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동에서
무려 2004년, 나는 해외연수의 꿈을 갖고 역삼역에 5월 한 달 동안 영어수업을 들으러 왔었다. 그 무리 중 한 명은 운명을 달리했고, 한 명은 미국 교수가 되었고, 한 명은 초고속 승진을 했고, 한 명은 나에게 단단히 삐졌다.
20년이 흐르고 그 곳에 다시 가게 되었다.내 기억에 역삼동은 강남이라 하긴엔 주변이 낡고 그런데 호텔은 으리번쩍했다. 지하차도가 어지럽고 주변은 술집 조명으로 번쩍거렸다. (주로 퇴근 후 갔으니)
오늘 대낮에 간 역삼동은 그 때와는 많이 바뀌기도 했고 시간이 달라서 마치 처음 온 곳 마냥 신기했다.
내가 촌구석에서 사람과 그닥 접촉 없이 살아서인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젊은 회사원들을 보니 두근거렸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목에는 하나 같이 목걸이를 걸고 티셔츠에 면바지로 소탈한 차림들이다.
식당과 카페는 직장인들로 꽉 찼다.
1시간 남짓 사이 그들은 끼니를 해결하고 음료를 사 들고 공원에 앉아 수다를 떨고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 모습들은 잡지의 컷 마냥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파노라마로 보여주니 난 티비 속 세계를 보는 촌놈 마냥 즐겁다.
나는 학교 때 '문득 내가 여기에 앉아서 지루하게 보내는 시간에도 어디선가는 누군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잠을 자기도 횡단보도에서 넘어지기도 하겠지'라는 공상에 빠졌는데 여기는 그 또다른 세계의 한 페이지다.
친구는 이 주변에 가게를 해볼까 생각하는 중이라 사람들이 어떤 일에 주력하나를 보며 다니니 더 재미있다.
한 카페에 들어갔다.
이 카페는 여성적인 장식이 없고 모두 직선적이고 심플하고 기능에 충실한 모양을 했다.
모던도 프로방스도 미드센추리 풍도 아니다.
그냥 기능적 카페다. 사람이 모이고 음료를 마시고 이야기를 할 장소 그 자체다.
공간이 넓고 시원하고 남성적인데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남자였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무리도 모두 남자들이다.
홀이 벅적하게 떠들고 웃던 사내들은 30분 안에 홀연히 사라진다.
남자들도 커피 좋아한다. 그들도 수다는 즐겁다.
단출한 남자들의 공간이 신선하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그 기능이 있고 자체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를 사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을 한 남자들. 그것의 아름다움이 있다.
내가 학교다니던 90년대 남자들을 문득 생각해 본다. 남자들은 키가 그닥 크지 않고 마른 애들이 많았고 타지 생활하는 그들의 등은 한 부분이 빈 듯한 외로움과 어린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애들은 이제 모두 중년이 되어서 그 때 그만한 아이들을 키운다. 그들도 아이들을 보며 자신의 청춘을 떠올릴 때가 있겠지.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은 자극을 준다.
새로운 생각과 더 많은 옛 생각도 두레박처럼 퍼올려진다.
밖에 잠깐 다녀온 개구리는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