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_modern history] 한국교원총연합회의 역사

in history •  4 years ago 
  1. 한국교원총연합회의 역사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는 처음부터 순수한 교원들의 단체가 아니었다. 출범부터 반관반민의 성격을 지니고 시작하였고, 독재에 아부하고 앞장섰기에 4.19와 6.10항쟁 등 민주화의 열망이 터질 때마다 변신을 약속했지만, 실행하지 못한 채 과거로 회귀하곤 하였다. 그래서 교총에는 항상 ‘어용’이란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한국교총의 전신은 1947년 11월, 당시 미군정 하에서 문교부장을 지내던 오천석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선교육연합회(조교련)였다. 초대 회장으로 최규동 서울대 총장을 추대하긴 했지만, 오천석이 명예회장을, 문교부 사범교육과장이던 사공환이 임시 사무국장을 맡은 데다 사무실도 문교부 사범교육과에 둠으로써 이 단체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특히 평교사를 철저히 배제하고 교장 및 도 학무국장 등 관리직 중심으로 임원을 구성하였고, 문교부 지원금과 방학책 독점 판매가 주 수입원이었던 것도 조교련이 문교부의 어용단체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조교련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교육연합회(교련)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관리자 단체의 속성은 변함이 없었다. 교원의 지위 향상과 교육의 자율성 증진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교원 복지나 교육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직 정부의 교육정책을 홍보하거나 정권의 전위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정부 측도 선거 때마다 교원의 표를 의식, 교련을 적절히 이용하려 했으며 대한교련 또한 입법 활동을 명분으로 공공연히 국회의원 후보(대부분 여당)를 지지하기도 했고 자체적으로 나서기도 하는 등 교육 기득권층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에 불과하였다. 교련의 이런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초대 사무국장인 박철규가 오천석 회장(2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며, 상당수 자유당 후보가 ‘교련 공천’임을 내세워 당선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련은 설립 초기부터 어용단체 또는 관변단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오천석 명예회장도 훗날 회고를 통해 “교련이 비민주적 성격의 단체라고 비난받은 것은 집행부가 관리직 중심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라며 “특히 초등교육 중심으로 조직이 운영돼 중등ㆍ대학 교원들이 도외시 된 게 교사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졌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교련에 처음 닥쳤던 위기는 4.19혁명이었다. 노골적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위해 교사를 동원하는 등 교권 훼손에 앞장선 것이 결국 교원노조 파동의 진원을 제공한 것이다. 4,19 직후 조직된 ‘대한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조)’는 교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발판으로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조합원 수 22,000명은 교조 설립 후 2개월 뒤의 상황으로 당시 문교부가 국회에 보고한 인원이다. 당시 초ㆍ중등교원 총 수는 75,000명이었다.
이들은 어용단체인 교련의 해체와 함께 비리인사의 추방, 교과서 공급의 비리 해결 등을 주장하였고, 교련 회원은 82,000명에서 5만여 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 교원노조 파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동식 회장(5대)이 사임하고 유진오 회장이 취임했지만, 유진오 회장이 교련 회장을 한 경력은 그의 빈소에서 후배 교수들에 의해 공과 논쟁이 벌어지는 불명예스러운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교련의 어용화는 제3공화국 중반부터 더욱 본격화되었다. 교련은 유신헌법 지지 결의문을 발표했고, 회장은 낙하산 인사의 단독 출마로 결정되었다. 박동묘ㆍ이선근ㆍ곽종원 회장이 청와대의 낙점을 받아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초대 낙하산 회장인 박동묘는 유신정우회 의원으로 변신하여 유신독재의 첨병으로 활동하였다.
교련의 어용화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더욱 심화하여 교련은 사실상 교사에 대한 국가통제기구의 하나로 전락하였다. 1980년 이후 교련 회장 경선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전두환 정권 출범 지지 결의문을 채택했던 교련에 민주적 경선체제가 갖추어질 수는 없었다. 교련은 문교부와 사전협의를 거친 사안에 대해서만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1986년 박일경 회장이 연두 기자 회견을 통해 ‘교수 재임명제의 즉각 폐지와 교육 자치제의 개선’을 주장한 것이 언론은 통해 크게 보도된 일이다. 이에 대해 문교부는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내용이라며 정식 경고했고, 사무차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다. 당시 신민당의 조순형 의원이 “민간단체가 정책 대안을 꼭 문교부에 건의한 다음에 발표해야 하느냐”고 질책했지만, 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문교부가 교련에 대해 지원하고 있으며 감독권이 있기 때문”이라며 항의를 일축하였다.
교총은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교원의 지위 향상과 교육의 자율성 확보를 내세우지만, 정작 그런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수단――단결권ㆍ단체교섭권――이 없어 그저 건의ㆍ청원ㆍ성명 등을 통해 사업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런 교련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1981년의 ‘돗자리 파동’ 이런 구조적 한계로 인해 교총은 입법 청원이 ‘청탁’의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1981년 당시 정범석 회장은 「국가공무원법」 개정을 앞두고 로비를 하여 여교원 출산 휴직제 등 교육계의 숙원을 상당 부분 반영시켰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례로 강화산 화문석을 구입하여 문공위 의원 등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불법 로비로 번져 정범석 회장이 불명예 퇴진하였다.
과 1987년의 ‘병풍 사건’ 돗자리 파동으로 불명예 퇴진한 정범석 회장은 1987년에 다시 회장에 당선되었으나 퇴임하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병풍을 선물한 것이 구설수에 올라 다시 불명예 퇴진하는 수모를 겪었다. 정 회장은 교총회관 건립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이었다.
교련이 직면했던 또 하나의 위기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출범이었다. 엄혹했던 전두환 정부 시절, 정권의 부당한 교권 침해에 항의하거나 피해 교원 구제를 건의한 일이 없었던 교련이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 등 패악질을 거듭하자, 이에 실망하고 분노한 교사들이 교련을 대체할 조직으로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을 출범하였다(1987.9.5),
전교협은 창립선언문에서 ‘우리는 떳떳할 수 없었던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사가 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고 밝히고 교육의 자율성 회복을 위해 힘쓰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련에 대한 회비 납부 거부 및 탈퇴 운동을 전개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교련은 그간의 잘못을 시인하며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청회를 개최하여 체질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집행부가 총사퇴하고 문교부와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재정립하고, 평교사와 여교사 참여율을 높여 회원을 위한 조직으로 거듭나겠다고 약속하였다(1987.9.10.). 하지만 양 김씨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교련은 거의 모든 약속을 파기하고 원위치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온갖 압력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교조가 창립되자(1989.5), 여당인 민정당 대변인까지 나서서 “교련이 관료적ㆍ비민주적 운영으로 인해 많은 교사로부터 외면받아 온 현실을 고려, 과감한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며 교장 대신 평교사 중심으로 운영하고, 사무국 간부직도 일반교사가 맡도록 정관 변경을 지시하였다. 정부와 여당이 정관 변경을 지시하는 것 자체가 대한교련이 어떤 단체인지를 확실하게 말해준다.
한편 전교조 탄압에 골몰하던 노태우 대통령은 교련을 방문하여 교원소청심사위의 설치와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약속했고, 교원 관련 업무 협의기구를 교련으로 일원화해주겠다며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힘입은 교련은 명칭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으로 바꾸었지만, 면면히 이어온 그 본질은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교총의 반교원ㆍ반교육적 작태는 2005년 12월, 제256회 정기국회에서 통과된 「사립학교법」 개정안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이사회 구성과 운영: 개방형 이사제 도입, 이사회 회의록 작성 및 공개, 친족이사 참여 제한 강화, 개방형 감사제 도입, 비리 임원 학교 복귀 제한 강화, 임시이사 재임 기간 제한 삭제
②재산과 회계: 예ㆍ결산 공시 및 감사보고서 제출
③교원임면과 신분보장: 학교장 임기보장, 신규 교원 공개전형제도 도입, 학교장 임명 시 이사장 친인척 배제, 교원면직 사유에서 노동운동 삭제
반대 운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으로 「사립학교법」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었는데도 명색이 교원단체라는 교총은 사학법인의 전위대로 나서서 개정이 이루어지면 사학의 경영권이 전교조의 손아귀에 넘어갈 것이라는 과장된 논리를 전개하며 반대 여론 조성에 힘썼다. 이때의 반대 운동으로 「사립학교법」의 재개정이 이루어진 것이 지금까지 사립대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최대의 요인이 되었으니 당시 회장이었던 윤종건 등은 우리나라 고등교육을 망친 최대의 악업을 쌓은 셈이다. 윤종건은 3불 정책(기여 입학제ㆍ본고사ㆍ고교 등급제) 폐지를 주장하고, 교장공모제저지 투쟁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또 안양옥 회장은 박근혜 정부의 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기도 하였으니,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 나라가 OECD에 없을 뿐 아니라 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북한과 몽골 등 일부 국가에만 있는 매우 후진적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 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처음 도입한 제도였다.
교총의 행보는 최근까지도 반교육적ㆍ반역사적인 잘못된 길을 계속 걷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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