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라는 놀이를 아시는지? 서브컬쳐에 취미가 있는 분들이라면 대강 개념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얘기를 시작했다간 모르는 분이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를 테니 간단히 설명하자.
아, 한 번 더 경고하자. 이 글은 TRPG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니까 그런 내용을 기대하시면 안 된다. 정반대에 가깝다.
TRPG는 풀어 쓰면 '테이블 토크 롤 플레잉 게임’이라는 것으로, 근본적인 개념은 '탁자 위에서 얘기하며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놀이'다. 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요즘 세대에게는 익숙할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데 컴퓨터의 연산이 필요한 부분을 모조리 인간이 아날로그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플레이어들은 전사, 마법사 등등의 역할을 담당하고 캐릭터 시트에 체력과 아이템 따위를 기록하며, 마스터는 이들에게 일어날 일(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하고 말로 풀어서 모두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자, 마을을 떠나서 한 시간쯤 가니 던전 입구가 보입니다. 그런데 입구 앞에 고블린 두 마리가 보초를 서고 있군요. 어떡하시겠어요?” “멀리서 롱보우로 저격을 시도해볼게요.” 대강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사실 TRPG를 컴퓨터로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모두에게 익숙한 형태의 롤플레잉 게임이니까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시간이 남아돌던 시절, 1999년쯤부터 수 년간은 TRPG라는 개념에 열광해서 퍽 열정적으로 했다. 공부하는 것으로 오인될 만큼 룰북을 보고 많은 연구를 했고, 친구들을 모아서 몇 번이고 게임을 시도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이야기 하나가 멀쩡히 끝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그러든 말든 방대한 관념의 세계에서 모험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많은 룰북과 쓸만한 관련자료를 수집해서 읽었고, 강좌를 들었으며, 행사에도 다녔다.
그러다 대학에서는 보드게임이나 TCG 따위를 하느라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종종 시도는 했다. 좀더 빠르고 간편한 룰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번에야말로 다시 제대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재정적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책 한 권만 사면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는 TRPG쪽이 다른 유희보다 경제적일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정말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TRPG라는 놀이의 근본적 개념 자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극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표와 알 수 없는 단어들... 놀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이 유희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일단 책 한 권만 사면 해결된다는 금전적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적인 면에서는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았다. 게임을 하려면 당연히 규칙을 익혀야 하는데, 상상의 기반이 되는 세계관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의 처리 방식을 모두 익히자면 그냥 소설책 한 권을 읽는 시간의 몇 배는 되는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것을 그때그때 알아보고 해결하기로 하고 넘어간대도 마스터가 이야기를 준비하는 과정만은 도저히 대강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명색이 작가니까 못할 것이야 없지만, 작가라서 발생하는 딜레마도 있었다. 모두가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준비하자니 힘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빼앗게 되었으며, 그렇다고 느슨한 이야기를 애드립으로 이어보려니 이렇게 무책임한 이야기를 내놓게 되었다는 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 둘 사이의 적당한 지점을 발견한다는 것이 내게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물론 마스터를 하지 않고 플레이어로 참여하면 해결될 일이긴 하지만, 내 주변에서 마스터를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열성적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나선 사람이 정말 게임을 진행하는 경우는 더욱 적었다.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게임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은 게, 나도 가까운 사람들과 재미있게 노는 방법으로 TRPG를 선택한 것이지 TRPG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가서 누구든 만날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던 와중에 하나 둘 등장한 것이 마스터가 할 일이 적은 규칙이었다. "던전 월드", "고마워요 대소동 해결단”처럼 ‘이야기를 미리 준비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플레이어가 만드는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들이 나와 기대감을 품고 구입해 봤다. 하지만 이렇게 열린 이야기를 만들자니 또 문제가 발생했다. 내게 그런 이야기를 이끌어갈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아무렇게나 한 이야기를 수습해서 새 이야기로 이끄는 것은 지면 위에 완성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다른 근육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취미로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고 대뜸 무대에 올라가 스탠딩 코미디를 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룰북에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을 오히려 재미있는 방향으로 키워보라는 충고가 적혀 있긴 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령 적들의 기지로 쳐들어가는 길목에서 상인과 시비가 붙은 플레이어가 도둑질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어떡하면 좋을 것인가? 컴퓨터 게임처럼 경비가 나타나 플레이어를 패죽여서 로드하는 것으로 해결되면 좋겠지만, TRPG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물론, 경비에게 끌려갔다가 또다른 사건을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풀려난다든가 재미있는 전개로 이어갈 방법이야 머리를 굴리면 얼마든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혀 생각 못한 방향으로 즉석에서 사건을 만들어가는 것은 계획하에 이야기를 만드는 게 업인 나로서는 대단히 힘든 일이었고, 게다가 플레이어 중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세상 모든 곳을 산책하고 싶어하는 개처럼, 혹은 GTA를 플레이하는 게이머처럼 별짓을 다하기 마련이라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없는 일로 남들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 고역스럽고 부담스러운 일도 드물다.
정리하자면 준비 시간이 짧으며 즉흥적 이야기 진행의 부담이 적은 규칙이 필요하다는 얘긴데, 그런 세모난 네모 같은 규칙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피아스코”라는 규칙이 있었다. 이 게임은 이야기의 테마에 맞는 소재 세트를 준비한 다음 주사위를 굴려 캐릭터들의 관계를 무작위로 정하고, 그런 다음 마스터 없이 플레이어끼리 서로의 욕구와 갈등에 따른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마스터가 없다는 것, 그리고 테마에 맞는 세트라는 확정 영역 안에서 무작위로 진행된다는 점이 매력이라 쾌재를 부르며 구입했다. 하지만 막상 이것을 테스트하려고 보니 너무나 막연하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면 'A는 마약 중독자라 약을 살 돈을 훔칠 계획을 하고 있고, B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로 노모와 약속한 상태예요. 자,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식인데, 이런 설정이 재미도 있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쓰라면 그럭저럭 몇 자 두드릴 자신이 있긴 해도 즉석에서 다른 사람과 연기하며 꼬여가는 상황을 만들어갈 자신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렇게 도와주면 된다’고 설명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또 새로운 규칙이 번역되어 나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TRPG 전문 출판사 초여명에서 한글판 제작을 진행중인 “마법의 가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규칙은 아주 근사한 두루말이 지도를 펼쳐가면서 그 위에 적힌 키워드를 사용해서 각 플레이어들이 마법사와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게 되어 있다.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지지만 그 이야기의 재료가 나와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 플레이어가 저지른 짓으로 마스터 한 명이 수습하느라 곤혹스러울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슴없이 펀딩을 하긴 했는데…… 게임이 도착하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가격이었다. 지도를 사람이 직접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는 물건이라 10만 원에 달했던 것이다. 게임이 정말 재미있다면야 10만원이 아깝지 않겠지만, ‘재밌으면 됐지, 뭐’ 하고 안심하고 기다리기엔 불안이 심했다.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적었다. 이 지도에 이런 단어기 적혀 있으니 그걸 갖고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겠구나 하는 그림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뭘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자기 차례에 30초씩 침묵하는 사람들과 구입을 후회하는 내 모습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제작사 사정으로 출시가 연기되었고, 나는 구입을 취소했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내가 새삼 깨달은 것은, TRPG라는 게 아무리 쉽고 자유로워 보여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는, 대단히 까다로운 유희라는 사실이다. 끝도 없이 퍼부을 시간도 있고 ‘이거 해 보자’하면 ‘뭔데뭔데?’ 하고 너도나도 몰려드는 친구들도 있어서 아무리 실패를 반복해도 상관없던 시절에는 그런 어려움을 거의 느낄 수 없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누구나 바쁜 시간을 쪼개서 살고 있고, 그 시간이란 돈을 벌거나 돈을 벌 체력과 멘탈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이며, 그 시간에 간단히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무한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공급되고 있다. 요는 즐거움의 채산성을 맞추기가 어려울 뿐더러 다른 유희에 비해 우위를 점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피터팬이 와서 ‘모두가 꿈꿔온 세계에서 다같이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자!’라고 꼬시면 애들이야 따라가겠지만, 어른은 ‘저기, 전 내일 출근이라…… 그냥 집에서 영화나 보면 안 될까요?’ 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쓰다 보니 완벽히 암담한 결말로 치달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일련의 시도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내 조건에 거의 들어맞는 규칙을 하나 발견했던 것이다. 출판사 이야기와 놀이에서 정식 출간한 “평온한 한 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 규칙은 마스터 없이 플레이어끼리 카드를 뽑아 사건이나 설정에 대해 생각하고 마을과 그 주변의 지도를 그려가면서 공동체의 한 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일반적인 TRPG와 많이 다르다. 하지만 생각할 거리가 카드에 적혀 있어 헤맬 일도 적고,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라 연기나 마스터링의 부담이 없다. 누가 기상천외한 소리를 한대도 한 걸음 떨어져서 ‘그래, 뭐 어때, 다 죽이자’ 하고 끄덕일 수 있다. 한 개인이 되지 않는 만큼 ‘롤플레잉’이라는 몰입감은 떨어지긴 하지만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만족할만 하다. 그러니 부담없이 피터팬을 따라갈 수 있을 때7지 이것으로 참아볼 생각이다. 물론 그런 날이 올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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