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여정은 아니다. 각종 서약서 작성과 본인 확인 절차, 어쩔 수 없이 긴장하게 되는 검문도 수시로 이어진다. 신기한 건 이 과정이 그다지 수고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단 점이다. 여기서만 가능하니 차라리 기껍달까. 양쪽으로 ‘지뢰’ 표지판을 두고 걸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운동화 끈을 바짝 조이는 일뿐이라도 어쩌겠나.
늑골 아래 고이는 슬픔이 그래도 퍽 다정한 것, 그걸로 충분하다.
두타연에서는 별다른 BGM이 필요 없다. 물소리와 새소리, 나뭇잎과 바람이 서로 몸을 부딪는 소리만으로도 멋진 음악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계절마다 달라지는 풀이며 꽃, 흙냄새는 덤이다. ⓒ오승현
한국전쟁 당시 고지 점령을 위해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양구의 전투들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고지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하늘과 살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고요하기만 하다. ⓒ오승현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두타연
춘천 IC를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양구다. 한 계절이 다른 계절로 달음박질치는 즈음, 말간 연두가 앞다투어 솟고 싱그럽다 못해 비릿하기 까지 한 풀냄새가 코끝에 걸린다. 여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니 훨씬 울울창창해서 갈증 따위 눈으로 먼저 풀 수 있겠다 싶다. 푸른 능선을 좇는 사이, 내비게이터는 목적지 ‘두타연’까지 남은 길을 부지런히 안내했다. 너른 주차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간단한 안내를 받고 서약서를 적는 일. 신분증을 제시하면 목걸이용 태그가 제공된다.
“태그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즉 위치추적용이에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는 있지만 이곳이 여전히 지뢰 미확인 지역이라 안내에 잘 따라주셔야 합니다. 종종 산나물을 채취할 목적으로 동선을 벗어나는 분이 계신데, 그럼 귀신처럼 알고 연락이 와요(웃음).”
신현숙 문화관광해설사의 당부다. 그도 그럴 것이 두타연은 민통선 안에 위치해, 50여 년간 출입이 통제되어 오다 2004년 개방된 곳이다. 사전등록 없이 신분증 확인만으로 즉시 출입이 가능해진 것도 지난해 11월부터. 잘 보존된 청정자연을 둘러볼 수 있다는 게 포인트지만 같은 이유로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도로를 달리자, 마치 오래 전부터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왔던 책처럼 갈피마다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고백하자면 그물처럼 엉켜있는 나무의 생김에 눈길이 머물렀는데, 마치 먹으로 친 난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숲을 이룬 모양새다. 원시림 한복판에서 3D 영화의 정수라는 <아바타>를 떠올린 건 아이러니하지만 푸른 정맥처럼 얽히고설킨 가지들은, 겹쳐진 그림자들은 영화의 그것을 연 상케 한다.
“1951년 약 6개월에 걸쳐 양구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죠.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등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격전이 이어졌어요. 결국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폐허가 됐고요.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 위안을 얻는 건 저만이 아닐 거예요.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이 어떻게 스스로를 치유했는지 헤아리다보면 깊은 울림 같은 게 있죠.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서 제멋대로 자라거나 엉켜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각자의 질서가 다 있고요. 밑동에서부터 여러 줄기가 올라오는 저 나무가 바로 신나무예요.”
두타연을 중심으로 12km에 이르는 트레킹 코스를 걸으며 그녀는 각시붓꽃과 금낭화, 조팝나무와 말발도리를 짚어주었다. 한참 숲길을 걷다보면 물소리와 새소리로 몸 안이 꽉 차,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때가 온다. 흐드러지게 핀 배꽃향이 달큰해서 기분 좋은 현기증도 일었다. 기적처럼 어린 노루와 눈이 마주친 순간도 찾아왔다. 털갈이를 하는지 목화솜처럼 하얀 털을 엉덩이에 달고 깡충깡충 달아난 녀석은 꽤 자주 출몰하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뷰파인더에 채 담지 못한 포토그래퍼는 아쉬운 탄식을 했지만, 그러한 우연이야 말로 이곳에서만 가능한 경험이다. 갈대 뿌리를 캐먹은 멧돼지의 흔적을, 흡사 콩자반 같은 노루와 고라니의 배설물을 직접 밟을 수 있는 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두타연은 1,000년 전 지어졌다는 두타사에서 비롯된 이름이에요. 해탈을 의미하는 두타(頭陀)에 연못 연(淵)자를 붙인 거죠. 깊이가 10m에 이르는데, 오랜 세월에 패이고 깎인 기암괴석과의 어울림이 절묘해요. 열목어 서식지로도 유명하고요.”
그녀는 말했다. 두타연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담아가는’ 거라고. 물이 맑다고 물장구를 칠 수 없고 초목이 우거지다고 뛰놀 수 없는 곳이니 당연하다. 다만 계절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풍경을 마음에 담아가면 족할 일이다. 가을에는 붉은 융단을, 겨울에는 시린 눈을 밟으면서 (도보가 아닌 자전거로 즐길 때는 이목정 안내소가 아닌 반대편 비득 안내소에서 길을 잡아야 내리막길의 호쾌함을 즐길 수 있다는 귀띔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바로 여기가 그곳이다. 오랜 세월 스스로를 지키고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온 자연, 그 속살이 매일매일 상처를 꿰매 새살을 돋우고 있으니까.
두타연 관찰데크에서 내려와 징검다리를 건너다보면 물소리를 더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맑은 물속에 그간 부산했던 마음을 헹구고 나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오승현
두타연
출입시간 하절기(3~10월) 09:00~17:00
동절기(11월~2월) 09:00~16:00
휴무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익일), 설날과 추석 오전
입장료 대인(13~64세) 2,000원 소인(7~12세) 1,000원
주소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
전화번호 033-480-2251(양구군청 경제관광과), 033-482-8449(이목정안내소)
총총, 별이 박히는 동네
박수근 미술관, 국토 정중앙 천문대
박수근 선생의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 다양한 시청각 자료와 개인 소장품이 마련되어 있다. ⓒ오승현
양구에서는 그 흔한 ‘좌 도토리묵, 우 백숙’과 같은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 여느 관광지에서 흔히 볼법한 식당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군데군데 크게 자리한 표지판은 군부대 안내가 대부분이고, 인위적으로 기획된 특산물 직판장도 드물다. 지역 특성상 외부인의 출입이 많지 않았던 탓일 테지만, 호젓하게 길을 더듬거리다 보면 이 불편이 외려 반갑다. 그렇다고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말장난을 좀 하자면, 시내로 접어들면 한국화단의 별 ‘박수근 미술관’을, 좀 더 내려가면 산꼭대기가 아닌 평지에서 별을 볼 수 있는 ‘국토 정중앙 천문대’를 만날수 있어서다.
박수근 선생의 작품에는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묵묵히 일상을 꾸려간 우리의 모습이 다감하게 담겨 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 싶다던 그의 붓 끝에서 평범한 우리 이웃의 모습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화폭에 남았다. ⓒ오승현
우리에게 ‘빨래터’나 ‘노상’ 시리즈로 유명한 박수근은 1914년 양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 터에 자리를 잡은 게 지금의 미술관이다. 돌로 둘러진 외관은 물감을 한 층씩 쌓아올려 마침내 화강암같이 거친 질감을 만들어내는 그의 작품을 쏙 빼닮았다. 햇살에 따듯하게 데워진 돌담을 쓰다듬을라치면 어쩐지 눈, 코, 입이 없이도 표정이 있고, 금세 가슴이 훈훈해지는 그림 속 주인공을 만나는 기분이다. 전시관을 산책하듯 돌며 작품을 응시한다. 한때 유행하던 매직아이처럼 가까이에서 보면 질감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열 발자국쯤 떨어지면 실루엣이 만들어지고 급기야 인물의 감정이 스며나온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을 계획 중이에요. 그때 다시 한 번 놀러오세요.”
관계자를 뒤로 한 채 돌아 나오는 길, 그의 질박한 터치가 마치 밤하늘의 별들처럼 캔버스 위에서 총총히 빛났다.
박수근 미술관
주소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전화번호 033-480-2655
국토 정중앙 천문대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밤하늘. 별자리의 위치를 짚어준 덕이었을까,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빛이 점점 도드라졌다. ⓒ오승현
박수근로에서 다시 국토 정중앙로로 방향을 잡는다. 어둑해질 무렵, 천문대 프로그램을 신청해둔 터다. 밤이 내린 양구는 말 그대로 ‘칠흑’같다. 옻칠처럼 은은한 광택이 서린 어둠. 밤 8시를 넘기자 밤하늘에 하나, 둘, 별이 걸리기 시작했다. 양구는 우리 국토의 정중앙 즉 배꼽이란 수식을 갖고 있는데 4극 지점 -유포면 북단에서 마라도 남단, 마안도 서단에서 독도 동단- 을 기준으로 한 교차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천문대의 이름도 여기서 기인했다.
“자, 그럼 어둠에 익숙해질 시간을 갖겠습니다.”
무턱대고 별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날이 좋으면 육안으로도 많은 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선 먼저 눈의 조리개부터 손봐야 한다. 그렇게 끔벅이며 얼마가 지났을까. 지붕 없는 하늘 위로 푸른 빔이 꽂혔다. 거기 북두칠성이, 북극성이, 화성과 목성이, 엎드려있는 사자가 나타났다. 마치 지도를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암호를 풀어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별들이 우리들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와~’하는 탄성이 입김과 함께 쏟아졌다. 상황이 이쯤 되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게 아니라, 국토의 중심에서 별을 외치는 셈이 되려나. 주관측실에서 망원경을 통해 몇 개의 별을 더 관측한 후, 포토그래퍼와 나는 넓은 들에 오도카니 앉았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개구리는 울어댔고, 별의 움직임을 포착하며 카메라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 우리의 첫 일주(一周) 사진은 그렇게 완성됐다.
국토 정중앙 천문대
관람시간 하절기(3~8월) 15:00~23:00, 동절기(9월~2월) 14:00~22:00
휴무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익일)
입장료 성인 2,000원, 청소년/군인/어린이 1,000원
주소 강원도 양구군 남면 국토정중앙로 127(도촌리 96-5)
전화번호 033-480-2586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펀치볼
양구읍에서 돌산령 터널을 넘어가면 안으로 움푹 파인 형상의 분지가 나타난다. 가칠봉과 대우산, 도솔산과 대암산 등 해발 1,100m 이상의 산에 둘러싸인 일명 ‘펀치볼(Punch Bowl)’ 마을이다. 정확하게는 해안분지라는 표현이 맞지만, 한국 전쟁 당시 외국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마치 화채 그릇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 단어만 따지고 보면 레저관광도시라 해도 손색없건만, DMZ와 맞닿은 최북단 마을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출입통제는 물론이거니와 개발억제도 심해 한 때 안보유적지라 불렸지만 이제는 주변으로 둘레길도 조성해 찾는 발걸음이 많다.
“1956년 4월 25일, 이틀에 걸쳐 160세대가 입주했지. 해방 이후에 1,000여 세대가 살았다고 하는데 휴전 후에는 흔적도 안 남은 황무지였어, 황무지. 현리마을 앞에 천막을 세우고 10~12집이 기거했는데, 다 똑같이 생겼으니 남의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다구. 6사단에서 난민들이 불쌍해 80채에 가까운 집을 지어주면서 그나마 살림살이를 갖추게 됐는데 후에 두 번째, 세 번째 입주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마을이 만들어진 거야.”
전기수(81), 장익진(76) 할아버지는 민통선 1세대다. 당시 파르란 수염자리를 갖고 있던 스물 셋 청년은 이제 어엿한 일가를 꾸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다. 그렇대도 삶이란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어서, 당시의 기억만은 또렷하게 남았다. 등화관제(燈火管制: 전시에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조명 사용을 통제하는 것)가 심해 모포나 옷가지로 문을 가린 채 쪼그려 공부하던 아이들이며, 반공분자를 색출한답시고 검문에 검문을 반복하던 일은 바로 엊그제 같다. 군과의 마찰이 이어지던 어느 날, 전기수 할아버지의 강력한 항의로 등화관제와 순찰이 완화된 건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찬 일화다.
“살기는 엄청 좋아졌지. 문제는 땅이야. 여기서 씨 뿌리고 반세기 가까이 살아온 건 우리인데, 여전히 소유권이 애매하거든.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그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지.”
해방 후, 북한 치하였던 마을을 남한이 탈환하고 이주정책으로 주민이 거주하게 되면서 생긴 문제였다. 더러는 땅의 주인이 없거나 북에 살거나, 없는 줄 알았던 원주민이 돌아오는 경우 권리 찾기는 더 애매해졌다. 정부와 계약을 맺고 문제 해결을 위해 분투 중이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속 시원한 해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을 전경을 보려면 을지전망대가 최고야. 거기서는 한 눈에 다 내려다뵈거든. 겨울에 눈이 쌓인 모습이 얼마나 멋있다구.”
손으로 전망대의 위치를 가리키며 할아버지는 밥은 먹었냐고, 한 그릇 하고 가라고 덧붙인다. 지대가 높은 고랭지라, 어린 상태 그대로 서리를 맞은 시래기는 더 없이 연하고 고소하다면서. 빠듯한 일정에 비타민 음료 한 박스만 안겨드린 채 돌아섰지만, 눈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웃어주신 덕분에 이미 밥 한 그릇을 해치운 것처럼 포만감이 밀려왔다.
과연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여린 운무가 깔린 마을은 절경이다. 부드럽게 경사를 이루며 조성된 계단식 밭은 군데군데 블록처럼 생긴 농가와 어울려 다감한 정취를 빚어낸다. 그러다 문득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무언가를 위로하듯, 코앞에 내려다뵈는 북녘 땅 쪽으로 사라졌다. 바람에는 국경도 휴전선도 없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아챈 순간, 다시금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등 뒤에 양구라는 표지판이 멀어질수록, 백미러에 비친 글자가 선명해진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옷소매로 쓱쓱 얼룩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래, 생각보다 DMZ는, 그 속의 삶은 가까이에 있다. 매일 같이 을지전망대로 출근하는 해설사처럼,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가 생의 ‘최전선’에 당도해 있는지도. 더 이상 불리지 않는 철 지난 노래가 아니라 계속해 넘기며 밑줄 긋고 귀퉁이를 접어야 할 오래 묵은 책과 같은, 시간의 풍화에 순응하며 조금쯤 덜 편리해도 좋을, 거기 비무장지대 말이다.
을지전망대
주소 강원 양구군 해안면 이현리
전화번호 033-480-2674
글 홍지은|사진 오승현
Posted from my blog with SteemPress : http://231.jeju.kr/2586/
GPS도 들어 있었군요..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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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면서도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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