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하루하루 여름을 버티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 매년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란 적응하는 동물이고, 뭐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이를 먹으며 반복할수록 노하우가 쌓이기 마련이니까 여름을 나는 것도 조금씩 가뿐해져야 할 텐데, 이 더위는 도무지 그렇지가 않다. 외국에 나가서 살기 시작하면 아주 간단한 생활의 기초적인 지식부터 새로 배워야 해서 힘들다는 것처럼, 매년 여름에 생존하는 방법을 다시 궁리하고 익혀야 하는 꼴이다.
대체 그동안은 여름을 어떻게 버텼지? 잘 생각해보자. 일단 민소매 셔츠를 입고 버티다 결국 냉감 티셔츠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바지를 벗었다. 대야에 차가운 물을 떠다 발을 담그고 있기도 했다. 종종 찬물로 샤워를 하기도 했다. 거기에 물에 적신 수건을 두르고 선풍기를 틀어놓으면 덥긴 해도 도저히 못 버틸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식으로 버틸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111년만의 정신나간 폭염에 방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찬물에 발을 담그는 것은 분명 시원하지만 물이 미지근해질 때마다 바꾸기도 번거롭고, 여차할 때 움직이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았다. 결국 찬물은 집어치우고 찜질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찜질팩을 얼려두고 돌아가면서 등에 대고 앉는 것이다. 이 방법에는 응결된 물이 줄줄 샌다는 것, 그리고 앉기가 좀 불편해진다는 것, 그리고 찜질팩을 등, 특히 심장부에 가까운 곳에 밀착시킬 수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당장 돈이 들지 않고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해 별 도리 없이 계속하고 있다.
선풍기는 한 대를 추가했다. 정사각형의 선풍기를 책상 앞 창가에 올려두고 바깥의 시원한, 아니 그나마 좀 덜 뜨거운 공기를 끌어들이는 용도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방법은 방안에서 달궈진 공기를 선풍기로 빙빙 돌리는 것에 비해 체감상 압도적으로 나았다. 주변에 추천해도 좋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으니, 일단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면 더러운 공기를 양껏 쐬는 꼴이 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바람이 지속적으로 얼굴로 오는 탓에 눈이 건조해지며, 결정적으로 바깥 공기를 암만 끌어들여봤자 33도를 웃돌면 이래저래 더운 공기를 쐬는 것은 매한가지다.
물론, 나도 심각한 바보는 아닌 만큼 에어컨을 틀면 거의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방은 정말 기막힐 정도로 공기가 통하지 않는 구조라 에어컨을 틀어봐야 대단한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는 게 치명적이다. 거실이 쌀쌀할 지경이 되어야 내 방은 그나마 살만한 온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기 순환을 위해 요즘 유행하는 서큘레이터를 살까 하다가, 선풍기의 앞쪽 철망을 서큘레이터처럼 바꾸어 사용하는 물건을 사서 선풍기의 힘을 강화해봤다. 그리고 그것으로 온갖 각도로 갖은 궁리를 다 했는데, 거실 보다 3도 높은 수준이 한계였다. 거실을 보통 28도로 맞추니까 내 방은 31도에서 더 낮추기 힘들다는 뜻이다.
31도라는 건 은근히 애매한 온도다. 낮은 습도에서 선풍기를 틀어놓으면 썩 쾌적하지만, 문을 닫는다는 이점을 버리면서까지 취하기에는 그렇게까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온도다. 그렇다고 31도는 트나 안 트나 별 소용도 없다며 방문을 닫고 바깥 공기를 끌어당기기 시작하면 온도와 습도가 기막힐 정도로 쭉쭉 올라간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바깥보다 더울 수밖에 없으니 밖이 30도 언저리라면 방 안은 32도에서 33도까지 치솟는 것이다. 선풍기 앞에 있으면 게임에서 상태 이상에 걸린 것처럼 체력이 조금씩 깎이고, 선풍기 앞을 벗어나면 당장 움직이기도 벅찬 온도다.
그러니 요즘은 거실에서 에어컨이 가동되면 그렇게까지 시원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미오를 맞이하는 줄리엣처럼 문을 활짝 열어젖힐 수밖에 없는데, 문을 열면 당장 온갖 소음이 딸려와서 방이 순식간에 카페만도 못한 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시끄럽기야 카페가 더 시끄럽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카페에서는 쇼프로를 틀어놓지도 않고, 나와 관련된 소음이 들리지는 않는다. 게다가 카페에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대뜸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반면에 집에서 나는 온갖 잡소리와 말소리는 내가 소속된 집단에서 발생하는 소리고, 어떤 소리든간에 이래저래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카페에 앉아있는데 내 뒤로 시도때도 없이 사람들이 오가며, 옆자리에서는 태블릿으로 버라이어티 쇼를 이어폰 없이 보면서 들릴듯 말듯 내 부모욕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자리에서 무슨 생산적인 활동이 가능할 턱이 없다.
이런 고통이 한밤중, 잠들 때면 좀 나아지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부모님이 깨어 있든 말든 TV는 퍽 오랫동안 켜져있고, TV까지 꺼진 뒤에는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컨디션이 망가지면 피곤해도 오히려 잠이 오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며칠 전에는 이것이 겹치는 바람에 수면유도제를 먹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안대를 해서 내세를 꿈꾸는 투탕카멘처럼 안온한 휴식을 시도해봤지만 40분쯤 고군분투한 뒤에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요는 더위로 고통받든지 소음에 고통받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계절인 셈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왼팔을 자르는 게 나을까, 오른팔을 자르는 게 나을까 따위의 건전하지 못한 선택이다.
[2020년의 출근길(상상)]
이러한 여름의 고통의 가장 끔찍한 면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휴식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이다. 사람이란 낮에 고통받은 다음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어야 다음날 그나마 사람 비슷한 꼴로 다시 고통받을 수 있는데, 폭염은 이 보금자리에 불을 붙여버렸다. 고통의 A코스가 끝나면 B코스로 슬쩍 뒤집을 뿐이다. 낮에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은 다음 밤에 불로 지지는 식이다. 생각만 해도 입맛이 십리 밖으로 달아난다.
어제는 회사 생활로 고통받는 후배에게 요즘은 회사 가는 게 너무 기다려진다는 말을 들어서 적잖이 충격받았다. 그만큼 회사가 더 나아진 게 아니라 세상이 더 가혹해졌다는 뜻이라 오싹했다. 이대로 내년이나 내후년쯤 되면 자원과 무기를 독점한 세력만 영화를 누리는 매드맥스 세계처럼 에어컨을 마음대로 가동할 수 있는 부호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부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정말 무서운 점은 이렇게 덥다고 써놓고 몇 달 지나면 또 추워서 얼어죽겠다고 쓸 게 뻔하다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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