz나 Goldfarb나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볼비처럼 정신분석 지향의 정신과 의사였던 Spitz의 주장에 관해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엄마-자녀 관계가 Spitz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정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성을 깊이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Spitz는 전쟁 중에 부모가 죽었다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인해 부모와 분리돼 병원에서 키워지고 있는 1세 미만의 영아들에게 포커스를 맞춥니다. 이 영아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여 대조군과 비교해 본 것이죠. 이 관찰을 통해 그가 내린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Spitz concluded that (1) affective interchange is necessary for a healthy physical and behavioral development of infants; (2) this interaction is provided by reciprocity between mother (or mother substitute) and child; and (3) deprivation of this reciprocity is dangerous for the development of the personality of the child.
엄마와 영아의 정서적 상호작용이 결핍(deprivation)되는 경우 영아의 성격 발달에서 손상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Spitz가 만든 영상에는 이러한 손상이 담겨 있습니다. 초점 없는 눈과 텅빈 표정, 정서적 무반응, 생기 없는 모습 등이 두드러집니다.
볼비는 Spitz를 위시하여, 영아기에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 하는 것의 장기적 해악에 관한 증거를 제시한 일련의 연구자들의 영향을 받아 Maternal care and mental health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the evidence is now such that it leaves no room for doubt regarding the general propositions—that the prolonged deprivation of the young child of maternal care may have grave and far-reaching effects on his character and so on the whole of his future life.
하지만 볼비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경험적 근거가 부족하고, 제시한 근거들조차 방법론적인 결함이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였습니다. 볼비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진행되었지만 결국 자신과 같은 얘기를 하는 미국의 한 심리학자를 주목하게 됩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심리학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해리 할로우(Harry Harlow, 1905-1981)입니다. 볼비는 할로우에게서 중요한 경험적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 개론서에 꼭 등장하는 원숭이 실험을 한 장본인이죠. 영양분을 공급하는 철사로 된 엄마인형과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는 천으로 된 엄마인형 중 태어나자마자 어미로부터 분리돼 자란 새끼 붉은털 원숭이가 어떤 엄마인형을 더 선호할지 본 것입니다. 정신분석이나 행동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양분 공급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실험 결과 압도적으로 천으로 된 인형을 더 선호했습니다. 천으로 된 엄마인형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죠. 엄마가 젖이나 우유, 밥을 주기 때문에 엄마에게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입증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의 상식을 뒤엎은 것이죠.
할로우는 스피츠나 볼비가 병원이나 고아원에서 보았던 상황을 실험실에 재현했습니다. 사족이긴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할로우가 처음부터 애착 연구를 위해 이런 실험을 셋팅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언어 연구를 하고자 했고 이에 동원될 원숭이들의 조건을 동일하게 만들려고 엄마로부터 분리해 위생처리된 우리에서 키우다가, 원숭이들이 우리에 깔려 있던 유아용 담요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너무 이르게 엄마로부터 분리돼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 한 원숭이들이 영아기에 엄마로부터 분리된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상동증적 행동(stereotypic behavior)이나 손가락 및 발가락 빨기, 무의미하게 몸을 앞뒤로 흔드는 행동 등을 보였던 것이죠.
실제 할로우의 원숭이 실험 동영상입니다. 3분23초부터 보시면 됩니다. 위협 대상에 직면하여 천으로 된 엄마 인형에게도 가지 않은 채 목적 없는 반복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위협 대상을 피해 엄마에게 가는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 하는 것이죠.
엄마인형과 함께 자란 원숭이는 진짜 어미와 함께 자란 원숭이들에 비해 다음과 같은 행동상의 이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a) They were much more timid.
b) They didn’t know how to act with other monkeys.
c) They were easily bullied and wouldn’t stand up for themselves.
d) They had difficulty with mating.
e) The females were inadequate mothers.
해리 할로우는 이런 결과를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 한 채 자란 영아들에게로 확장합니다.
He also concluded that early maternal deprivation leads to emotional damage but that its impact could be reversed in monkeys if an attachment was made before the end of the critical period. However, if maternal deprivation lasted after the end of the critical period, then no amount of exposure to mothers or peers could alter the emotional damage that had already occurred.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해석함에 있어, 볼비처럼 Spitz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네요. Spitz에게 영감을 줘서 고맙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답니다.
다시 볼비 얘기로 돌아오면, 볼비는 해리 할로우의 실험에서뿐만 아니라 콘라드 로렌츠(Konrad Lorenz, 1903-1989)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로렌츠는 새끼 거위나 오리가 부화 직후 최초로 보게 되는 움직이는 대상을 어미로 지각한다는 것을 밝힌 사람이죠. 심리학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로렌츠가 마치 어미처럼 거위를 이끌고 가는 사진을 한 번쯤은 보게 되는데, 로렌츠가 거위 새끼에게 어미로 각인(imprinting)된 것이죠. 이렇게 한 번 각인되면 변화하지 않습니다.
볼비가 로렌츠의 연구에서 중요하게 본 것은 각인이 생득적 프로그램이라는 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대상과 애착을 형성하게끔 프로그램화돼 있다는 것인데, 이런 프로그램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착이 형성되는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가 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놓치면 애착 형성의 어려움이 매우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정적 시기가 인간은 대략 만5세까지입니다(볼비는 처음에 만2.5세, 즉 30개월까지라고 했다고 나중에 만5세까지라고 수정합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여러 해로운 결과가 초래되는데, 낮은 지능을 비롯해 발달상의 지연이 초래된다거나 우울, 정신병질(psychopathy), 공격성을 비롯한 문제행동이 증가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볼비는 1969년에 내적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에 관해 언급하면서 영유아가 엄마와 맺는 관계의 패턴이 이후 성인기 대인관계 패턴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 글의 초반에 제가 언급한 바 있죠. 영유아기에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내적 작동 모델에 기반하여 1) 다른 사람은 믿을 만한지 2) 내가 가치로운 사람인지 3) 내가 다른 사람과 효과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가늠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연유로, 엄마의 보살핌이 부재했을 경우 삶이 상당히 괴로워질 수 있겠죠.
애착이론에 관한 비판이 많고 그것을 소개하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하질 않네요. 가장 주요한 비판은 엄마의 물리적 부재뿐만 아니라 심리적 부재(ex. 우울장애를 지닌 엄마) 또한 아동의 성격 발달에 악영향을 미치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어릴 적 엄마와의 상호작용의 질이 향후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강조하는 것은 이제는 조금 식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상식이 아니었던 시기에 어떻게 해서 이런 이론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역사적 의미를 짚는 것은 심리치료자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름 공부를 좀 해봤습니다. 여러분도 흥미롭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이 글 제목은 제가 좋아하는 밴드인 Bush의 노래 제목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ref)
- Van der Horst, F. C., & Van der Veer, R. (2008). Loneliness in infancy: Harry Harlow, John Bowlby and issues of separation. Integrative Psychological and Behavioral Science, 42(4), 325-335.
- https://www.simplypsychology.org/bowlby.html
- 마이어스의 심리학 개론 수정판 2쇄, 109-113.
- https://synapse.koreamed.org/pdf/10.5124/jkma.2008.51.4.357
노래들으면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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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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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궁금했던 건, 그 때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성장과정에서 치명적인 트라우마에 노출된 경우 사람이 파괴되잖아요. 그 파괴된 상태에서 회복되는 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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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이네요. 다만 이론적 수준에서야 공부해서 무슨 말이든 써볼 수 있겠지만 트라우마 생존자 치료를 한 적이 없으니 제대로 된 구체적 답은 어렵겠네요. 해바라기센터처럼 외상 경험한 사람을 치료하는 기관의 선생님들이 더 잘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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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되게 복잡한 질문인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간단히 답을 하자면 트라우마 치료는 파괴 이전의 상태로 원상 복구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전제 하에서 무엇을 회복으로 정의할 것인지 트라우마 피해자가 결정하는 것이 첫번째고 목표가 결정되면 다양한 기법을 사용해서 돕게 됩니다. 어쩌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치료의 알파요 오메가일 수 있겠네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 트라우마에 대항하는 힘이 될테니까요. 덜 아프게 될 때까지 트라우마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죽고 싶은 마음보다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면 트라우마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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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정의를 내담자가 내리는 게 중요하군요. 하나 배워 갑니다. 삶에 대한 통제감을 송두리째 읽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으니, 외상치료에서는 어쩌면 내담자가 스스로 목표를 정하는 게 더 중요해질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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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서 외상치료의 목표를 치료자가 정하는 것이 외상적 경험의 반복이 될 수 있다고 주의를 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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