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역학은 가보지 않은 길은 없다 말하고 선택한 길이 운명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가보지 않은 길은 평행우주로 분기되어 이 우주공간 어딘가에서 함께 흘러가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수많은 내가, 수많은 우주에서, 가보지 않은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는. 어떤 나는 망하고 어떤 나는 성공하고, 어떤 나는 행복하고 어떤 나는 불행하고.
그러나 선택으로 분기된 길이므로 어떤 평행우주의 나도 내가 아니다. 선택의 순간 갈라진 나와 다른 나는 이제부터 서로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남남인 것이다. 건투를 빌 뿐. 그러나 그의 행복은 나의 불행일 수도. 손오공의 머리카락으로부터 생성된 수많은 내가 각자 걸어가고 있으니, 우리는 우주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있는 초월적 근본의 분기된 아바타이자 새로운 가문의 조상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 순간에, 이 시간선에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만은 참이다.
후회하고 번복하고 싶은 마음은 가보지 않은 길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초능력을 사용하여 가보지 않은 우주로 돌진한다 한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우주를 붕괴시킬 뿐이라는 걸. 상상력이 부족한 헐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신이 나서 멀티버스에 손을 대다가 결국 이 패러독스에 부딪히고는 자꾸 자멸해 버리고 있다.
이 드라마의 결말 역시 그렇다. 세상을 구원하려고 만든 슈퍼히어로들이 실은 세상을 멸망시킬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걸, 여러 시간선을 멸망시키고 난 뒤에야 깨닫고는 마침내 자폭하고 만다는 해괴망측한 결말로 끝을 맺어 버렸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얼마나 지루하고 또한 기상천외한지. 그만 볼까 하는 순간마다 툭하고 터져 나오는 기상천외한 설정과 병맛 시츄에이션, 그리고 멋들어진 OST에 결국 그들의 우주를 정주행해 버렸다. 이렇게 또 하나의 우주가 소멸하는구나.
멸망이 예정된 우주에서 뭔 짓을 한다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멸망의 원인인데. 가보지 않은 길을 열심히 되돌아 가본들 초능력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운명이고 우주인 것을. 부처님 손바닥을 열심히 달려본들 부처님 손바닥 간지럽기만 한 것이다. 인간의 작은 뇌로 양자역학이니 평행우주니 열심히 머리 굴려 봐야, 셋이자 하나인 우주는 선택과 운명이 하나인 신비를 인간에게 설명할 능력이 없고 자유의지와 필연을 분리시킬 능력이 없다. 그러니 선택하고 나면 가보지 않은 길은 없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미래는 수많은 갈래로 펼쳐져 있고.
그러므로 할 것은 무엇인가? 태어난 우주에서 기상천외한 선택을 반복하고 병맛 개그 같은 인생사를 충분히 즐기는 것. 그래도 하늘은 안 무너지고 그래도 우주는 소멸한다. 선택을 번복한들 쪼그라든 계좌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옛사랑은 그때의 그가 아닌 것.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될 일은 되고 만나야 할 이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단다.
[위즈덤 레이스 + Movie100] 084. 엄브렐러 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