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가서 안주를 고르는 건 늘 어렵다. 우유부단하기 보다는 어떤 선택을 하든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상대에게 선택을 미루기 마련이다. 술은 다르다. 매서운 눈으로 메뉴판을 바라보고 나를 골라달라 손짓하는 술 중 지금 내 몸이 원하는 술을 찾아낸다. 약간의 주저함은 있을지언정 적확한 술을 고르는 시간조차 즐거움이다. 면세점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열장을 따라 쭉 늘어선 술들을 보며 할인폭, 호기심, 날씨 등을 고려하여 내품에 안길 단 한병의 술을 고른다. 나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술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2017년 퇴사를 하고 인도 맥그로드 간즈로 가는 길, 내 손에는 핸드릭스 진이 들려있었다.
맥그로드 간즈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도시로 티베트를 떠난 티베트 난민들의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처음 인도 여행을 했던 때 함께 맥그로드 간즈를 여행했던 J는 나보다 먼저 맥그로드 간즈에 도착해 그곳에서의 일상 루틴을 만들고 있었다. 혼자 마실 술이 아니라 J와 함께 마실 술이다보니 좀 더 고민이 됐다. 평소 우리가 이태원 바에서 진토닉 맛있게 자주 먹었던 기억에 진, 나름 두둑하게 퇴직금을 받았기에 평소에 먹어보지 않은 프리미엄 라인급의 진을 둘러보다 핸드릭스를 자연스럽게 집었다. 그 당시에는 위스키도 모르던 시절이고 진이나 보드카 같은 술도 마트에서 가장 저렴한 것들만 샀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꽤 큰 결단이었다.
맥그로즈 간즈는 라다크만큼이나 애증의 공간이다. 2007년 처음 티베트를 여행하고 맥그로드간즈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듬해인 2008년 3월 10일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이 되는 날, 티베트 승려들이 광장으로 나와 시위를 펼쳤고 중국 당국은 21세기라는 것이 무색할 만큼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했다. 우리가 발 디뎠던 곳에, 우리가 만났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피흘리고 울부짓는 모습에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손수 쓴 '프리 티베트' 피켓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갔다. 어떤 정치적인 목적도, 정치적인 색깔도 상관없이 티베트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만 가진 여행자들이 모여 유난히 꽃샘추위에 뼈가 에리도록 추운 날에도 날이 풀린 날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광화문에 모여 시위를 했다. 우리의 구호는 뵈랑쩬, 뵈갤로였다(티베트에 자유를, 티베트에 승리를) 그리고 우리는 그 빼앗긴 땅에 자유를 꿈꾸며 랑쩬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치열한 고민과 좁히지 않는 논쟁, 과격한 발언, 깊은 호흡 등을 오가며 우리는 2번의 프리티베트 영화제를 개최하고 홈페이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5년 째 그 외로된 싸움을 이어가다 그만 항복을 했다. '평화로운', '영적인', "샹그릴라" 같은 티베트에 덧씌어진 거추장스러운 수식을 떼고 티베트인의 고민을 똑바로 마주하고자 했지만 언젠가의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맥그로드 간즈의 날라리들을 붙잡고 "독립을 지지하고". "'똑바로 살아라."라고 꼰대질 하며 내가 원하는대로 그들이 살길 바라보는 나를 깨달았을 때 이미 더 이상 이 운동을 유효하지 않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활동이 전부 소멸되고 휘발된 지금에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열 명 남짓 되는 우리는 모두 정말 뜨거웠고 정말 진심을 다해 티베트를 위해 싸웠다는 거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맥그로드 간즈에 있을 때면 늘 깨어진 한조각 꿈을 멀리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다.
7월 맥그로드 간즈는 상상 이상으로 습했다. 살면서 처음 접해본 몬순이었다. 하루종일 비가 오는 날이 허다했고, 늘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해가 많이 나지 않아 덥지는 않지만 길거리를 걸으면 온몸이 끈쩍끈쩍해졌다. 몸에 열이 많고 더위를 많이 타서 무더위에만 약한줄 알았더니 습한 더위 앞에선 더 맥도 못추렸다. 한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한번 이상 샤워를 하지 않는 내가 끈끈이처럼 끈끈해져버린 몸을 견딜 수 없어 하루에 서너번 샤워를 했다. 달방으로 한달간 계약한 숙소 군데군데 하얀 곰팡이꽃이 만개했고 신발과, 노트북 가방을 점령하는 곰팡이 앞에서 나는 손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곰팡이로 어찌나 괴로웠던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습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최악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맥그로드 간즈에서의 한달은 평온하고 즐거웠다. 매일매일 새벽 3~4시까지 야근을 하며 혹사시키며 회사 생활을 버틴지 6개월.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다. 야외석이 있는 카페에 앉아 구멍난 하늘에서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조급할 이유없는 시간을 무자비하게 흘려보냈다. 많은 카페를 전전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카페는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커다란 창 밖으로 울창한 산이 보이고 맛있는 브런치를 내놓아 커피와 밥을 먹으며 하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무서울 정도로 내리치는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해가 뜨면 어슴푸레한 쌍무지개가 까꿍 나타나기도 했다. 당연한 자연의 순환을 순수하게 바라봤고 자주 감동했다.
그리고, 그 여름 비오는 꿉꿉한 맥그로드 간즈의 우기를 견디게 했던 것이 핸드릭스 진토닉이었다. 핸드릭스는 오이맛이 나는 진으로 오이를 썰어넣어 먹으면 그 감칠맛이 더 살아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든 진은 주니퍼 베리로 만들지만 핸드릭스 고유의 독특한 맛을 내기 위해 그 안에는 고수와 오렌지. 레몬, 카모마일, 엘더 플라워 등등 11가지 다른 식물과 장미와 오이를 사용했다고 한다. j와 나는 며칠 간 핸드릭스를 아껴두었다가 비가 미친듯이 쏟아져 밖에 나갈 수 없는 날 핸드릭스를 땄다. 우리가 즐겨먹던 이태원 바의 진토닉에 시나몬 스틱이 들어있었길래 먼저 시나몬 진토닉을 만들어보았다. 맛이 미묘하게 어긋나고 조화롭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오이를 길게 어슷썰기해서 토닉워터와 함께 섞었다. 시나몬과 만났을 때 부딪혔던 핸드릭스 본연의 오이향과 맛이 오이와 만나 싱그럽게 피어올랐다. 우기 때문에 습하고 우울한 기운, 뿌연 안개로 인한 몽롱함, 당장이라도 범죄가 일어나거나 귀신이 나타날 것 같은 스산함을 한 번에 걷어버리는 싱그러움의 극치였다. 오이무침, 오이소박이, 고추장에 찍어 먹는 오이에 불과했던 존재가 그 날 이후로 좋아하는 채소가, 가니쉬가 되었다.
*어제 핸드릭스를 먹다가 갑자기 쓴 글이라 횡설수설. 아마도 수정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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