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 地理志(고려지리지)에
豆滿江 外(두만강외) 七百里 先春嶺 下(7백리 선춘령 하)에
「至此爲高麗之境(지차위고려지경)」 七字(7자)를 새긴
尹瓘의 碑(윤관의 비)가 있다 하니,
尹瓘의 開拓(윤관의 개척 )이
李朝 金宗瑞(이조 김종서)보다 遠過(원과)함을 보겠다.
尹瓘의 成功(윤관의 성공)은
郞徒의 欣躍(낭도의 흔약)하는 바이나
儒徒의 不樂(유도의 불낙)하는 바이라.
出兵의 初(출병의 초)에도 벌써
儒臣 金緣 等(유신 김연등)이 上疏(상소)하여
出兵을 反對(출병을 반대)하더니, 밋(이윽고)
九城을 設(9성을 설)한 뒤에 女眞(여진)이
그 失地를 恢復(실지를 회복)하고자 번갈아 侵入(침입)하니,
我軍(아군)이 비록 連勝(연승)하나 數年(수년) 동안에
人夫의 徵發(인부의 징발)과
財物의 損害(재물의 손해)가 적지 않은 것은 免(면)치 못할 일이라.
儒徒(유도)들이 더욱 이를 機會(기회)삼아 攻駁(공박)하니,
睿宗(예종)이 마침내 初志를 堅守(초지를 견수)하지 못하고
九城을 撤(9성을 철)하여 女眞에게 還歸(여진에게 환귀)하였다.
< 출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독립기념관>
至此爲高麗之境(지차위고려지경): 여기까지 고려의 경계이다.
遠過(원과): 멀리 미치다
欣躍(흔약): 기뻐서 뛰다
上疏(상소): 임금에게 글을 올려 주장함
攻駁(공박): 문제삼고 공격함
撤(철): 없애다
(옮기면)
고려지리지에
두만강 밖 7백리 선춘령아래)에
「여기까지 고려의 경계이다.」 7글자를 새긴 윤관의 비석이 있다 하니,
윤관이 개척한 땅이 이조 김종서보다 멀리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윤관의 성공은
화랑사상을 따르는 자들은 기쁘게 생각하지만
유학자들은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출병초기에도 벌써
유학을 따르는 신하인 김연등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출병을 반대하더니,
밋(이윽고) 9성을 건설한 뒤에
여진이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번갈아 침입하니,
아군이 비록 계속 이겼지만 수년 동안에
인력을 동원하고, 재물의 손해가 적지 않은 것은 피하지 못할 일이라.
유교도들이 더욱 이를 기회삼아 문제삼고 공격하니,
예종이 마침내 처음 먹었던 뜻을 지키지 못하고
9성을 출수하고 여진에게 다시 돌려줬다.
< 출처: 조선역사상일천년래 제일대사건>
언제나 선택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9성을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1찍일까, 2찍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관심밖일까?
이재명이니 윤석열이니가 중요한게 아니고
9성에 관련된 사안을 결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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