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것들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스테판 들롬
자비에 돌란만이 영화의 극단적 젊음의 불씨를 가지게 될 것이다. 19세에서 25세에 매번 새로운 다섯 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항상 가장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이 젊은 영화작가의 최근의 미디어의 조명은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처럼 일찌기 눈을 뜬 재능을 알아야 만 한다. <아이킬드마이마더>는 영리하고 가공하지 않은 블랙 유머의 보고서였다. <상상의 사랑>은 사탕 같았으며 로맨틱했다. <어쨌든 로렌스>는 유아적이고도 비극적인 괴물 같았으며 <전원의 톰>은 스릴러로 돌아오는 미니멀리스트적 작품이었다.
빛나는 <마미>는 깐느에서 수상하면서 순환 형태를 완성한 후 휴식을 선언한 이후 제시카 차스테인과 영어로 만드는 영화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그에게 충분한 휴식이었고 멜로영화와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 사이에서 리듬과 내레이션 관점에서 가장 잘 통제된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행복감을 선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스티브를 믿지 않는 이에게 그는 대답했다 : "오염된 것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 그것은 시네아스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모든 것은 신념 문제이고 신념 전체에 대한 것이지 오염된 것을 위한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비에 돌란은 젊음에 대한사례를 신념 만큼이나 부여하기 때문에 모든 세대들에게중요해질 것이다. 오염된 것들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며 또한 모든 영화작가들은 더 이상 반복되는 침울함 속에서 어두움과 환심을 사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충분히 믿지 않는 모든 것, 소극적으로 이미 사용되었던 방식으로 작은 시도를 하는 조정 같은 것도 믿지 않는다. 냉소의 오염, 소극성의 오염 과 여러 달, 여러 해 이래 우리가 침울한 영화들로 신중한 영화들의 권태라고 말할 것들도. 관객들은 시시한 효과들로 축소되지 않는 불씨 같은 영화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우연으로 프랑수아 트뤼포는 씨네마테크에서 정확히 동시에 추앙된다 할 때, (<줄 앤 짐>의 트리오, <상상 속 사랑>과< 마미>의 돌란이 <아이킬드마이마더>로 시작한 트리오를 상기함에도 불구하고) 두 시네아스트들을 비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스무살의 젊고 완고한 두 남자들은 완전히 현실의 욕망을 수여했다. 트뤼포가 까이에에 비평을 썼을 때 가장 커다란 논점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이 현대적 제스처 속에서 결과의 섬광을 이용해 여러 가지 것들을 형식화하는 첫 손에 꼽힌다. 스타일의 제스춰, 모든 것의 파편, 위대한 작품의 인생. 영화는 죽음 혹은 우울을 다루지 않는 대신에 삶과 건강을 가져올 것이다. 트뤼포는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는 위대한 사람들'처럼 철학을 느낀 질 들뢰즈와 예술가들의 선구자였다.
'살아있는 위대한 사람들'? 브루노 뒤몽의 예사롭지 않은 <릴 퀸퀸(P’tit Quinquin)>은 섬광을 뿜으며 작가의 정형화된 이미지 같이 프랑스 영화계의 풍경에 혁명을 일으킨다. 영화작가가 이처럼 위대한 제스처를 취할 때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아르테를 통해서 <릴 퀸퀸>을 천 오백만 관객이 보았다.) 흥행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살아있는 위대한 영화들, 이 영화들은 장-뤽 고다르와 알렝 까발리에 같은 오래된 거장들의 작은 홈 무비들이기도 하다. <언어와의 이별 (Adieu au langage)>은 멜랑콜리하지 않았고 반짝이고 기민하였으며 팽창했다. 까발리에는 <천국>으로 우리들의 상상의 무한대가 사물과 얼굴의 날 것으로 모아질 수 있으며 천국은 단지 손 안에 쥐여 있다는 신념으로 우리를 안심시키는 영화를 선사했다. 그러므로 물질은 감동시키고 스스로 빛이 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우선 위대한 글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 '경멸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아마도 행복한 영화들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2014년 4월 7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