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아 그리고 사랑의 본질

in fika •  11 months ago  (edited)

운전하는 중이었어요. 낚시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핸들을 놓칠 뻔 했죠.

헬스장에서 뛰고 있었어요. 거울 저편에서 사람들이 TV앞에 모여 웅성대고 있더라고요. 무슨 일이 났나 싶어 TV쪽으로 갔어요. 자막을 보는 순간 오금이 풀리더라고요. 다리가 떨려서 서있기가 힘들었어요.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주변의 소리가 갑자기 내게서 멀어지며 다 웅성거리는 듯했지요.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왜? 누가? 타살일꺼야. 자살할 사람이 아니야. 머리속에는 온통 의문부호가 떠오르고 심장은 쾅쾅뛰고. 서둘러 집에 왔어요. TV를 켜고 하루 종일 뉴스를 봤어요. 자직도 그때 그 기분이 잊혀지지 않아요.

집수리를 하고 있었어요. 사다리에 올라가 홈통에 페인트를 칠하는 중이었는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속보를 듣고 놀라서 붓을 떨어뜨렸어요. 휘청하고 떨어질 뻔 했지요.

식구들이랑 아침 먹는 중이었어요.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텔레비전 자막을 가리키더라고요. 세상이 멈춘 것 같았어요.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더라고요. 밥을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기억도 안나요.

각자 돌아가며 그날 아침을 이야기했다.


한아는 그날따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6시 35분. 전기주전자에 물 350ml 붓고 단추를 눌렀다. 프렌치 프레스에 굵게 간 케냐 원두를 계량스푼으로 세 번 넣었다. 하효 말에 따르면 한아는 커피를 물처럼 마신다. 많은 날은 하루에 대여섯 잔도 마시는 것 같다. 그것도 피처럼 진하게. 오늘은 평소 쓰던 머그 대신 아끼던 잔을 꺼냈다. 로얄코펜하겐. 꽃잎 같이 얇고 하얀 사기에 수채화 느낌의 파란 펜으로 그린 섬세한 무늬가 특징이다. 반복된 패턴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작고 예쁜 잔과 같은 무늬의 접시가 한 쌍이다. 한아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독립해 나올 때 엄마가 선물로 준 것이다. 처음 상자를 열었을 때 한아는 왠지 레이스 장갑이라도 끼고 찻잔을 들어야 할 것 같아 피식 웃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또는 엄마가 보고싶을 때 꺼낸다.

한아는 스웨덴인이다. 얼굴만 보면 반도의 흔한 한국사람이다. 머리색은 연한 빛이 조금도 돌지 않는 윤기 나는 검정, 말 그대로 칠흑 같은 까만색이다. 오베리. 한아의 성이다. 오를 발음할 때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혀뿌리에서 소리를 내야한다. 오(O)에 오믈류드…움라우트가 있다. Hanna Öberg. 한국이름은 오한아. 본명을 말하고 나면 예외 없이 주르륵 쏟아지는 질문.

어? 한국 사람 아니에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아아, 스페인이요. 네? 스웨덴이라고요? 스웨덴은 어디 있어요?
거기도 영어 써요?
부모님이 스웨덴 사람이에요?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국적을 말해준다.

입양됐어요.

입양인이라고 말하면 대화가 잦아든다. 때로는 말이 아닌 태도가 더 많은 말을 한다. 셀 수도 없이 반복된 이 대화의 마지막에 유일하게 웃으며,

너 혼자야? 형제나 자매 있어?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간 사람이 하효다. 둘은 한아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처음왔을 때 만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7년지기다.

한아는 세 살 되던 해 스웨덴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아빠인 보 오베리는 외교관 출신 협상가다. 직장은 스톡홀름 환경 연구소Stockholm Environmental Institute다. 선임연구원으로 일한다. 가끔 초청 강의를 가기도 한다. 전문분야는 지속가능발전이다. 스웨덴 정부는 대외적으로 지속가능 스웨덴, 양성평등 스웨덴을 주요 홍보 정책으로 정했다. 그 덕에 보는 요즘들어 더 바빠졌다. 외교관으로는 현역을 떠났지만 연구도 하고 강연도 하고 가끔 협상단에 차출되어 출장을 간다. 엄마인 세실리아는 웁살라 대학교에서 지속가능발전, 그 중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가르친다. 둘은 대학시절 만났다. 결혼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대학 시절 이후 쭉 함께 살고 있다. 누군가 한아에게 유토피아란 어떤 세상일 것 같으냐고 물으면 “내 부모 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이라고 답할 정도로 선량한 사람들이다.

한아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부모 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보와 세실리아는 북구의 전형적인 옅은 금발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보의 머리색은 잿빛이 되었고 세실리아의 금발에는 윤기가 사라졌다. 보는 회색빛 파란 눈, 세실리아는 초록색 눈이다. 한아는 머리색도 눈동자도 까맣다. 어릴 적엔 혼자만 다르게 생겼다는 게 오히려 좋기도 했다. 온통 옅은 눈에 옅은 머리 색 친구들 사이에 스스로 왠지 좀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보와 세실리아는 한아가 다섯 살 되던 해, 한아에게 입양이 무언지, 한국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왠지 슬펐던 기억은 난다. 한아가 다섯살에서 여섯살로 넘어가던 무렵 동생이 태어났다. 리스베트. 엄마 아빠와 꼭 닮은 리스베트를 보면서 한아는 어렴풋이 외로움이라는 걸 느꼈다.

한아가 일곱 살이 되던 생일에 보는 선물로 지구본을 사주었다. 제일 먼저 가르쳐준 나라가 스웨덴. 그 다음이 지구본을 동쪽으로 얼추 반 바퀴 돌아 스웨덴보다는 조금 남쪽에 있는 한국이었다.

“한아, 이곳이 네가 태어난 땅이야. 넌 아기였을 때 비행기를 타고 이곳 스웨덴에 왔단다.”

보의 검지 손가락이 한국에서 몽골과 터키, 유럽을 죽 지나 스웨덴에 멈춘다.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게 스물 일곱 살이 되던 해였는데. 한아 너처럼 어릴 때 비행기를 탄 사람은 정말 드물꺼야.”

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렸지만 한아는 벌써 느꼈다. 자신이 엄마 아빠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어린이집에 들어가고 보니 한아는 친구들과도, 선생님과도 달랐다. 한아의 머리카락은 한겨울 밤처럼 짙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한여름 태양처럼 빛난다. 가족 사진 속 한아는 한여름의 겨울아이였다.

십대 때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애꿎은 양부모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들의 사랑을 의심하고 짜증을 내고 일방적인 침묵으로 세실리아와 보를 고문한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이 한아를 그저 수집품처럼 여기는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한아를 꾸중할 때는 내가 친 자식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겠지 하는 끊임없는 비교. 그렇게 스스로를 가두며 살았다. 동생 리스베트와는 사이가 좋았다. 세상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세실리아와 보는 세상 여느 부모처럼 한아를 지극히 사랑해 주었다. 리스베트와 똑같이 사랑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아와는 달랐다. 한아와는 눈색깔도 피부색도 머리색도 달랐다. 한아는 늘 나와 닮은 어떤 존재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럴수록 친부모에 대한 궁금증과 그리움이 더해갔다.

내 생물학적 부모는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장애인인가?
아님 범죄자일까?
혹시 우리 엄마는 싱글맘인데 몸이 너무 아파 나를 기를 수 없었던 건 아닐까?
아님 부모가 둘 다 사고로 돌아가신 걸까?
부모님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나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운명의 장난으로 헤어졌지만 몇 년 째 나를 찾아 헤메고 있지 않을까? 지금도 나를 생각하며 한 켠에 무거운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아님 우리 부모는 나를 원치 않았던 걸까? 난 이 아이가 싫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은 뜨겁다는 것만큼 당연한데, 나는 왜 버려졌을까? 내 어딘가에는 사랑 받을 수 없는 무슨 요소 같은 게 있는 걸까? 아님 나는 사랑 받지 못하는 운명 같은 걸 지고 태어났나?

아무리 고민해도 질문의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나? 그것도 잘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속한 조직에서 늘 인정 받으며 자랐다. 토론도 운동도 잘했다.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는 친구는 많지 않지만 그건 한아 뿐 아닌 대부분의 스웨덴 사람들도 똑같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은 확신이 없었다. 친구들은 이미 십대가 되면서부터 남자친구를 사귀며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한아는 두려웠다. 한아에게 관심을 보이던 친구들을 향해서는 ‘내가 달라서 호기심으로 좋아하는 걸까’ 싶어 마음을 다 열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사랑이었나 싶었던 사람을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떠나보낸 적도 있다. 한아는 자신에게 사랑을 밀어내는 구석이 있는지 궁금했다. 하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할 수 가 없지. 하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여행으로 한아는 아프리카 가나에 갔다. 런던에서 갈아탔는데, 대기 시간을 빼고 비행시간만 총 12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 스웨덴까지 열두 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먼 곳으로 자기의 아이를 떠나 보낼 땐 절대로 기를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무엇일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도대체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한아에겐 가족이 떨어져서 살아도 될 만한 이유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나에는 좁고 너저분한 흙집에 여섯 명이 함께 사는 가족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래, 누군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버렸어. 하지만 날 목숨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 그들이 내 진짜 부모야.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보와 세실리아를 감정적으로 괴롭히지 않았다. 하지만 한아의 마음을 갉아먹는 질문이 다 해결된 건 아니었다. 그냥 해결된 척 할 뿐이었다.

철이 들고 대학에 들어가자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운명이었다면 한아가 살고 있어야 할지 모를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보고 싶었다. 한아를 낳은 부모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모를 만나 어린 한아를 떠나 보내야 했던 이유에 대한 변명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이 가난한 나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한국은 스웨덴에 중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입양아를 보낸다. 중국은 한 가정 한 아이 제도가 있다고 했으니 –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지만 – 제도가 허락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난 경우 입양 말고는 해결책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지독한 가난? 전쟁?

한국으로 떠나는 일주일 전까지 한아는 부모에게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미루다가 출국 며칠 전에야 말을 꺼내려 부모의 방으로 갔을 때, 열린 문 틈으로 세실리아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 후면 떠나는데 한아는 우리에게 작별 인사도 안하고 갈 건가 봐. 왜 한아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지? 사랑이 심장을 찌르듯이 아픈 거라는 노랫말이 난 무슨 뜻인지 몰랐어.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한아는 왜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는 걸 모르는 거야? 자식에 대한 사랑은 원래가 짝사랑인거야?”

“언젠가 한아도 알게 될거야.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잖아. 사랑은 실패하지 않아. 어느 한쪽이든 놓지 않으면. 이건 이미 정해진 법칙이야. 한아가 그 사실을 언제 받아들이냐가 문제지.”

“그럴까.”

“난 오히려 질투가 느껴질 지경인걸. 당신 나 때문에 애태운 적 없잖아. 여지껏 함께 하는 동안 당신의 이런 모습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걱정마. 한아, 당신, 나 우리는 가족이야. 당신과 나는 서로를 선택했어. 우린 서로를 알잖아. 우리는 무엇이 되었든 쉽게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그러니 우리가 결혼을 선택했을 때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한거야. 그렇지? 그리고 우린 한아를 입양하기로 했어. 그 역시 쉬운 선택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힘들다고 놓아버리거나 하지 않아. 나는 내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과 한아를 지킬꺼야. 한아도 알고 있을꺼야. 모른 체 하고 있을 뿐이지. 누구도 사랑을 못 알아차릴 수는 없어.“

한아는 문을 열고 들어가 울면서 부모에게 안겼다.

한국에 도착해서 입국심사를 하고 게이트를 나섰다. 기다리는 사람이 언제 나올까 기대에 가득 찬 숱한 눈이 한아를 맞는다. 한아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갑자기 환영 받지 못하는 무대에 선 기분이다. 고개를 숙인 채 가방을 밀고 나왔다. 빙 둘러 서있는 사람들을 지나 어디로 가야할지 두리번 거리며 서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로비에 서 있는 한아를 이리저리 치고 지나갔다.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이 툭 떨어졌다. 가방을 줍는데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엄마 생각이 났다. 한아는 공중전화를 찾아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쪽은 새벽일 테지만 상관없었다. “할로아?” 하는 리스베트의 목소리에 한아는 아무 말없이 엉엉 울었다.

“한아? 도착한거야? 마마, 한아한테 전화왔어.”
수화기 너머로 리스베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

“한아?”
세실리아다. 한아는 하염없이 울다가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세실리아의 목소리도 젖어있다. 침착한 말투로 세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한아,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어. 나와 보는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어.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왔어. 어쩌면 네가 우릴 선택한 건지도 모르지. 넌 특별한 아이니까. 넌 영화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하면서 등장한 게 아니야. 우리가 선택한 운명이야. 그래서 더 사랑해.
보를 만나고 가정을 꾸렸지만 우리에겐 아이가 생기질 않았어. 서른이 훌쩍 넘어 널 만났지. 처음 네가 우리집에 왔을 때 넌 정말 많이 울었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내가 아무리 달래도 넌 울음을 그치질 않았어. 보와 나는 돌아가면서 밤에 눈도 못 붙이고 널 돌보다가 출근했지.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아도, 내가 정말 엄마가 되는구나. 나에게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행복했어. 넌 누가 뭐래도 내 아이야. 세상에 누군가를 이렇게나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지. 보가 질투할 정도니까. 넌 뭘 해도 다 예뻤어. 울어도, 눈을 흘겨도, 똥을 싸도. 다 예뻤어.”

“미안해 엄마. 그런데 두렵지 않아?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게. 그리고 그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난 언젠간 분명 떠날 텐데. 내가 엄마를 귀찮아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겠지. 분명 그렇겠지. 벌써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난 허전해 할 테고. 근데 그거 알아? 시간이 더 흐르면 너도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하게 될거야. 끝을 아는 사랑. 난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런데 지금은 그게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아. 그런 때가 온다고 해도 난 지금 너를 너무 사랑해. 정말 내가 가진 걸 다 주고 싶을 만큼.”

한아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때가 언제지? 사춘기를 지나면서 한아는 세실리아에게 더 이상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 한아는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주인이 안아주려고 해도 할퀴고 달아나는 고양이처럼그런 세실리아에게 생체기를 냈다. 그런 한아가 자기의 심장에 새겨진 상처를 내보이고 있다. 아프다고 하고 있다. 세실리아는 이런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한아는 다시 마음을 닫을지도 몰라. 세실리아는 조바심에 마음에 있던 말을 다 쏟아놓을 작정이었다.

“한아, 누구든 사랑하면 두려움이 생겨. 내가 이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게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만큼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해줄까. 상대가 냉랭해지면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싫어졌나 하고 조바심 내게돼.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두려웠지. 젊었을 때 내가 아는 사랑은 그랬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게 사랑일까 싶어. 걱정하고 조심하고 불안해하는 뜨뜻미지근한 감정은 내가 널 생각하는 감정과는 비교가 안돼. 차원이 달라. 난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야. 남 앞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 심지어 보 앞에서도. 하지만 너 때문에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울고 화내면서 내 모든 감정을 다 끄집어 내야 했지. 내 끝을 봤어.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어. 너를 사랑하는데는 두려움이 없었지. 네가 나를 그만큼 사랑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어. 끝을 알면서도 두려움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거. 난 그게 진짜 사랑인 것 같아. 한아, 넌 그렇게 사랑 받는 존재야. 그런 사랑을 하게 해줘서 고마워, 한아. 내 아기.”

뜨거운 물로 예열한 잔에 커피를 담고 한잔 마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하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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