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텀소설 - 소각

소각

우리는 방금 계약 철회서를 다운로드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감옥에서 해방시켜줄 유일한 열쇠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_{나는 항상 존재하는 이 순간에, 나의 사랑으로,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나와 함께, 생명인 지구 어머니와 빛인 하늘 아버지를 영적 법정에 소환하여 내 선언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나는 나의 죄의식, 비난, 수치심, 분노, 슬픔을 일으키는 암묵적인 동의에 의한 모든 계약과 그에 따르는 세세한 조항들, 서약, 맹세와 협의들을 취소하고 완전 무효로…}

낭독시간은 10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영문도 모르고 이 지구에 던져진 순간부터 우리의 전 생에 걸쳐, 그리고 수만번의 윤회 속에서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수행은 고달팠다. 마음이 무너지면 몸이 무너졌다. 몸이 무너지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자아의 껍질들이 다시 달라붙었다.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한 자들은 서럽게 울면서 떠났다. 계약 철회서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목소리는 더욱 단호해지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심장 차크라와 송과선의 에너지가 요동쳤다. 선언이 끝난 다음에 남은 건 침묵 뿐이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 흩어져 고립되어 있었지만 마치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우리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 세계의 환영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우리는 존재하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고요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노트북을 열었는데 유튜브에 떠오른 한 곡을 클릭하게 되었다. Eri Sugai의 Horizon이었다. 조잡한 영상이 나왔고 Eri Sugai의 허밍소리가 들렸다. 별 생각 없이 화면을 응시하던 나는 무척 놀랐는데 내가 더이상 계약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이며 지금부터 영원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메세지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쁨에 찬 나머지 허공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였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흘러들어왔고 나는 긴장을 완전히 뺀 상태로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다음날 나는 심각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관공서 담당자였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나에게 고소장이 들어온 상태로, 최근에 내가 인터넷에 올린 영상 작업물에 개인 소유의 부동산이 찍혔고 그 작업물을 당장 내리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들은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다시는 그 작업물을 올리지 말라는 각서.

한 시간동안의 긴 통화 끝에 결국 나는 쓰겠다고 대답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 각서를 쓰면 안된다는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지만!)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계약해지를 선언했고, 빛 아버지 그리고 지구 어머니와 함께 전 차원에서 날아온 존재들이 보는 앞에서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가! 왜? 도대체 왜 계약해지 후에 내가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계약이 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하이어 셀프-더 높은 차원에 살고 있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기다렸다.

….

답은 금방 도착했다. 그 답이 지금 적히고 있다.

“시간이라는 환영을 벗어나. 너는 계약해지 선언을 시간 밖에서 했어. 네가 앞으로 할 모든 계약도 이미 해지가 된 상태야. 계약철회를 먼저 하면 해지될 계약이 도착해. 해지가 될 계약이 있어야 계약철회가 이루어지니까. 열쇠가 먼저 온 다음 자물쇠가 온 거지. 시간 밖에서 열쇠와 자물쇠는 원래 하나야. 전 차원의 그 어떤 계약도 이제 너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어. 네가 나에게 자유를 선물했어. 너도 지금 자유로워. 그러니 그냥 즐겨.”

_{퀀텀소설은 5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