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생 황중연
그, 아름드리나무로 깊이 뿌리 내리다.
- 열여덟 살, 6. 25에 참전
아흔을 목전에 두었다. 1932년생 89세. 내 고향은 옥천 수북리다.
태어난 그 집에서 사뭇 살고 있다. 내 고향 수북리는 낚시꾼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 다니기 전 까지 나도 대나무 가지로 물고기 낚시를 했다.
손맛이 맵지 않아도 물 반 고기반이라 어설픈 손놀림에도 고기들이 몰려들었다.
시골 살이 하는 사내 녀석에게는 손에 꼽을만한 락(樂)이었다.
나는 8남매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나 귀여움 많이 받았다.
큰 형님 외에 줄줄이 누님 5명 밑에 아들로 태어나서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았다.
까마득한 기억 속에는 누님 등에 업힌 여섯 살 무렵의 내가 희미하게 보인다.
동이면 감은골에 사립학교가 있었다. 학교를 못 다니는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인데 유치원생 자격으로 나도 누님이랑 같이 또랑을 5번이나 건너 그 학교를 다녔다.
냇가를 건너는 다리도 없어서 순례 누님 등에 업혀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누님의 등은 솜이불에 얼굴 묻은 듯 보드랍고 향기로웠다. 어머니 등은 단단한 거북껍질 같았다. 매일 종종 걸음으로 집안을 건사하시느라 무딘 근육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가갸거겨 국문 배우는 재미에 빠질 무렵 죽향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6.25 나던 해 고교 2학년이었다. 위급할 때라 청년들을 무조건 끌고 가는 시국 탓에 동네 형님을 따라서 부산으로 피난 갔다. 부산에 가 있는 동안 군대 가면 살아오기 힘들 것 같아서 경찰에 자원입대했다.
그 때가 열여덟 살이었다.
경찰로 복무한 기록이 6.25 참전 용사로 인정받게 되어 참전 용사회 회장도 맡게 됐다.
대학교는 홍익대 영문과에 진학했는데 대전 성남동에 전시대학을 운영 중이었다. 홍익대 2학년 다니다가 가두모병(길거리 모병)으로 끌려갔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마치고 헌병학교로 갔다.
팔공산 경비 수색대로 서울이 복귀되면서 북한산에서 한동안 있다가 강원도 화천 등을 다니면서 잔류병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앳된 얼굴이 그대로 인 채 전장(戰場)을 누비고 있었다. 시절을 탓할 수밖에.
5년 동안 50개월 만기제대를 했다. 일등병으로 강등되는 군복무 비화도 갖고 있는데 후임병 괴롭히는 선임하사를 혼내주고 1주일간 영창을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털웃음 나오지만 불의와 타협 못했던 피 끓는 시절이었다.
만기 제대날짜 5개월 전에 휴가 나와서 12월 5일 날 결혼하고 집에 있는데 군에서 편지가 왔다.
결혼했으니 오지 말라고 집으로 제대증을 보낸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부대에서 신임 받았던 만큼 보상받았다. 결혼하고 5개월 후에 제대증이 왔다. 제대 후에 집 농사 돕고 소 풀 뜯어주면서 평범한 시골 청년의 24시간을 살고 있었다.
- 추억의 뜰은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신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의 미처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었던 아픔, 눈물, 수고의 기억들을 담게 됩니다. 앞선 세대의 삶이 있었기에 지금 세대가 존재합니다. 추억의 뜰의 기록이 누군가의 생애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담겨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