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관심거리 풍수지리
나는 출가하여 30대 10년은 꼬박 공부만 했고, 그 다음 40대 10년은 강의를 병행하면서 공부를 했다. 올해 50세가 되어 되돌아보니 그동안 했던 강의들 가운데 가장 신나게 즐기면서 했던 강의는 ‘우리 땅’에 대한 강의였던 것 같다. 한국의 풍수지리학에 대한 강의는 매년 빼먹지 않고 했던 나의 자신 있는 인기주제 중의 하나였고 이 강의만 했다하면 나는 생기가 돌았고 대중들은 환호했다.
‘풍수학(風水學)’은 조선조의 선비들도 낮에는 준엄하게 성리학을 담론하다가 밤이 되면 몰래 숨어서 탐독했던 테마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현대인들 역시 겉으로는 미신으로 치부하며 무시하는 척 하다가도 금방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을 갖고 듣게 되는 것이 바로 풍수지리이다.
이러한 사실을 나는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에 불교교학과 선사상의 난해함을 헤쳐 나가느라 지칠 무렵인 학기 중간쯤이 되면 풍수학을 슬쩍 집어넣어 쉬어가는 시간을 마련하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강의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거나 간혹 찾아오는 잡설(?)의 욕구가 생길 때에도 갑자기 소환하곤 했던, 웬만해서는 실패하지 않는 나만의 흥행코드이자 힐링 레퍼토리가 바로 풍수학이었던 것이다.
➲ 한국사찰은 풍수학의 교과서
내가 풍수지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동양학을 전공했던 선친을 따라 유적답사를 다니면서 명문가(名門家)의 입지에 대한 설명과 문화유적들의 지리학적 설명을 많이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양적 풍수인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이미 좌청룡, 우백호 등의 용어는 알고 있었고 바람이 어떻고 물이 어떻고 하는 것을 귀담아 들을 줄 알게 되었다.
풍수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출가 전 2년 동안 전국의 명산과 대찰을 다니며 기도를 하면서부터였다. 우리 땅의 이름난 명산에는 반드시 천년 고찰들이 있었고, 오래된 큰절과 암자들은 모두가 어떤 좋은 기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출가 전에 매일 1000배를 하고 참선을 하면서 절이 더 잘 되는 도량이 있다는 것과 나랑 더 잘 맞는 기도처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명당이라 하더라도 다 같은 명당이 아니라 나한테 더 맞는 터가 있고 나의 부족함을 더 채워주는 인연처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천년고찰이 좋아서 절에서 살고파서 출가를 했고, 한국불교라는 것은 천년고찰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한국의 사찰 그대로가 풍수지리학의 교과서인 것이다.
➲ 천년고찰에 한국불교 진면목
한국불교를 전공하게 되면서 풍수지리학에 대한 연구는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더욱 절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발길 닿은 곳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창건’, ‘의상대사(義相大師) 창건’이라는 말이 안내표지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절을 홍보하기 위해서 고승들에 가탁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러한 생각들이 모두 책상머리 불교공부의 잘못된 판단임을 깨닫게 되었다.
원효나 의상이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직접 절을 짓는 불사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국을 누비다가 좋은 명당터를 만날 때마다 며칠씩 정진했던 곳에 절이 들어선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안양 삼성산(三聖山)의 삼막사(三幕寺)는 원효, 의상, 윤필의 세 도인이 세 군데 여막을 치고 정진한 곳이었다. 이곳은 세 분이 불사를 일으켜서 오늘날과 같은 대가람을 창건했던 것이 아니라 전국을 다니다가 이 곳을 만나 수행 정진했던 장소에 자연스럽게 절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곳이다.
관음기도처로 대표적인 곳인 여수의 향일암(向日庵)과 남해 보리암(菩提庵)도 원효와 의상이 수행했던 곳이며, 구례 사성암(四聖庵)도 원효와 의상을 비롯하여 도선국사, 진각국사가 수행했던 장소였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고승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좋은 명당터에서 수행을 하고 그곳에 흔적을 남겨 좌표를 찍어줌으로써 오늘날의 불국토를 완성해온 것이다.
전국을 다녀보면 의상대(義相臺)와 의상봉(義相峰)이 특히 많은데 아마도 의상은 높은 절벽에서 수행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상이 직접 주석하면서 도량창건에 정성을 들인 곳으로는 한국의 화엄종찰인 영주 부석사(浮石寺)가 있는데, 이 곳의 창건에는 용으로 변하여 불사를 도운 선묘낭자의 설화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원효는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잠시라도 함께 기거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받아들여 소요산 자재암(自在庵)으로 모자를 불러들였다. 원효가 잡은 자재암이라는 명당을 지난 겨울에 처음 가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원효가 얼마나 도인인지는 그가 남긴 저술만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잡은 터가 더욱 생생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원효가 요석·설총 모자와 함께 기거하려면 경주 근처도 아니어야 했을 것이며,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했을 것이다.
소요산 자재암은 지금 찾아 가더라고 계곡이 깊고 사람이 살 것으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편벽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한 깊고 깊은 장소에 천혜의 명당터가 숨어있었고 추운 겨울인데도 법당에 앉아있으면 조금도 춥지 않았다. 이러한 명당혈(明堂穴)을 잡은 뒤 원효는 요석과 설총을 불러 함께 온정을 나눴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천년고찰에는 역대 고승대덕의 풍수학적 안목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도선국사 이전 한국형 자생풍수
일반적으로 한국불교사에서 한국형 자생풍수(自生風水)의 시조로 도선국사(道詵國師)를 꼽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론적인 측면까지 완비한 자생풍수는 도선국사가 시작했지만, 오대산의 문수성지와 통도사 적멸보궁 등지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자장율사(慈裝律師)와 백두대간 전반에서 수행하여 사찰을 창건하게 만든 원효와 의상에서 이미 한국형 자생풍수는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풍수지리학에 대한 이론서를 남기지 않았다고 하여 풍수적 안목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하다면 자장, 원효, 의상 등의 풍수적 혜안은 한국형 풍수학을 이미 시작한 것이며 한국형 자생풍수는 한국불교의 시작과 함께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한국불교 대승풍수와 공익풍수
한국적 불교풍수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소승풍수가 아닌 대승풍수이며, 사익풍수가 아닌 공익풍수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풍수지리가 매우 중시되었다. 궁궐과 왕릉, 서원과 향교, 문중과 향리에 이르기까지 풍수학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부분의 소송이 묏자리 문제 때문에 발생한 산송(山訟)이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풍수학이 자신의 문중과 가족의 이익중심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병폐가 오늘날 풍수지리학을 미신이나 욕망의 영역으로 치부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불교풍수의 특징은 가장 좋은 명당터를 택하여 모든 대중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법당과 기도처, 선원과 수행처로 활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만약 최고의 명당인 혈처(穴處)를 스님들만이 생활하는 요사채로 만들어버렸다면 일반 신도들은 출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대 큰스님들은 백두대간의 최고의 명당터들을 찾아내어 승속을 구분하거나 부귀빈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부대중이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가람을 배치해 두었다. 도량에 상주하는 스님들도 최고의 명당터인 법당에 대중들과 같은 시간에 들어가서 함께 기도하고 정진했던 것이다. 최고의 장소를 나만이 차지하지 않겠다는 ‘대승풍수(大乘風水)’와 ‘공익풍수(公益風水)’의 정신은 불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대승보살행과 요익중생의 현실적 발현인 것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북방불교를 가르쳤던 로버트 지멜로 교수는 중국 당송(唐宋)의 선(禪)의 황금시대를 보고 싶다면 한국의 천년고찰들을 찾아보라고 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최고의 명당에 자리 잡은 우리의 천년고찰들이 보여주는 입지와 배치에도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불성사상과 만민평등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처럼 한국의 사찰들은 좋고 나쁜 것으로 분별될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땅을 모든 대중들이 평등하게 함께 사용하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조용히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