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일기#_00] 21살의 산티아고,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in hive-195521 •  4 years ago  (edited)

산티아고를 가기 전, 나는 충무로의 한 인쇄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고, 여행을 떠나고, 술을 먹는 시기에 나는 주 6일 근무와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에 지쳐있었다. 그때는 깨달지 못했지만 나는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같이 울고, 남을 질투하고, 나 자신을 깎아내리며 살았다.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는 내가 너무 게을러보였고 한심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마저 무능해 보여 나 스스로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러다 만난게 산티아고였다. 어머니가 내게 산티아고를 권했다. 그동안 일 했던 돈으로 산티아고를 가보면 어떻겠냐며 등을 떠밀었다. 그때 마침 진 교수님의 출판 기념회에 가 난생처음으로 산티아고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고된 길이었고, 너무 멀었다.

사회 초년생에게 오백만원이란 목숨보다 귀했다. 죽기 살기로 모은 돈, 오백만원. 이 돈으로 자취도 할 수 있었고, 아이패드나 노트북을 새로 하나 구입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계속 저축을 넣어 더 큰 일을 도모하는데 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속에선 산티아고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일하던 팀장님께 '저 퇴사하고 산티아고 갈거에요.' 말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날 보며 웃었다.

'나는 3억을 준다고 해도 안 갈것 같은데. 차라리 관광을 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퇴사했고, 산티아고 행 티켓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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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이라 인천공항은 한산했다. 티켓을 발행하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눈앞에 두고 헤메기도 여러번이지만, 그럼에도 설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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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그랬다. 힘들고 고될 것을 알아도 첫 시작, 첫 발걸음을 내딪는 그 순간을 기대했다. 남은 3억을 줘도 안 간다는 그 길을, 800km라는 그 긴 대장정을 떠나며 나는 정갈하게 유니폼을 입은 공항 직원들을 보며, 낯선 기내식을 먹으며, 내 옆에 앉은 한국인들이 익숙하게 비행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설랬다.

내 첫 비행이자, 가장 거금을 들인 여정이었다. 비행기에 몸을 싣으면서도 나는 계속 의문을 품었다. 산티아고에 갔다 온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질까? 내가 달라질까? 수많은 의문을 품은 채 비행기는 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그때는 몰랐으나, 내 인생을 뿌리째 바꿀 비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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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썼어요. 젊은 작가의 기질이 보입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글을 쓰다보면 진짜 작가로의 길을 가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 글을 여기에서 마치면 책 발간도 생각해 봐요.
도와 달라면 제가 도와 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책 발간을 목표로 열심히 뛰어볼게요😘😘 교수님 덕에 항상 많은 것을 배우는것 같아요💕💕

인생을 뿌리채 바꿀 여정이 기대됩니다.

감사해요! 앞으로도 열심히 뛰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