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 아침

in fika •  11 months ago  (edited)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실상이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실상'과 '증거'를 한참 되뇌던 한아는 성경을 꺼내들었다.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substance라...본질.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의 본질...드러나지 않은 것들의 증거.

증거는 그야말로 드러나지 않았고, 지금까지 찾은 실마리라고 해봐야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효는 마음 속에 나름의 줄거리를 그리고 있고, 그것이 사실이기를 사뭇 바라는 것 같기도 한데...그렇다면 하효의 가정이 믿음인가.
내가 바라는 게 뭐지? 사건의 실체를 그래 본질을 밝힌다고 해도 내가 얻는게 무엇일까.
조사팀과의 두 번째 FIKA를 앞두고 한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2009년 5월 23일 8시 30분.

그날 하효는 자고 있었다.
토요일은 유일하게 늦잠을 자도 되는 요일이다. 주중에는 낮에 학교에 갔다가 오후부터는 일을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간다. 의무로 무언가 해야 하는 일정 없이 온전히 쉬는 날은 토요일밖에 없다. 진정 안식일이다.

하효는 평소에 6시 반이면 일어난다. 씼고 대강 옷을 차려입고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는다. 나이 서른이 넘어 무슨 민폐냐 싶겠지만 독립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출근 아니 이제는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지난 달부터 휴직을 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아침 10시까지 잔다. 맘 같아서는 12시까지 자고 싶지만 눈치없는 생체 시계가 어김없이 6시 반이면 몸을 깨운다. 애써 도로 눈을 감는다. 늦잠은 토요일에만 누릴 수 있는 사치기 때문이다. 하효에게 토요일 아침 잠은 캐비어나 다름 없다. 누군가 캐비어를 사준다고 했다 치자. 대부분은 맛이 없어도 억지로 먹는다. 이게 얼마짜린데, 언제 또 먹겠어 하면서. 토요일 밖에 없는데, 언제 또 늦잠을 자겠어.

5월22일. 하효는 밤 늦도록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평소에는 아침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도 자정이 되면 잠을 청한다. 하지만 오늘은 금요일. 내일은 안식일. 일주일 중 유일하게 허락된 밤이다. 마침 부모님이 친척들과 모임이 있어 지방에 가셨다. 오랜만에 집에 혼자 남게 된 하효는 무언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영화를 볼까, 한아를 부를까? 한아는 다음날 아침일찍 자전거를 타야한다며 거절했다. 결국은 추리소설을 쌓아놓고 밤새도록 책을 읽기로 했다. 오늘은 늦게 잘꺼니까 카페인을 좀 섭취해도 되지 않을까? 편의점에 가서 녹차아이스크림을 한통 집어왔다.

아이스크림, 감자칩, 추리소설.
모든 것이 갖춰졌으니 이제 본격적인 불금의 시작이다. 스웨덴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 1권을 집어 들었다. 졸린데도 책을 놓기가 싫을 만큼 몰입도가 엄청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쓰는 거지? 어디까지가 작가의 경험일까? 정말 완벽한 금요일 밤이군. 하효는 그렇게 자기만이 불금을 즐기다 새벽 네 시가 다돼 잠이 들었다.

멀리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동공이 빠르게 움직이는 걸 느끼고 있다. 몇시지. 내가 알람을 켜놓고 잤던가. 오늘 토요일인데. 전화벨은 인내심을 갖고 울린다. 램수면을 방해하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꿈에서 들리는 소린가. 무시하고 계속 잠을 청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집요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뒤집어썼다. 근성 있는 전화벨 소리는 잠잠해질 줄을 모른다. 강력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 같은 눈을 힘겹게 떼보려한다. 이마에 힘을 실어 한쪽 눈을 억지로 뜨고 벽시계를 슬쩍 보았다. 9시가 좀 안됐다. 전화기에 찍힌 이름을 보니 아빠였다. 어, 무슨일이 생겼나? 아침부터 왠일이시지? 눈은 감은채 전화를 받았다.

“으…어…” 힘겹게 소리를 내본다.
“하효야?”
“…왜…무슨 일 있어? 시고올…갔잖아.”
“하효야. 예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다. 예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이건 또 무슨소리야. 하효는 머릿속으로 아빠가 한 말을 한 음절 한 음절 분석해보았다. 예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다. 잘못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꿈일 가능성도 별로 없다.
“응…뭐…아빠, 무슨 소리야.“
“오늘 아침에 자살했다카더라. 뉴스 틀어봐라.”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말이 꿈인지 현실인지 여전히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효도 아빠도 잠시 말이 없다. 전화기 넘어 한숨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참 안됐다. 거 농사 짓고 살게 좀 내비두지.”
끌끌. 아빠의 혀차는 소리. 하효는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 이게 꿈이 아니란 말인가. 짧은 순간 멍했다가 갑자기 머리 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간밤에 섭취한 카페인이 이제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아빠, 뭐라고?”
“뭐를 마싰는가 보드라.”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무슨 소리야. 뉴스에 났어? 그럴 리가 없어.”
“뉴스에 그리 나왔다. 음독이라카데.”
오랜만에 고향에 가셔서 그런가 아빠의 말투에 평소 안 쓰던 사투리가 베어 나온다.
“아빠, 끊어봐요. 나 좀 알아보고 연락할께.”

TV를 틀었다. 정규 방송 아래 굵은 자막이 떠있다.
“MBC 뉴스속보
예무현 전 대통령 음독
양산부산대병원 입원”

자막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세상이 온통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니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리가 없다.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정말인가…하는 수긍이 슬그머니 그늘을 지운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 해봐야 알지 못하는 존재의 편린. 그나마도 언론을 통해 걸러지고 굴절된 단면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먼지만한 조각에서도 우리는 때때로 느낀다. 직감이 말한다. 자살은…아니다. 라고.

지금쯤 편집국은 난리겠군.
출근 안하는 토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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