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의 영의 치명적인 공격은 무관심이다.

in christianity •  5 years ago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증오란 기대하는 바가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증오의 원인이 해소되면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무관심은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달달한 말을 해주어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아쉽게도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을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무엇인가? 삶의 지난한 문제가 해결되거나, 자신이 원하는 축복을 얻어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물론 구원을 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덤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하면서 교회를 오래 다녀도, 자신의 기대감이 실망과 좌절로 바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그들은 교회를 등지고 떠나갈 채비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나가서 교회지도자와 교인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악담과 비난을 일삼는 안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작금의 부패한 목사들과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교인들이 그러한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안티들은 빙산의 일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종교에서 말하는 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평가절하하면서 관심을 덮어버렸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교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과 영혼을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고 축복과 행복의 삶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가? 물론 아니라고 할 교인들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교회마당을 밟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것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왜냐면 성경에는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영이 기적과 이적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고질병을 치유하고 삶의 지난한 문제를 해결해주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이런 일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진배없이 무능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고단하고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필자가 성령으로부터 들었다는 영음의 말씀을 거짓말로 폄훼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정신질환과 고질병을 치유하였다는 얘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가 오죽하면 충주 영성학교에 와서 사람들을 붙잡고 확인해보라고 얘길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설령 필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적과 이적으로 정신질환과 고질병을 치유하며, 놀라운 능력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성경 속의 사건으로만 치부하고 있다. 더 이상 기적과 이적을 기대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어떤 모습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 형식적인 예배의식과 종교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는 종교인의 모습일 뿐이다. 마치 일년에 단 한번, 초파일에 절에 가서 부처상을 향해 절을 하면서 돈 몇 푼을 던져주고 나서는, 자신은 불교를 믿는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불교신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보다는 더 자주 교회예배에 참석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게 다를 뿐이다. 기적과 이적을 믿지 않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남아있을 턱이 없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선에서 신앙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 무관심한 교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는 기도와 말씀이다. 성경은 쉬지 말고 전심으로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기도하는 내용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하나님과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여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도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소수의 교인들만이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1,20분 기도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잊은 지 오래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또 다른 통로는 말씀이다. 말씀공부는 우리네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것으로 자부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지식으로 배워서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가 아니다.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가슴으로 내려와서 비로소 말씀을 통해 교제하는 자녀가 된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또한 말씀은 하나님 그 자체이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경험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고 겨우 설교시간에 들은 성경구절을 아는 것으로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설교시간에 목회자들이 말하는 성경구절은 전체 성경 중에서 5분의 1도 채 되지 않으며, 그것도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해서 아전인수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적지 않다. 말하자면 오염되고 변질된 설교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달달한 덕담과 축복, 격려와 위로의 조미료를 쳐서 본래의 맛을 잃어버린 요리를 먹으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예배당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무슨 내용을 들었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을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집에 가자마자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낙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롬10:20,21)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찾지도 않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며,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루 종일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무관심하고 패역한 이 세대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겠는가? 그리 오래되지 않으면 갑자기 종말의 날이 닥칠 것이다. 그 때에 당신이 그동안 하나님께 보인 무관심의 징벌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 영성학교,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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