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7 다극적 국제질서에서 칩4동맹과 기술패권 문제 >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국제정치적 구도이다. 국제정치적 구도를 형성하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경제적 요소다. 세계가 자유방임적 경제질서인가, 보호무역의 경제실서인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인가에 따라 가치관도 바뀐다. 이말은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떤 가치도 상대적이며, 가치의 상대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경제질서이다.

미국중심의 일극적 세계질서에서 다극적 세계질서로 넘어가면,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가치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일극적 세계체제를 유지해왔던 기재들도 모두 효용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중심의 일극적 세계질서를 담보할 수 있었던 기반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였다. 다극적 국제질서로 변하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가능하게 해준 각종 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게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말은 하는 이유는 다극적 질서로 넘어가면 원천기술이라는 것이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서 세계각국은 각각 분업적 역할을 했다. 미국은 원천기술을, 일본은 소부장을, 한국은 이를 바탕으로 한 중간재를, 중국은 이를 바탕으로 최종상품을 생산했다. 부가가치는 위에 있을수록 높다.

더이상 이런 질서가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은 중국이 최종상품 생산이라는 역할을 넘어 거의 전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고 있으며 머지않아 미국의 원천기술을 넘볼 수 있는 위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며칠사이에 시장과 기술을 둘러싼 논의가 보도되었다. 12월 16일 미국의 빅터 차는포린 에페어지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의 무역보복에 대항해 한국, 미국, 일본, 호주가 공동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의 이창용 산자부 장관은 같은 날 현대경제연구소와 한국경제신문이 개최한 포럼에서 칩4동맹에 참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주저하던 한국이 입장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어떤 계산으로 칩4동맹에 가입하겠다는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그 결정이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정부가 칩4동맹에 가입하고 안하고를 결정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정부가 기업의 활동에 어느정도까지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정부가 기업의 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타당하려면 미국은 칩4 동맹을 주장하기전에 먼저 자국의 애플이 중국에서 먼저 철수를 시켜야 한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은 중국과 교역을 하면서 한국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반도체 문제는 한국의 손과 발을 묶으려 한다. 한국정부가 칩4동맹으로 반도체 업체들의 활동을 제약하려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제공되어야 한다. 칩4동맹으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당하게되는 손해를 정부가 메꾸어 주어야 한다. 정부가 손실을 메꾸어주면 그 돈은 모두 세금에서 나간다. 결국 칩4동맹으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손해를 보게 되면 한국의 전국민이 손해를 보게 된다.

칩4동맹으로 한국 기업이 당하게 될 손해는 치명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마치 일본이 플라자 합의를 통해 국력이 꺽인 것 처럼 한국은 이번 칩4동맹 가입을 통해 국운이 기울게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칩4동맹과 플라자 합의는 매우 유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칩4동맹에 가입해야 하겠다고 판단하게 된 것은 아마도 미국의 원천기술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기술패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명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당연하게 생각되는 원칙들도 국제정치적 구조가 변하면 무의미하게 바뀌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술패권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서 의미가 있는 말이다. 기술패권과 원천기술이라는 것도 신자유주의적 질서에서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패권을 유지해온 국가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개념인 것이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붕괴되면 지금 통용되던 원칙과 질서도 함께 무너진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그 생명을 다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교의가 더 이상 미국의 이익을 보장해주지 않고 오히려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의 원천기술이 중요하니 미국편에 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미국이 요구하는대로 중국을 버리고 미국의 원천기술에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역을 하기 위한 상품 생산이 어렵다는 주장을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난무하는 것은 세계질서의 변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다극적 질서의 구축, 즉 그리하여 보호무역체제로 넘어가면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원칙이 헌신짝처럼 버려질수도 있다. 이미 자유무역을 위해 만들어진 WTO자체가 무력화되어 버린 상황이다. 지적소유권, 특허권 이런 것들도 국제정치 질서의 변화와 함께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일 네덜란드의 ASML이 EUV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않으면, 중국은 그동안 원칙이라고 여겨왔던 지적소유권과 원천기술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완전하게 무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미국의 지적소유권과 원천기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도용해 버릴 지도 모른다. 중국은 EUV장비를 카피해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도 있다. 미국이 항의해도 그냥 무시해 버릴 것이다. 그럴때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중국은 이미 가장 낮은 가격으로 공산품을 제공하고 있다. 시장에서 낮은 가격의 저사향 상품과 고사향의 높은 가격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국과 서구를 제외한 시장은 고사양의 높은 가격을 구입할 이유가 별로 없게 될 것이다. 빈부격차의 확대로 대중들의 가처분소득이 별로 없어서 고사양 높은 가격의 상품을 구매할 여력이 별로 없다.

상품을 살 시장이 없는데 고사양 고가의 상품을 아무리 만들면 뭐하겠는가? 시장을 상실하고 미국이 아무리 초고사양의 첨단군사무기를 만들어 내면 뭐하겠는가?

국제정치적 질서가 바뀌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원칙들과 가치들이 의미를 상실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재삼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이 미국의 원천기술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시장이다. 아무리 원천기술이 있어도 시장을 상실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시장이 기술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다가 오고 있다.

다극적 질서에서 시장은 경제적 효율성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한국이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내면 시장에서 잘팔리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이 좋은 국제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시장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의 시진핑은 70여개의 개도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앞으로 70개국의 개도국에 상품을 수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칩4동맹과 기술패권은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 혹은 단극적 국제질서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보호무역으로 바뀌고 다극적 국제질서로 변화되면 이런 개념들은 의미를 상실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다극적 세계질서가 형성되면 기존의 원칙이 아무런 작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생산기술도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가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무엇이 어떻게 바뀔지도 알 수없다. 분명한 것은 기존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더 이상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이 칩4동맹에 가입한다고 한다. 한국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시점을 목도하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우리 세대까지는 어찌 어찌 살아왔으나 다음 세대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문제는 다음세대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런 국제정치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자신들의 개인적 삶의 영역에만 관심이 머문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키워 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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