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술] 코팡안 풀문파티를 갔지만, 가지 않았다.

in hive-102798 •  3 years ago  (edited)

2017년, 목적 없이 홀로 떠돌던 태국 여행의 마무리는 바다였다.

"언니, 코팡안 풀문파티에 가보는 건 어때요?"

유독 한국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면서도 마음이 서로 닿지 않아 삐걱거리던 여행이었다. 마음을 주는 걸 포기하고 적당히 어울리며 대부분 혼자 시간을 흘려보내다 빠이에서 L을 만났다. 아이돌 연습생을 한 적있다는 그녀는 지난 행적과는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는데 예쁘장한 얼굴에 스스럼없는 태도와 살가운 행동, 해맑은 표정으로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었다. 같이 어울리던 다른 한국 사람들을 우연치 않게 따돌리고 둘이 가진 술 자리에서 우리는 커다란 버킷 칵테일을 마시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 굳이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둘의 술자리에선 기꺼이 나왔다. 손잡이가 달린 미니 양동이에 얼음과 주스와 술이 가득 담긴 버킷 칵테일은 태국 어디를 가든 쉽게 만날 수 있다. 보통 맛보다는 가성비 때문에 마시는 술인데 이 날 간 가게에서는 용과나 망고 등 생과일을 가득가득 넣고 만들어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선하고 맛있었다. 술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한다는 나의 성향을 들은 L은 문득 코팡안으로의 여행을 제안했다. 코팡안의 풀문파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혼자 가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다. 혼자 밥도 잘먹고, 혼자 바에 가서 술도 잘 마시고, 혼자 클럽에도 갈 수 있지만 파티에 혼자 가는 건 또 차원이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수천명이 운집한 곳에 아군 한 명 없이 혼자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건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다.

"술 좋아하고 음악 듣고 춤추는 거 좋아하는 언니에게 딱이에요."

해맑게 말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니 까짓것 혼자 못 놀건 뭐 있나 싶은 마음에 당장 비행기표를 끊었다. 같이 가면 더 좋았겠지만 그녀는 생계를 위해 다시 한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국의 북단 빠이에 있던 내가 남단의 섬, 코팡안에 가기 위해서는 많은 관문을 거쳐야 했다. 우선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미니버스로 가야하고 치앙마이에서 방콕가는 버스는 10시간이나 걸린다.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 수랏타니 공항에 내린 다음에는 공항에서는 또 돈삭 항구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 후 돈삭에서 페리를 타고서 코팡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그 과정이 번잡스럽기 그지 없다.

'하나의 목적지에 닿기 위해 이렇게 많은 탈 것을 타다니. 이 여정의 목적이 오직 파티라니.'

장장 1박 2일을 움직이면서 나는 이 기가막힌 이동의 목적을 상기할 때면 실소가 툭 터져나왔다. 풀문파티 외에 뭘 할 수 있을까? 어디에 숙소를 잡아야 할까? 검색으로 지리한 이동 시간을 채웠다. 그러던 와중에 블로그에서 코팡안에 관한 글을 하나 읽었는데, 일몰이 아름다운 바에 대한 이야기였다. 감탄과 극찬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블로거들의 과장에는 이골이 난 상태였는데도 진심 어린 감탄이 배어 나와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코팡안은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라 대부분 오토바이를 렌트해서 이동을 하거나 택시를 타야지만 움직일 수 있다.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는 나는 바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예약했다. 오로지 그 바를 가기 위해. 코팡안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해가 진 늦은 저녁이었기에 나는 다음 날 마을을 빨빨 거리고 돌아다니다 해가 질 무렵에 일몰이 아름다운 바로 향했다. 20분 정도면 도착한다 했지만 25분쯤 걸었을 때 내 눈앞에는 계단과 표지판이 나타났다.

'암스테르담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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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뻘 흘리는 땀을 쉴새 없이 닦아가며 지옥 같은 계단을 가까스로 올라가니 하늘 한가운데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진 바가 있었다. 천공에 바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더 아름다운데 카메라가 표현을 못한다. 가장 먼저 큰 한 덩어리의 구름에 압도되었다. 이렇게까지 큰 구름을 살면서 본적이 없다. 거대하고 웅장한 구름 뒤로 점점 핑크빛으로 젖어 드는 모습은 이 세상의 모습이 아닌 것만 같다. 석양에 정신이 팔려 하늘을 놓쳐서도 안 된다. 하늘이 곧 금세라도 열릴 것 같지 않은가! 심장을 자극하는 트랜스 음악과 어디선가 풍겨오는 하쉬쉬 냄새, 롱티 한잔. 복합적인 취기에 몽롱해지는 정신을 풀어지게 둔 뒤 가만히 일몰을 바라보았다. 이 광경을 본 것만으로도 이 여정은 충분히 가치있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풀문 파티라는 걸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암스테르담바를 가기 위한 싸구려 방갈로를 2일 머무르고 본격적인 파티 준비를 위해 난 풀문 파티가 열리는 핫린 해변 근처의 도미토리룸으로 방을 옮겼다. 택시도 없고 오토바이 택시도 바가지를 씌우는 축제 인플레를 피해 걸어서 풀문 파티를 즐기기 위해서다. 1990년대 코팡안의 남부 린노쿠 비치에서 보름달이 뜬 밤에 작게 시작했던 이 파티는 점차 전세계 젊은이들이 모이며 세계 3대 파티의 반열까지 올랐다. 소위 놀 줄 아는 사람들의, 노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이다. '혼자' 파티를 즐길 자신이 없었던 나는 태국 여행 카페까지 가입하고 동행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길을 다니며 한국어가 들리나 귀를 쫑끗 세우고,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될 사람이 있나 눈에 불을 켜고 물색했다. 째깍째깍, 풀문 파티 날은 임박해왔고 나는 파티 전 날 마치 의식 처럼 모든 준비를 하나 하나 행했다. 네온 컬러의 옷을 사고, 얼굴에 낙서할 네온 컬러의 물감을 사고, 파티 분위기를 내 줄 큰 귀걸이도 하나 샀다. 이러한 파티용품들은 내게 파티 공간에서 이질적으로 걷돌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주문같았다. 마음이 훨씬 든든해졌다. 이제는 혼자이나 여럿이나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도미토리에 들어오니 두남녀가 짐을 풀고 있었다. 영국에서 온 남매로 솜털이 보송보송난 20대 초반의 아이들이었다. 남동생이 태국에서 일을 배우고 있어서 누나가 동생을 보러올겸 같이 파티에 왔다는 것이다.

"너, 혼자면 우리랑 같이 풀문 파티 갈래?"

"물론이지! 물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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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연연하지 않을 때 길이 생기는 이치를 다시금 경험한다. 파티 당일에 각자 코팡안을 즐기고 해질 무렵에 남매와 만나기로 했다. 핫린 해변은 바다는 별로 깨끗하지 않아 걸어서 혹은 오토바이 택시로 갈 수 있는 섬 곳곳의 숨겨진 해변을 찾아다녔다. 휴양지의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없던 나는 햇빛이 부서지는 에메랄드 바다의 반짝임과 평온함에 매료되어 몇 시간이고 바다를 응시하였다. 간지러운 바람에 열대의 나뭇잎이 살랑살랑 춤췄다. 몇 시간 뒤 있을 광란의 파티를 기다리는 사람답지 않게 잠잠하고 잔잔했다.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 저녁, 남매와 나는 숙소에서 만났다.

"근처에 파티 호스텔에서 예열을 하고 움직이자!"

태국에 몇 개월 살았던 남동생은 이미 이쪽 사정은 훤히 안다는 듯 능숙한 제안을 했고 우린 자연스레 따랐다. 그곳은 댄싱 엘리펀트 파티 호스텔이었는데 바도 겸하고 있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 바가 있고 그 가운에 길에서 어떤 사람들은 버킷 칵테일을 사서 쭉쭉 빨아 먹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치장을 하고, 어떤 사람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 역시 네온 컬러의 물감으로 서로의 얼굴에 낙서를 하고, 버킷 칵테일을 사서 마시며 춤을 췄다. 바에서 파는 버킷 칵테일은 독하고 달았다. 한 입을 마시자 마자 금방 취할거란 예감이 강렬하게 스쳤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몰리며 점점 흥이 올라 우리의 목소리와 춤사위는 더 거칠어졌다. 예열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핫린 비치로 나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사나운 빗줄기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곳에서 비를 피하며 술을 마시고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빗줄기가 약해진 시간은 거의 자정에 가까웠다. 파티 호스텔의 바는 야외지만 천막이 처져있어 그 때까지 보름달 조차 보지 못했다.

20170906_022049.jpg 유일한 풀문 파티 현장 사진....

핫린 비치로 나갔을 때는 이미 취기가 한껏 올라 눈 앞의 1m 외에는 모든 것이 뭉개져서 블러 처리가 되어있었다. 비틀거리며 자꾸 내 발을 먹어치우려는 모래사장과 싸워 도착한 풀문파티의 현장에서 내가 기억하는 건 눈살이 찌푸려지게 심하게 부비부비하는 남녀와, 헐벗은 여자들, 만취해서 바다에 오줌을 누는 남자였다. 신비하게 빛나는 보름달도, 아름다운 파도소리도, 심장소리를 닮은 트랜스 비트도 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아니, 보고 들었은지언정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 셋은 거기서 길지 않게 춤을 추고 버킷 칵테일을 하나 더 나눠마시고 숙소로 돌아왔다. 난 코팡안 풀문파티를 갔지만, 사실 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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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 그저 좋네여.
많이 헐벗었네요. ^^

풀문 파티에 기어나가서 찍은 유일한 현장 사진인데 굉장히 노골적으로 나왔어요.....

이비자, 고아와 더불어 세계 3대 스팟인 팡안이네요. 정말 궁금한데 글로나마 접하고 갑니다. :)

이비자, 고아, 코팡안이 3대 스팟이예요??? 고아도 다녀왔으니 이비자만 가면 3대 스팟 정복ㅋ

풀문파티 이름도 매력적, 비록 젠젠님 맘에 들지 못했지만 이미 파티는 다 한 셈이니 :D 파티가 그립습니다. 흐읍 ㅠㅠ

어떤 순간도 여행도 후회하지는 않지만, 좀 더 정신 붙들고 풀문파티를 즐기지 못한 게 아쉽긴 합니다....성대한 파티 같이 만들어보아요 ;-)

마지막 사진을 보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

ㅋㅋㅋㅋㅋㅋㅋ헐벗고 춤추는 택슨님 인증샷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