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약쟁이를 도무지 싫어할 수가 없다

in e-sens •  6 years ago  (edited)

아무리 안에 있는 것들을 털어내도 개운하지 않을 때가 있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남에게 하소연하고 징징거려도 도무지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나만 느끼는 고통 같을 때, 세상 아무도 날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삶에 아무런 위로가 없다고 생각할 때. 어느 하루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밤새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붙잡고, 술을 마시고, 공원을 미친 듯이 걸어보고, 게임을 하며 그 상황을 회피해도 기분이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나에게 꿈이 있는데 이 꿈을 이루기 너무 힘들다고.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인류애는 고사하고, 당장 내 앞에 놓인 인생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금 내 생활을 꾸리는 것도 버겁다고.

남들은 내가 돼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내가 겪는 고통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다.

"힘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래 나도 힘내고 싶어. 그런데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아. 힘내라는 말 뒤에 내게 위로가 될만한 말을 덧붙여줬으면 좋겠는데 단순한 2글자가 전부였다. 그 사람은 내 상황에 대해 이해도 못 하고 해줄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해결책도 전혀 새롭지 않았다. '열심히 해.', '좀 더 노력해봐.' 같은, 누구나 알만한 해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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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우리가 바라는 우리' 중에서


매일 술을 마셨다. 술은 내 예민한 감각을 잠시나마 둔하게 만들었다. 감각이 둔해지면 고통도 조금은 덜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 짧게나마 기분이 좋았다. 습관처럼 매일 술을 입에 댔다. 그렇지만 술기운도 잠깐뿐, 술이 깰 때면 감각과 함께 고통은 다시 살아났다. 인생의 불확실성. 알 수 없는 미래와 나아지지 않는 현실과 싸우는 고통의 과정이었다. 월급에 의지할 수도 없고, 매일 정해진 일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불안감이 피부에 와닿았다. 언젠가 어머니께 넌지시 인생이 버겁다는 얘길 꺼냈다. 그러자 어머니는 혼비백산으로 잠도 주무시지 못했다. 그 후로 부모님께 내 얘길 꺼낸 적이 없다. 그저 혼자 속앓이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마약을 찾아냈다. 진짜 마약은 아니고 마약 같은 노래를 발견했다. 프라이머리-독(Feat. 이센스). 이센스의 곡이었다. 이센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내 상황과 비슷했다. 진정제 같았다. 노래를 듣고 나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글이 조금 더 잘 써졌고, 잠을 조금 더 잘 잤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누군가가 이해해줄 때, 내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이 곡을 처음 만난 날, 울면서 수없이 반복 재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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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머리-독(Feat. E SENS)


그렇다고 기적처럼 세상이 행복해지거나 삶이 나아지진 않았다. 하지만 위로는 얻었다. 노래는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넌 혼자가 아니야.', '나도 그 일을 겪었어.', '힘들겠구나.'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혼자가 아니란 사실이 위로가 됐다. 그리고 그 후에도 힘들 때마다 미친놈처럼 이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사람들이 가볍게 전하는 '힘들겠다.', '힘내'라는 말보다 일면식도 모르는 사람의 노래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이 마약 같은 곡을 쓴 이센스는 실제로 약쟁이다.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서 감옥도 갔다 온 래퍼. 그래서 이 곡에도 약을 탄 것 같다. 분명 불법으로 약을 사용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난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내 인생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게 도와줬기 때문에.

이센스가 노래에 마약을 실어 남들을 위로하듯,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나도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힘든 사람들의 마음과 함께하는 글을 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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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센스


가사

시간 지나 먼지 덮인 많은 기억

시간 지나면서 내 몸에 쌓인 독

자유롭고 싶은 게 전보다 훨씬 더 심해진

요즘 난 정확히 반쯤 죽어있어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난 믿은 것

그게 날 이끌던 걸 느낀 적 있지 분명

그 시작을 기억해

나를 썩히던 모든 걸 비워내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지금까지의 긴 여행

꽉 쥔 주먹에 신념이

가진 것의 전부라 말한 시절엔

겁먹고 낡아 버린 모두를 비웃었지

반대로 그들은 날 겁 줬지

나 역시 나중엔 그들같이 변할 거라고

어쩔 수 없이

그러니 똑바로 쳐다보라던 현실

그는 뛰고 싶어도 앉은 자리가 더 편하대

매번 그렇게 나와 너한테 거짓말을 해

그 담배 같은 위안 땜에 좀먹은 정신

어른이 돼야 된다는 말 뒤에 숨겨진 건

최면일 뿐 절대 현명해 지고 있는 게 아냐

안주하는 것뿐 줄에 묶여있는 개마냥

배워가던 게 그런 것들뿐이라서

용기 내는 것만큼 두려운 게 남들 눈이라서

그 꼴들이 지겨워서 그냥 꺼지라 했지

내 믿음이 이끄는 곳

그 곳이 바로 내 집이며 내가 완성되는 곳

기회란 것도 온다면

옆으로 치워놓은 꿈 때문에

텅 빈 껍데기뿐인 너 보단 나에게

마음껏 비웃어도 돼

날 걱정하는 듯 말하며

니 실패를 숨겨도 돼

다치기 싫은 마음뿐인 넌 가만히만 있어

그리고 그걸 상식이라 말하지

비겁함이 약이 되는 세상이지만

난 너 대신 흉터를 가진 모두에게

존경을 이겨낸 이에게 축복을

깊은 구멍에 빠진 적 있지

가족과 친구에겐 문제없이 사는 척

뒤섞이던 자기 혐오와 오만

거울에서 조차 날 쳐다보는 눈이 싫었어

열정의 고갈

어떤 누구보다 내가 싫어하던 그 짓들

그게 내 일이 된 후엔 죽어가는 느낌뿐

다른 건 제대로 느끼지 못해

뒤틀려버린 내 모습 봤지만

난 나를 죽이지 못해

그저 어딘가 먼 데로

가진 걸 다 갖다 버린대도

아깝지 않을 것 같던 그 때는

위로가 될만한 일들을

미친놈같이 뒤지고 지치며

평화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었고

불안함 감추기 위해 목소리 높이며

자존심에 대한 얘기를 화내며

지껄이고 헤매었네 어지럽게

누가 내 옆에 있는지도 모르던 때

그 때도 난 신을 믿지 않았지만

망가진 날 믿을 수도 없어

한참을 갈피 못 잡았지

내 의식에 스며든 질기고 지독한 감기

몇 시간을 자던지 개운치 못한 아침

조바심과 압박감이 찌그러트려놓은 젊음

거품, 덫들, 기회 대신 오는 유혹들

그 모든 것의 정면에서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야지 잃어가던 것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 점점

멈춰야겠으면 지금 멈춰

우린 중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놓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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