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kr-fiction_쉘터_12화 터널

in fiction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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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가운데 777은 슬그머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842에게 얻어맞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오랜 시간 정신을 잃은 상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누군가가 치료를 해주었거나......

아무튼 777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개운한 기분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막 자다 깬 것 같은 나른한 느낌이었다.

777이 있는 곳은 주변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어두운 곳이었다. 더하여 어디선가 규칙적으로 웅웅- 낮게 울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777은 여전히 벌거벗은 채였다. 그야 이곳에 오기 전 방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으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자신을 둘러싼 공기, 육체, 나아가 내면의 느낌과는 뭔가 다르다는 커다란 이질감. 뭔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이 느낌은.

777은 이내 자신이 느끼는 이질감의 원인 중 하나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777은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어쩐지 눈을 떴을 때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777은 자신이 떠 있는 곳이 아주 거대한 터널과 비슷한 구조의 장소라는 것도 알아냈다. 처음엔 쉘터처럼 그저 넓은 창고와 같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멀리 보이는 희미한 점과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 자신과 가까운 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곡면인 벽의 구조로 미루어보아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터널인 것 같았다.

777은 더 이상 아프거나 한 곳은 없었지만, 아주 나른하고 피곤한 기분이었다. 막 정신이 들어서 그런 줄 알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도 이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구 졸음이 몰려오거나 자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일이 귀찮기만 한 그런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무기력한 그런 상태였다. 777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래도 모르겠다.

777은 팔,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나중엔 팔을 크게 휘휘 돌리고 발을 굴러보았다. 그리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순 있었지만 금방 힘이 빠져 그것도 그만두었다.

과거 지구를 떠나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우주인들이 나오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며 천천히 공중을 떠다니던 우주인들. 777은 자신의 모습이 그들과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777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호해졌을 무렵, 777은 침침한 어둠에 더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잠에 들었다 깨도 여전히 그런 상태였다.

전처럼 '그들'의 목소리가 곧 들려오리라 기대했지만 웅웅-거리는 알 수 없는 울림만이 어김없이 귀를 파고들었다. 소리라도 크게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건 777의 내면에서만 발버둥치는 욕구였을 뿐이었다.

777의 육체는 몸살에라도 걸린 듯 무겁고 무기력했다. 아무래도 이런 상태로 있다가는 얼마 못가 발광해버릴 것 같았다. 777을 공중에 띄우고 붙들고 있는 힘은 물리적 실체가 없었다. 실체가 없으니 저항을 할 수도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777의 입에서 끙-하는 쥐어짜는 깊은 신음소리만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777은 마침내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거대한 터널 안에 자신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한 번 그런 사실을 알고 나자 대체 이걸 왜 몰랐지? 할 정도로 터널 안 구석구석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 둥둥 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터널 안은 매우 어두웠지만, 그렇다고 아예 보이지 않는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777은 어쩌면 '그들'이 무언가 인지능력이나 감각이 떨어지는 약물 같은 것을 주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약물의 약효가 조금씩 떨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새삼 이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777은 다른 인간이 자신과 비슷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큰 위안을 줄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렇게 조금 여유가 생기자 777은 자신이 터널의 끝 지점, 희미한 하얀 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그렇다. 분명 777이 선 쪽 그러니까 777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아주 조금씩이지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힘, 저항할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의해 이끌려 어디론가 아주 천천히 이 거대한 터널 안을 둥둥 뜬 채로 지나고 있었다.

더하여 777은 쉘터에 들어올 때부터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것도 알았다. 마지막 관문이 있다는 방에서도 벌거벗겨진 채였지만 목걸이만은 채워져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 목걸이마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선택받은 것인가? 아니면 추방당한 것인가? 이 또한 모를 일이었다.

777은 그렇게 점차 많은 사실에 눈을 떠갔다. 거대한 터널 안에 들어온 지 분명 아주 긴 시간이 지났지만 배도 고프지 않고 배설의 욕구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인지했다.

온 몸에 털이 한 올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오른 손을 들어 만진 머리 역시 민둥산이었다. 순간 대머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 상황에서도 피식 실소가 머금어졌다.

물론 그렇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채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777은 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776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무도 고통스런 기억이라 떠올리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여기 어딘가 떠 있을까 싶어 주변에 둥둥 떠 있는 다른 이들을 관찰해보았지만 적어도 777의 주위에 776은 없는 것 같았다.

776의 마지막 모습, 방에서 777은 아래로 776은 반대방향인 위쪽으로 사라져갔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842도 함께 말이다. 842를 떠올리자 화가 났지만 방에서처럼 격렬한 분노에 휩싸이거나 하진 않았다.

이것도 무언가 약물이 주입된 탓인가? 아니 약물이 주입된 게 확실한 것도 아닌데?

아무튼 777은 그렇게 또 한참을 둥둥 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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