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일기] 떠나는 성직자가 한마디 할게. 니들이나 성직자 놀이 계속 해라

in drug •  5 years ago  (edited)

2018051059435934.jpg 마약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지 않았다. 한겨레의 퇴로를 열어줘야겠다고 생각해, 내가 마약을 하지 않았다며 회사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한 것이었다.

#2018년 6월1일 (수)

나에 대한 2차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이제 정말 끝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 될까.

징계위원회가 열릴 8층 회의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가는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다른 사람이 타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도저히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내 기도를 들어주었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나와 같이 일한 적 있는 박기용 선배와 후배 이경미가 징계위원으로 참석해 있었다. 노조 쪽 대표로 참석한 모양이다. 노조위원장은 여전히 잠적중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나도 좀 준비해온 자료를 차분하게 읽어내기로 했다. 지난번 징계위원회에서는 고개를 푹숙이고 제대로 말도 못했다. 오늘은 고개를 들고 내 할 이야기를 하고 그만둘 것이다. 나는 징계를 받으러 온 사람인가. 아니면 회사를 설득하러 온 사람인가. 아니다. 어제 결심한 대로 그냥 죽을 때 죽더라도 ‘아악’하고 소리지르러 온 것뿐이다. 징계위원들 앞에서 준비한 원고를 꺼냈다.

“직원도 회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회사도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한달간 과연 한겨레는 저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까. 한겨레는 사태를 수습하려는 걸 넘어서서 직원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마약 범죄자라고 지탄하는 대중의 마녀사냥에 동참했습니다. 저와 협의도 없이 제 입건 사실을 한겨레신문의 기사로 내버렸고, 저와 제 가족은 아직도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형사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징계해고한다는 사실을 확정해서 기사로 내버렸습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정중한 발악, 예의바른 항의를 하려고 애썼다. 내 목소리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저는 한겨레신문사마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마약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죄가 없다는 게 아니라, 제가 이렇게 한 개인의 인격을 말살당할 정도로 죄를 지었다는 겁니까. 그걸 묻고 싶은 겁니다. 저는 해고를 결정하는 한겨레신문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해고 결정 과정에서 한겨레가 우리 사회 일반 대중에 퍼져있는 과도한 마약 중독자에 대한 혐오와 편견이 개입되어 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한겨레가 왜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 미웠을까. 아니면 정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걸까. 저들은 내 얘기를 듣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다. 내가 우울증에 왜 걸렸는가. 이게 순전히 개인의 문제인가. 나를 해고할 때 하더라도 당신들도 내가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는 알아야 한다.

“제가 마약을 하게 된 것은 절대 잘했다는 것도 아니고 저역시도 스스로 참담함을 느끼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갖게 된 이 우울증이라는 병이 결국 무엇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조직 내에서의 고독과 외로움 이런 것들은 결국 회사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 아닙니까.

미국의 보건당국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이제 마약에 대해서 그들은 ‘Drug Abuse’가 아니라 ‘Drug Disorder’ 라는 좀더 중립적인 단어로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마약 사용자들의 도덕적 책임이 담겨 있는 ‘남용’이란 단어를 버리고 ‘실수’라는 단어로 그들은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한국 사회는 마약문제를 온전히 개인의 도덕성 탓으로만 책임을 돌립니까.
제가 잘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제가 사람을 때리거나 사기를 치거나 뇌물을 받아 부당이익을 챙기거나 이런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는 제가 한 커다란 실수에 책임을 지겠지만 저를 우리 사회 흉악범처럼 비난하고 해고를 결정한 해고결정문에 동의가 안됩니다.”

그래. 솔직히 난 내가 중범죄자라고 적혀 있는 이 해고 결정문의 문구만이라도 바꾸고 싶다. 내가 이러면 앞으로 어디에 취직할 수 있겠나. 중범죄자가 어디에 취직할 수 있겠냐고. 한겨레 당신들은 날 버리고 살 수 있겠지만 난 그냥 숨만 겨우 쉬며 꿈틀거리다 나머지 인생 그렇게 죽으라는거냐. 난 중범죄자가 아니야! 난 범죄를 자백한 사람이라고. 내 스스로 검사에 응해서 죄를 밝혀내는 걸 거부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이게 왜 중범죄야? 당신들은 살면서 실수 안해? 실수한 거보다 그 실수를 감추고 거짓말하는 게 나쁜 거잖아.

“다시 한번 강조하면 저는 마약을 하다가 적발된 사람이 아닙니다. 경찰이 마약을 하자고 계속 꾀어 냈고 저는 그 자리에 나가 경찰을 맞닥뜨린 것 뿐입니다. 최대한 회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굳이 자백하지 않아도 될 제 과거의 마약 투약 경험을 털어놓은 것뿐입니다. 응하지 않아도 되는 모발 검사에도 자발적으로 응하고 법적 책임을 지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국가의 도움을 받아 마약 중독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경찰이 과도하게 함정 수사를 편 것에 대해서는 법적 다툼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법적 판단이 끝나기도 전에 이런 처분을 받아야 합니까. 최소한 재판이 끝난 이후에 저의 징계 여부를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떤 징계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금의 형식과 내용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말이 길어지는 듯 하자 징계위원들이 내 말을 잘랐다. 이어서 징계위원들이 내게 물었다.

“허재현씨. 다른 기자들에게 마약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왜 그런 거죠?”
“그건 엄연히 회사 팀장하고 상의해서 회사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라고 지난번에 설명을 드렸잖습니까.”
“저희도 그래서 한번 OO 팀장에게 물어봤더니 그런 지시를 한 적은 없다는데요.”
“말도 안됩니다. 제가 제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된 이유가 뭐겠습니까. 팀장이 하지 말라는데 제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OO 팀장과 대질신문을 하게 해주세요.”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잠시 팀장과의 기억을 복원해보았다. 생각해보니, 팀장은 내게 언론에 ‘마약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 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 그 말이 맞다. 그걸 제안한 건 나였다. 내가 회사까지 속이고 있는 것처럼 해야만 한겨레가 허재현을 보호하려 했다는 추가 비난을 면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제안했고 팀장은 그걸 승인한 거였다. 그게 결국 내게 이렇게 부메랑처럼 돌아오는구나. 회사를 떠나더라도,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내 성의가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잔인한 인간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날 비난해도, 팀장은 나한테 이러면 안되는거잖아! 적어도 내가 회사의 퇴로를 열어주려고 자처한 거짓말이란 것은 징계위원회에 설명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징계위원들은 팀장과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팀장은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그 어떤 증언도 회사에 해주지 않았구나. 안팎의 비난이 커지니까 자기만 살겠다고 나를 이렇게 버리는구나.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내가 이딴 인간들을 믿고 회사에 충성을 바쳐 일해왔다는 건가. 그래. 떠나자. 미련없이 떠나자. 역겹다.

이날 징계위원회에는 POP 나영정씨가 동석해주었다. 세계 인권선진 국가들이 마약 정책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전문가로서 징계위원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과연 한겨레는 이러한 이야기에 귀기울일까. 살짝 기대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한겨레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 고민이란 것을 하는 회사일테니까.

집으로 돌아왔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더욱 회사의 입장이 간결하게 전해졌다.

‘1차 징계위원회의 즉시해고 결정을 바꿀만한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음.’

1차 징계위원회의 해고 결정 때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몇시간을 멍하니 숨만 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곧장 운동을 하러 나갔다. 대신 카카오톡 메신저의 내 프로필 문구를 바꿨다.

“떠나는 성직자가 한 마디 할게. 니들이나 성직자 놀이 계속 해라.”

※당부의 글.
안녕하세요. 허재현 기자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간 마약 문제에서만큼은 단 한번도 마약 사용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연재글은 마약 사용자들이 어떤 일상을 살며, 어떤 고민들에 부닥치는지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자 시작한 것입니다. 마약 사용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닌,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마약 정책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마약 사용자들과 우리 사회가 함께 건강한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이점 널리 혜량해주시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련글 / 허재현 기자의 마약일기를 시작하며
https://steemit.com/drug/@repoactivist/4vbeg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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