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번역: 변화에 대한 해커적 접근, 해킹의 문화적/이단적 의미

※ 사회적 금융, 임팩트 투자, P2P 탈중심 금융, 보조 화폐, 지역 화폐, 디지털 화폐 등에 걸친 포괄적인 대안 금융(alternative finance) 안내서에서 해킹의 문화적, 이단적, 전복적 의미를 풀이하는 서문의 몇 구절을 뽑아 소개합니다.

• 출처: Brett Scott, The Heretic's Guide to Global Finance: Hacking the Future of Money, Pluto Press, 2013.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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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많은 사람들이 전복적(subversive) 활동가를 체 게바라 같은 유격대 전사라든가 직접 행동에 나서는 활동가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전복적 운동처럼 보이지 않아도 전복의 힘을 발휘하는 활동들이 아주 많다. 이 책은 그러한 영역을 탐색한다. 예를 들어, 대안적 금융 혁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배적 시스템과 맞서지 않고 우회하고자 하는 버크민스터 풀러§ 스타일의 창의적인 전복에 가담하고 있다. 또한 인류학적 접근은 ‘나와 타자’로 갈라지는 금융 내부자와 외부자 사이의 분단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면 금융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접촉면이 넓어진다. 따라서 인류학적 접근은 양자의 분단에서 힘을 얻는 금융 체제를 전복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1895~1983): "기존의 것들과 맞붙어 싸워봤자 절대 현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기존의 모델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새 모델을 만드세요."

금융 체제는 단단히 자리 잡아 좀처럼 꿈쩍하지 않는다. 내 견지에서 볼 때 견고한 금융 체제를 전복하려면 금융 시스템을 개방적으로 탐사하는 과정을 폭넓게 수행해야 한다. 폐쇄되지 않은 개방적인 탐사란, 금융 도구들을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활용하는 탐사이고, 주류 금융의 전제에 도전하는 대안적 금융 양식을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탐사다. 전복해야 할 표적을 기발한 생각으로 뒤통수를 때리거나, 맞서 싸워서 무찌르거나, 염탐을 하거나, 파괴해 버리는 과정이 전복이라고 이해하는 관점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전복은 이와 아주 다르다. 단순한 호기심이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금융 체제의 입장에서 가장 불안하고 불편한 사람은 누구일까?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말은 유창하지만 별 볼 일 없는 변두리로 내몰린 채 권력의 구조물 밖에서 경제적 불공정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주류 사회의 지적 한계 내에서 변화를 시도하겠다며 사소한 땜질을 하는 개혁파 인사도 아니다. 반대로, 금융 체제 안으로 쉽게 드나들면서 그 체제를 이단적(heretic)인 방식으로 굴절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단(heresy)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해 놓고 기독교의 도그마를 부패시키고 망가뜨리는 불신자의 부류”라고 규정했다. 13세기 기독교 체제의 입장에서는 갖가지 부류의 불량한 기독교 사상들이 매우 심란한 존재였고, 오히려 다른 종교보다도 훨씬 더 불편할 때가 많았다. 우리의 화제에 비추어 볼 때, 이단적 인물은 금융을 처리하는 세세한 내용에 밝으면서도 급진적 이론의 반항 정신에 따라 행동하고 대안을 찾는 창의적 기질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와 가장 근접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해커(hacker)다. 세간에 ‘해킹(hacking)’이란 용어는 컴퓨터와 관련해 악의적인 오작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흔히 소개된다. 나는 해킹이란 말을 그런 뜻으로 쓰지 않는다. 해커 에토스(Hacker Ethos: 해커들의 습성 및 심성을 포괄하는 인식의 태도와 행동의 윤리)는 우리 주변의 일상생활 어디에나 존재하며 컴퓨터 오작동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해킹의 동사 원형 ‘해크(hack)’는 반항하는 행동에다 작동의 연결 고리를 창의적으로 바꾸는 행동을 결합하는 것을 가리킨다. ‘해크’라는 말에서 ‘해카톤(hackathon)’이라는 혼성어가 나왔는데, 이 말은 오래된 것에서 새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람들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즉석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해크’를 이러한 뜻으로 이해하면, 문을 발로 걷어차서 망가뜨리고(반항) 그 망가진 문으로 탁자를 만드는 행위(창조)는 문을 ‘해크’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해커는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 속에서 반항과 창조를 매끄럽게 결합한다. 그의 행위에서 반항은 창조의 힘이 되고, 창조는 반항의 힘이 된다.

보통 해커 에토스는 사물을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방식과 다르게 사용하는 행위를 동반하는데, 그러한 창의성을 통해 사물의 질서나 작동을 교란한다. 도시의 각종 장벽과 경계를 기어오르고 뛰어넘으며 달리는 ‘프리러닝free-running(또는, 파쿠르Parkour)’§ 운동의 밑바탕에는 해커 스타일의 철학이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포장된 도로를 피하고 사람이 지날 수 없는 곳으로 여기던 공간을 가로지름으로써 물리적 공간의 이동 관행을 해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과 시 낭송이 융합된 듯한 ‘슬램 포에트리(slam poetry)’는 관습적인 예술의 규칙을 굴절시킴으로써 전통적 예술 형식을 해킹한다. 사용자가 직접 만들어 쓰는 자가 제작(DIY) 전자 제품 애호가들은 업계 전문가들이 수행한 작업을 재배치함으로써 전자 제품을 해킹한다. 비꼬는 말과 풍자, 다의어나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은 언어를 해킹한다. 유머를 이용해 심각한 화제를 꺼내는 ‘블랙 유머’도 언어를 해킹하는 셈이다. 브라질의 무술 춤인 카포에이라(Capoeira)는 무술과 춤을 섞어서 순수한 무술도 순수한 춤도 아니니 동작을 해킹한 셈이다. 담벼락과 공적 공간을 화폭 삼아 그리는 거리 미술가들은 도시의 길거리를 해킹한다. 자신의 성 정체성과 달리 남자 옷과 여자 옷을 뒤바꿔 입는 사람들은 성역할 규칙을 해킹한다. 해커 에토스는 ‘정상적’인 구분이나 이미 확립되어 있는 구분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규범을 이탈하는 괴상한 느낌의 수많은 관념 속에 자리 잡고 있다.

§. 파쿠르(또는, 파르쿠르)라고도 불리는 프리러닝에 대해 찾아봤다. 기절초풍할 광경들이 많은데, 이건 마치 기계체조, 마루운동, 유도의 각종 낙법 등을 종합한 홍길동식 이동 기술이자 무예 같다. 굉장히 위험하니 따라하시면 안 됩니다.

다양한 해커적 접근을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범주의 행동을 혼합하는 경우가 많다.

1. 탐색(exploring): 대상에 공감하는 자세로 시스템의 뉘앙스를 알기 위해 접근하며, 기어코 접근할 수단을 획득한다.
2. 방해(jamming): 반항적이고 심술궂은 태도로 시스템의 취약점들을 찾아내고 노출시킨다.
3. 건설(building):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시스템 구성 요소들의 창의적 재결합을 추구한다.

보통 많은 개인들이 이 세 가지 행동 중 특히 하나에 집중한다. 얘를 들어 모험가들은 첫 번째 행동에 집중할 것이고, 활동가들은 두 번째 행동에, 기업가들은 세 번째 행동에 집중할 것이다. 가령 탐색하면서 얻는 지식과 건설하면서 얻는 실용적 관점을 결여한 어떤 운동가가 곧바로 방해의 현장에 뛰어든다면, 금융 분야에서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또 흥미롭기는 해도 특별한 방향 없이 연구만 하는 학자들처럼 단지 탐색에만 집중하는 사람들도 방해의 영역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건설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그렇다. 가령 자신의 창의성으로 기존 질서를 교란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것을 자신의 성과라고만 여기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모르는 기업가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해킹의 뚜렷한 특징은 이 세 가지 행위 각각의 충동을 나머지 두 가지 행위의 에너지로 증폭시키려는 의지다. 아름다운 해변을 탐색하는 것은 전혀 전복적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을 거라고만 여기던 버려진 건물을 탐색하는 것은 전복적이다. 버려진 건물을 탐색하는 충동은 통상적인 울타리를 허물려는 욕구와, 그 탐색을 통해 창조적인 무엇을 해 보려는 욕구에서 힘을 얻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