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재즈 연주

소리 없는 재즈 연주
===============
_02/02/2025





비가 오는 토요일이었다. 아침이 온 줄도 모른 채 계속 잠을 청했다. 요즘 취침 시간이 새벽 3시경으로 아주 늦어졌다. 하루를 마치기 전에 속에 있는 단어들을 꺼내어 배열하고 정리해야 비로소 나의 할 일이 끝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몸의 기운을 믿는 편이라, 생활 패턴이 기운 따라 흘러가게 둔다. 최대한 잘 먹고, 계속 운동하고, 할 수 있는 한 잠을 보충하며 개운하게 지낸다. 그러면 잠잠해지는 바다처럼 다시 바람직한 루틴으로 돌아간다. 금방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전날 저녁,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자신의 공간에서 개인전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게 전시 소개글을 써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음날 오후 늦게 그녀가 운영하는 비건 비스트로 카페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오픈 시간 전 미리 가서 그림을 살펴보고 거기서 글을 쓰고 책을 읽다오면 너무나 완벽한 토요일이 될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장화를 꺼내 신고 30분 정도 천천히 걸어 친구네 가게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친구를 만나는 날의 대부분은 항상 비와 함께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친구가 나를 붙잡고 여기저기 붙인 그림을 신나게 보여준다. 처음 든 생각은, 이미 이 공간이 친구의 그림과 색감을 모두 닮았다는 것. 그림의 연장선에 이 공간이 있는 것 같았고, 이 그림들을 품기 위해 공간이 존재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책상 위에 수백 개의 작은 그림들이 있었고, 그녀는 빈 공간 곳곳에 그림들을 꽉꽉 채워 다닥다닥 붙이고 싶다고 했다. 함께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녀가 현재까지 계획한 전시 구상을 이야기해주었다. 작품 속에서 친구의 영혼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공간을 가져볼 수 있을까?

이곳의 이름은 "Home." 이 근처에 첫 번째 공간이 있었고, 여기는 두 번째 Home이다. 이번 주 토요일까지만 운영하고 세 번째 Home은 해운대 달맞이 쪽에서 새로 시작한다고. 친구의 아티스트명은 "Inus". 그래서 이 공간에서 마지막이 될 전시의 이름은 "홈 이너스(Home in Us)"다.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작품 이야기, 근황 토크를 두서 없이 이어가다가 손님 테이블이 조금씩 채워질 무렵 나는 글쓰기 시간으로 슬슬 건너갔다. 빈 메모장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적었고, 친구가 쏟아낸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두 시간 정도 흘렀다. 나는 책을 읽다가 일기를 쓰다가 하며 소개글 초안을 완성했다. 메시지를 보내두었다는 말에 친구가 신이 나서 곁으로 왔다.

⎯ 지금 읽을까, 아니면 나중에 집에 가서 읽을까? 뭐가 더 재밌지?
⎯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지.
⎯ 그러면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읽을래!

와인을 마시고 책을 읽고 있는데, 요리를 마친 친구가 도저히 궁금해서 안되겠다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긴장감도 함께 들어서 나는 괜히 작품을 한번 더 보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뒤 돌아오자 친구가 말했다.

⎯ 채린, 진짜 너무 마음에 드는데, 그런데...

앗,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구나. 최선을 다해서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글은 분명 채린이 써준 글인데, 1인칭으로 적혀 있어서 꼭 내가 적은 것처럼 보여. 이 글이 채린이 쓴 글이라는 걸 어떻게 명시하면 좋을까?

생각하지 못한 포인트였다. 친구의 물음에 답을 하면서 내가 글을 쓴 방법과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지금껏 이렇게 글을 쓰자마자 타인에게 설명한 적은 없었다. 혼자서 글을 쓰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깥으로 표현되니 새롭게 느껴졌다. 즉흥적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들도 이런 마음과 비슷할까? 그래서 잊기 전에 이 과정을 기록해두고 나중에 재밌게 활용해보고 싶었다. 친구에게 설명한 이 날의 실시간 글쓰기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 이너스의 그림은 어쩌구 저쩌구, 마치 평가하듯 설명하는 글보다는 내가 이너스가 되어 1인칭으로 써야겠다.
• 이너스는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어떤 식으로 작품을 보여주고 싶을까.
• 주요한 단어들과 그와 관련된 단어들을 여백에 적는다.
• 그 단어들을 조합해 순서 없이 떠오른 문장들을 일단 적는다.
• 중간중간 찾아와 마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 속에서 필요한 단어를 찾기도 한다. (도자 이야기가 나왔고, 거기서 목적어 '공간'에 붙일 '빚다'는 동사를 건져올렸다.)
• 전제 조건이 될 만한 큰 그림을 찾는다. (나는 '이너스 안에 있는 영혼이 이너스를 도구 삼아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 미리 적어둔 문장의 순서를 맞춘다.
• 그 다음 문장으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 문장을 생성한다.
• 라임을 넣을 수 있는 요소를 살린다.
• 입으로 읽어보며 최종적으로 정리한다.
  
  
  오직 친구를 향한 재즈 연주. 이 문장은 어떻게 나왔고, 저 문장에서는 어째서 이런 표현을 썼는지 친구의 물음이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답을 하다보니 우리의 대화는 또 깊어지고 풍부해졌다. 한 인간을 이해하고 그 영혼을 이해하기 위해 귀와 마음을 활짝 여는 행위. 나의 깊은 집중을 읽어준 친구가 행복해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더 많이 읽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로 달구어졌다. 무엇보다 글은 삶에서 나오니, 좋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HOME IN US

각자의 몸에는 오랜 영혼이 머문다.
서서히 물드는 옷감과 같이, 영혼은 시간을 적시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도구 삼아 자신을 바깥으로 드러낸다.

나의 유희는 선과 색, 그리고 춤과 홈.
여기의 멈춤은 저기의 춤이었고,
저곳이 멈추면 이곳의 몸짓이 계속되었다.

나의 삶이 켜켜이 쌓일 동안 영혼은 만 가지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오래 전에 경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손끝에서 찰랑이는 세계가 종이로 옮겨갔다.

그렇게 생산된 원형(原形)의 유희들을 이 공간에 모았다.
구석구석 손이 닿은 모든 곳에 작은 우주가 맹렬히 호흡하고 있다.
그 세계가 내가 빚은 공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를 바란다.

이번 홈에서의 마지막 춤,
다음 홈으로 향하는 새로운 꿈.
이 집에 초대 받은 이가 자신의 우주를 유영하며 오랜 기억 속으로 흐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