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장에서 나온 추상물인 입자는 장이 매우 강력한 영역(특이점)에 해당한다. 특이점에서 멀어지면 장은 약해지고 어느 순간 다른 특이점에서 나온 장들과 합쳐진다. 하지만 어디에도 단절이나 분할은 없다. 따라서 세계를 상호작용하는 개별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고전적 관념은 근거도 의미도 없다. 우리는 우주 전체를 단절이 없는 미분리된 전체로 보아야 한다. 입자 아니면 입자와 장으로 분할하는 일은 조잡한 추상이나 근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갈릴레오나 뉴턴과는 뿌리부터 다른 질서, 바로 미분리된 전체 undivided wholeness라는 질서에 이르렀다.
우주가 퍼져나가는 물결의 파동이라면 너와 나는 헤어진 걸까? 세상의 모든 분리는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고. 우리는 모두 장판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두 개의 슬롯을 동시에 통과하는 입자는 너의 바라봄으로써 결정된 '시간의 순간'이고, 다시 물결과 파동으로 이어지니.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건 영향을 주고받을 뿐이고,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장판 저쪽 끝의 나비가 움찔하고 날개를 퍼덕였더니 너에게 고난이 몰려왔다는 걸. 누굴 원망하겠어. 너도나도 얼마나 퍼덕였니. 그러나 그 모든 게 전체 질서로부터 투영된 홀로그램이라면.
세상은 과학자가 된 선지자들이 밝힌 법칙으로 전기도 만들고 하늘을 날기도 하면서, 정작 그 법칙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는 한사코 거부한다. 그러니까 너가 노오오오오력해서 그런 결과를 얻은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은 영원 무궁히 동시에 존재하는 각자의 우주가 자신의 창조성을 펼쳤을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지구는 편평한걸' 하고 과학의 사당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것이다. 무지몽매의 주문을.
여기서 우리 위치는 갈릴레오가 자기만의 연구를 시작했을 때 처한 위치와 비슷하다.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수식에 끼워 맞추기만 했던 낡은 생각이 틀렸음을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 같은 이들이 한 노력처럼). 하지만 생각이나 언어 사용, 관찰에서 우리는 여전히 옛 질서에 얽매여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야 한다. (갈릴레오가 한 것처럼) 이는 새로운 차이를 알아내는 일이다. 그러면 옛 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대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개념처럼) 어느 정도까지는 맞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기본 차이를 알아내면 (뉴턴이 했듯이) 모든 차이를 관련시켜 하나로 설명해 줄 보편 비율이나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뉴턴이 코페르니쿠스의 아이디어를 넘어섰듯, 우리의 노력은 양자론과 상대론 너머로 과학을 이끌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현재 물리학의 상황을 새롭게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이 전일성全一性의 선지자는 마녀사냥을 당했다. 물론 죄목은 우주가 모두 하나의 전체이다, 우리가 아직은 이해하지 못해도 숨겨진 변수가 너와 나의 인생에 접혀져 있다고 세계의 비밀을 폭로한 대가가 아니었다. 매카시즘, 빨갱이 마녀사냥이 2차세계대전 종결자들에게 들이닥쳤을 때 (물론 그것은 아마도 히말라야 골짜기 어느 설인의 재채기의 파장이 도달했을지도 모를), 그는 동료 선지자들에 대한 증언을 거부한 대가로 남반구로 쫓겨나고 말았다. (아니다. 이번에는 적도기니의 어떤 쥐가 사레에 들리는 바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심지어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지도 못했는데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레슬리 준장은 그가 간첩 혐의를 받고 있던 다른 학자와 친구라는 이유로 그의 보안 허가를 승인하지 않았다) 죄목을 뒤집어쓰고 쫓겨나고 말았다. 참가하지도 못한 프로젝트의 대가로.
이러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봄의 창조적 사유는 빛을 발했다. 1952년 그는 '숨은 변수 이론'이라고 하는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보어의 관점을 충실히 계승한 51년 책과는 달리 그의 52년 해석은 양자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뒤집었으며, 이후 모든 대안 해석의 원형이 된다. 하지만 그의 해석이 처음 나왔을 때 물리학자들은 그를 매도하기에 급급했다. '유치한 일탈 행위'(오펜하이머)라거나 '물리적 판타지'(아인슈타인)이라는 비난에서부터 '불순한 형이상학'(하이젠베르크), '시간 낭비'(와인버그)에 이르기까지 봄의 이론을 둘러싼 오해는 끊이지 않는다. 폰 노이만은 한때 교회와 같이 조직된 양자물리학에서 보어를 교황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자신은 추기경 정도?) 이제 봄은 그러한 체제의 실질적인 '배교자'가 된 것이다.
빡치지 않았겠는가. 이유를 찾아보고 싶었으리라. 그는 조각난 사고에 대해 힐난한다. 이게 다 조각만 보고 전체를 이해하려 들지 않은 쪼개진 너의 두개골 탓이라고. 이중 슬릿을 통과한 전자는 전자일 뿐이고 미시 세계의 법칙은 개미들에게나 유효한 거라며, 신이 주사위 놀음을 할 리 없고 태양은 여전히 지구를 돌고 있다는 교리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너나 나나 다를 게 없다. 그러니까 우주는 너의 말에 이미 접혀있다니까. 네가 약속한 그 말에 수많은 다중 우주들이 빼곡하게 접혀 있고, 그중 선택된 우주만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환영으로 네 앞에 펼쳐지는걸. 그러니까 물질도 생각도 모두 하나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지. 우리는 무지한 인간이니까. 우주를 이해하려 드는 건 마치 개미가 컴퓨터를 이해하려 드는 것 같아서, 아니 그보다 수억만 배 더 어려운 일이라, 어떤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고 증명되어도 여전히 코끼리 다리를 만질 뿐이라는 걸 세상의 모든 구도자들은 명심해야 하리라.
우리 논의는 우주, 물질 일반, 생명, 의식이 본래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모두를 한자리에 모은 셈이다. 우리는 이 모두를 같은 바탕에서 나온 투영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펼쳐진 의식 단계에서 우리가 알고 느끼는 범위에 있는 모든 사물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바탕을 자세히 지각하거나 알지 못해도 이는 우리 의식에 접혀 있다. 그 방식은 우리가 말한 대로이거나 아니면 아직 모르는 다른 방식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바탕이 만물의 진정한 종착지라고 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것 모두'의 본질에 대한 우리 견해를 따르면 이러한 바탕도 단지 한 단계로, 원리로만 보면 그 뒤로도 무한한 단계가 펼쳐질 수 있다. 이렇게 펼쳐지는 과정에서 어느 한순간의 견해는 제안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최종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정도 아니요, 그러한 본질적 진리에 대한 결론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제안은 만물에서 활동하는 요소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생각하고 실험하는 대상을 포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어떤 제안도 이제까지의 제안처럼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도 일관되며, 삶에서 그 제안에 따라 나온 것들과도 일관되어야 한다. 이 전체에서 더 깊고 내밀한 필연성에 따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아는 세계와 우리의 생각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로써 우주론과 전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논의는 (잠시나마) 멈춰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전체를 검토하고 이렇게 간략할 수밖에 없는 논의에서 빠진 세부 내용을 채워 넣는다면 앞서 말한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우주탐험 신비의 세계. 전력을 다해서 우주를 파헤칠 것 그리고 규명할 것. 이 시대의 선지자들은 그것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고 있고, 수명을 영원히 연장할 불로장생의 비법을 거의 다 찾은 듯하다. 심지어 젊어지게도 한다며? 머리카락 한 알에서 장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진시황과 손오공이 아쉬울 듯. 2045년, 불로장생의 특이점이 온다고 예언한 미래학자는 여전히 수백 알의 비타민을 복용하며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니까. 그리고 그의 우주는 그 특이점을 세상에 펼쳐내겠지.
배교자로서, 뉴에이지적 가르침의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그의 세계관이 아직 미완성인 것은, 미분리된 우주가 여전히 펼쳐지는 중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그의 세계관에 따르면 '끌어당김의 법칙'은 시작부터 틀렸다. 너와 너의 부는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접혀있었을 뿐.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펼쳐낼까? 너의 말과 생각, 마음에 접혀 있는 무한한 부는 어떻게 세상에 펼쳐져 내릴까? 너는 그게 궁금하겠지만, 너와 너의 부를 조각내고 있는 너의 사고는 이미 전제부터 틀렸다니 어쩌랴.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선지자는. 언젠가 진리로 밝혀질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가 펼쳐지고 마니까. 너의 말에 담겨있던 그것이 지구는 돈다고 말한 순간 이미 발아를 시작했으니. 낮말을 들은 새와 밤말을 들은 쥐를 통해 장판의 저쪽 끝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 이 선지자의 말대로 우주는 접혀 있고 하나로 연결되어 자신의 시간에 따라 창조성을 펼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현상이 아니겠는가.
이제 물질과 의식에 같은 내포 질서가 있다는 생각의 근거를 찾아 나서 보자. 물질은 의식의 대사이다. 하지만 쭉 살펴본 대로, 물질 우주에 대한 정보는 빛이나 소리 같은 에너지 형태로 각 공간 영역에 계속 접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러한 정보는 우리 감각기에 들어오고 신경계를 거쳐 뇌에 이른다. 어쩌면 우리 몸에 있는 모든 물질은 처음부터 우주를 접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정보와 물질의 접힌 구조(곧 뇌와 신경계에 있는 구조)가 의식에 주로 들어오는 대상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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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은 실재 전체를 과정으로 서술하며 그 최종 요소는 점사건, 곧 아주 작은 시공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에 주의하자. 반면 우리 관점에서 기본 요소는 순간이며, 이는 의식하는 순간처럼 시공간을 측정하는 일과 분명히 관련되지 않는다. 단지 시공간 안에서 연장되고 지속되는 불특정 영역을 차지할 뿐이다. 그 연장과 지속 규모는 논의 맥락에 따라 길거나 짧게 변화할 수 있다(한 세기조차 인류 역사에서는 '순간'일 수 있다). 또한 의식처럼 각 순간은 외연 질서 말고도 다른 모든 순간을 자기 나름대로 접고 있다. 따라서 전체에서 어느 한순간과 다른 모든 순간 사이 관계는 전체 내용에 들어 있다. 곧 그 안에 접힌 다른 모든 순간을 어떻게 '접고' 있는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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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말로 온전한 전체적 사고이다. "모두가 모두를 접고 있고 우리 자신도,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대상 전부도 접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접힌(내포된) 채로 모든 곳에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하여 너와 나는 버릴 수도 가질 수도 없다. 미분리된 우리는 언제나 의식의 환영을 따라 등장했다 사라지고, 우주는 매번 우리의 의지를 반영하여 세계를 재편하니, 이 혼란과 갈등은 모두 너와 나의 몫. 그러므로 영원한 이별을 아파하거나 끝없는 불행을 역사로 품지 말아라. 펼쳐질 세상의 씨앗을 품은 것은 모두 너이고 나이니, 누가 우리를 구원할 텐가.
[위즈덤 레이스 + Book100] 016. 전체와 접힌 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