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마지막 화, 한세상 부장판사의 말 중 하나다.
블로그의 글을 Steemit으로 옮기다가 발견 한 글이 있다.
양심의 삼각형과 정의의 정의
어릴 적 도덕시간에 배웠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람의 양심은 삼각형과도 같아서 거짓말을 하거나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할 때마다 삼각형의 모서리가 둥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심이 동그라미가 되어버리면 마음을 찌르던 삼각형이 더이상 마음을 찌를 모서리가 사라져버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요즘들어 등굣길과 하굣길에 경찰들이 많이 보인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는 경찰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처음 경복궁에 가던 날, 길을 몰라서 경찰에게 "여기 어떻게 가요?"라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젠 경찰이 무서워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경찰을 군림하는 그들의 양심이 무섭다. 그들의 양심은 아직 삼각형일까 아니면 동그라미일까?
오늘 수업시간 30분 동안 '정의'에 대한 정의를 같이 이야기했다. 정의를 '올바름'이라고 바꾸어 생각해보자는 교수님의 말씀에도 다들 쉽사리 그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 힘들었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 차원, 역사적인 맥락 그 어떤 것들도 '정의'를 올바르게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의'를 정의할 수 없는 내가 단 한가지 지금 이 사회에서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라는 것이다. 이 사회의 정의와 양심은 확실히 잘못되었다.
동그라미가 되어버린 그 사람의 양심이 다시 삼각형이 되고, 이 땅에 마땅한 '올바름'의 정의가 제대로 잡히기 위해선 이대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오늘도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본다. 비록 지금 내가 하는 이 생각이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을지라도 내가 나아가는 이유는 최소한 나의 삼각형은 깎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한창 국정농단으로 인해 나라가 시끄럽고,
광화문을 통해 등교하던 대학생의 내가 썼던 글이다.
'정의'의 정의에 대해 쉽게 정의 내리지 못했던 그 날을 잊고 살았다가 드라마를 보고선 다시금 떠올려 본다.
눈을 가린채 죄의 무게를 다는 '정의의 여신'과 어느 그 누구도 놓지 않기 위해 팔을 수십개 가진 작은 불상,
이 대립되는 두 존재도 나름의 '정의'의 정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무모하다지만 가끔은 한 번쯤은 그 계란이 바위를 깨기도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다시금 와닿으며 반성하게 된다.
나는 과연 '정의'를 무엇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가.
나는 나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