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났다. 세수하고 면도하고 밥을 챙겨 먹었다. 매주 수요일은 충남서산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다섯 시간 강의를 한다. 지난 주처럼, 지지난 주처럼 그렇게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인천에서 서산까지 신나게 달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길이 막히지 않았다. 11시부터 강의 시간인데 10시쯤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학교 입구부터 너무 조용했다. 상점들이 문을 열지 않았다. 이 시간쯤엔 학생들이 교문 앞부터 흘러 넘쳐야 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교문에 차량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다. 보통은 진입하는 차로나 진출하는 차로나 차단기가 다 열려 있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자동으로 차번호를 찍는 기계가 내 차 번호의 숫자는 정확히 읽었으나 한글은 정확히 읽지 못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도서관 건물을 왼쪽으로 두고 내가 강의할 건물로 올라갔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강의동으로 들어섰는데 1층 복도에 무슨 세트장처럼 나뭇잎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는 '점검중'이라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겠다 싶었다. 바로 그 순간, 뭔가 이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2층 학과 사무실에 가서 뭔가 물어봐야겠다. 계단을 오르면서 내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학교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무슨 날일까. 개교기념일? 역시 학과 사무실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조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진 뒤, 잠에서 막 깬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하고, 오늘 학교에 왔는데 아무도 없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오늘 개교기념일이에요. 아시는 줄 알고 말씀 안 드렸어요. 죄송해요."
하아--, 이거 완전히 당했구나.
내가 출강하고 있는 I 대와 K 대는 개교기념일일 경우, 학교 본부에서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준다. 그것도 한참 전에. 그러나 이 학교는 무슨 행사가 있어 교직원 식당을 이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두 번 전달했을 뿐, 이렇게 중요한 학사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보도 없었다. 학기초에 학사일정표 같은 걸 주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대학은 학교 본부에서 학사일정을 알려주는 것도 모라자서, 내가 출강하는 학과의 조교 역시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개교기념일이나 교내 행사 때문에 수업 진행이 어려울 경우, 미리 미리 알려준다.
게다가 다른 대학은 학교 본부가 학사일정을 알려주고, 조교가 다시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서, 학생들이 강의계획서를 같이 볼 때, 자기 일정표를 들여다보면서 '그날은 개교기념일인데요' 혹은 '수시입학시험하고 겹쳐서 수업이 안 될지도 모르는데요' 하는 식으로 내게 일정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일단 지난 주까지 이 학교는 내게 개교기념일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에 앞서 학기 초에 개교기념일이 언제라는 정보가 담긴 학사일정표를 주지 않았다. 알아서 찾아 보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학과 조교 역시 '아시는 줄 알고'라면서 내게 책임을 떠넘겼다. 조교는 학생들이 내게 정보를 줬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인천에서 서산을 찍고, 황량한 학교를 구경한 뒤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을 때, 해당 학과의 과대표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요는,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도 어제에서야 오늘이 개교기념일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신입생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어제 알았으면 어제 연락을 했으면 될 일 아닌가.
나는 수업을 마칠 때, 꼭 두 마디를 덧붙인다.
"질문 있어요?" (질문이 있으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질문이 없으면 다음 주에 봅시다."
지난 주에도 분명히 학생들에게 다음 주에 봅시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가방을 싸기 바빴는지 아니면 다음 주 일정 따위야 그때 가봐서 생각하는 것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2학점짜리 수업 하나, 3학점짜리 수업 하나를 한다. 합쳐서 다섯 시간이다. 수십 명이 넘는, 그 두 클래스의 어느 학생도 다음 주에 보자는 내 말에, 다음 주는 개교기념일입니다, 라고 말한 학생이 없었다. 학생들은 학교나 조교가 내게 정보를 주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아침에는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어떻게 이렇게들 무신경할까. 집에 도착하고 나서, 과대표의 전화를 받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이름은 <미디어의 이해>와 <미디어 콘텐츠>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정보는 어떤 채널로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허허, 미친사람처럼 그저 웃는 게 내 건강에 도움이 될까.
앞으로는 어느 대학에 출강하든지 학교 본부나 조교나 학생들에게 정보를 구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찾아나서야 할까. 대학 강사 생활 7년차에 접어들지만 이렇게 학교, 학과, 학생 모두가 사전에 모의라도 한 듯이 내게 학사일정 정보를 주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 주에 학생들과 만나 이번 '사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봐야겠다.
- "질문 있냐?"라고 물었을 때, 왜 '다음 주는 개교기념일인데 수업을 합니까?'라고 묻는 학생이 없었을까.
- "다음 주에 만납시다."라고 했을 때, 왜 '다음 주는 개교기념일인데 우리가 만나는 겁니까?'라고 묻는 학생이 없었을까.
- 학교 본부는 내가 가지도 않는 교직원 식당 이용 정보는 주면서 정작 중요한 학사일정인 개교기념일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을까.
- 수업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돕는 게 조교의 업무 중 하나인데, 왜 조교는 내게 다음 주에 개교기념일이라는 정보를 주지 않았을까.
- 내 수업을 듣는 과대표는 수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개교기념일을 그 전날 알았다는 게 정말일까. 알았다면 왜 그 순간에 전화해서 그 정보를 주지 않았을까.
미디어 공부가 따로 있나.
아니, 이 문제야말로 '미디어의 이해'나 '미디어 콘텐츠'에 관한 진짜 공부가 되겠다.
얼마나 황당하고 허탈하셨을지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것처럼 정보의 홍수 속 정작 중요한 정보의 부재라니! 그래도 가르치시는 주제와 연관성을 찾으신 데에 의미를 둘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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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참 당황스럽더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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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개교기념일에 대한 정보를 전혀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무관심의 결과인지. 인천에서 서산까지 엄청 허탈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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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가는 길 오늘 차가 안 막혀서 참 다행이었어요.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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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도 황당한데 당하신 본인은 얼마나 황당하셨을지..
어떻게 그렇게 정보가 전혀 전달이 안 되었는지 알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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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도시에 들어갔다 온 느낌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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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 저도 허탈한데..많이..속상하셨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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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다보니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겪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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