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빳사나명상수행일지] 0일 차 - 보라색 캐리어

in hive-196917 •  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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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거대한 28인치 보라색 캐리어였을까? 전날 수업을 마치고 12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점심부터 아침까지 쫄쫄 굶어 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늦잠을 잤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작은 캐리어는 1박 2 일 용이라고 입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시계는 기차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짐을 싸서 나갈 만큼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집 앞 사거리 건널목을 건너며 이 보라색 캐리어를 선택한 게 크나큰 실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그렇지만 돌이킬 수 없다. 사람이 가득 찬 기차역에서 기차 번호를 찾는데 이상하게도 승차권 내역에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심장이 덜컥 밑으로 크게 진자 운동을 하고 마구 울렸다. 과거 예매 내역을 누르니 어제 날짜 기차표가 보였다. 기차 탈 시간까지 5분이 남았다. 마음이 좀 쓰리지만, 기차표를 새로 예매했다. 아주 크게 속으로 ‘이 바보 멍청아!’라고 책망하고는 곧이어, ‘아니다. 자리가 남아 있고 그래도 5분 전에 발견한 게 어디야. 괜찮다.’고 위로했다.



정신없이 예매한 좌석은 정확히 중앙 통로에 위치했다. 앞뒤로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내 옆에는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한 분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계셨다. 캐리어를 둘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맨 뒤쪽에 캐리어 공간이 있지만 너무 멀어서 거기에 캐리어를 두기엔 조금 불안했다. 없어질 확률은 희박하지만 혹시나 없어지면 골치가 아프다. 이 명상 코스에 꼭 참여하겠다는 굳은 마음이 있었다. 캐리어가 너무 커서 좌석 안쪽에 둘 수 없었다. 위 짐칸에 올리기엔 힘도 없고 짐칸도 약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통로 쪽에 불안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눕혀 놓았다. 복도를 반이나 막았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내내 긴장한 탓에 피곤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때 한 아저씨가 신음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봤다. 복도를 지나다가 캐리어에 부딪친 것 같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음악을 듣던 중이라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화가 나신 것 같았다. 바짝 엎드린 죄인 모드로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다가 이내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 후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녔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죄책감을 가득 안고 눈치를 보며 캐리어가 있다는 걸 티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한 아저씨가 아주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짐을 이런 데다가 두면 어떡해요?’ 따지듯이 물었고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캐리어를 번쩍 올려 위 짐칸에 올려주셨다. 선반에서 1/3이나 튀어나와 있었지만 올라가긴 올라갔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쪽팔리기보다는 감사했다. 한참 내게 뭐라 뭐라 말했고 나는 내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쁜 의도는 아니셨는지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며 창피하고 불안해했으나 괜찮다고 잘됐다고 위로했다. 약간의 홀가분함과 함께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저 캐리어가 굴러 떨어지면 어쩌지? 나는 언제라도 일어설 준비를 하며 캐리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캐리어를 내가 내릴 수 있을까?... 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어떻게 서든 결국 내리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올려준 아저씨도 같은 불안을 느꼈는지 내게 와 큰 소리로 말했다. ‘짐 내리기 힘들면 역무원에게 도와달라고 하세요.’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과도하게 친절하셨다. 영 내가 못 미더웠는지 직접 역무원 한 분을 모시고 내 자리로 오셨다. 다시 사람들이 날 쳐다보았다. 전주역까지 간다고 하니 역무원이 자기는 하필 그 전역에서 내려야 하기에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도 불안했는지 다시 한번 역무원 분이 오셔서 뒷 칸에 방송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께 대신 도움을 요청하라고 당부했다.


캐리어 덕분에 5번이나 사람들에게 불편을 초래하고 걱정을 끼쳤다. 역시 보라색 캐리어를 가져오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을 가며 맨 앞 좌석이 텅텅 빈 걸 확인하고 너무 그 자리에 가서 앉고 싶었다.




전주역에 가까워지자 노신사 분과 앞 뒤의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렸다. 다행이었다. 다칠 사람이 없으니 시험해볼 겸 캐리어를 내려보았다. 싱겁게도 가뿐히 내 힘으로 캐리어를 내렸다. 소란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내렸고 남은 사람들은 이 캐리어에 관한 사연을 하나도 몰랐다.


얼른 명상 센터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명상 센터로 가기 위해 전주역에서 택시 카풀을 하기로 했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분들의 짐은 나에 비하면 단출했다. 소형차 택시를 볼 때마다 저것만은 아니길, 부디 내 거대한 캐리어가 들어가길 마음 졸였다. 다행히 트렁크에 캐리어가 딱 들어갔기에 너무 기뻤다.




사무실에서는 핸드폰을 맡기는데 갑자기 핸드폰 전원 버튼을 어떻게 끄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관리자 분께 비행기 모드로 두면 안 되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 네이버를 검색하고 나서야 전원을 끌 수 있었다.







배정받은 숙소에 짐을 정리하며 알았다. 이렇게 거대한 캐리어를 들고 왔는데 기껏 빨아 놓은 후리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첫 명상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내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는 바람막이 점퍼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명상 홀에 입고 들어갈 수 없다는 퍽 곤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거의 여름에 가까운 날씨여서 주로 반팔을 챙겨 왔는데, 이곳은 바람이 많이 불었고, 특히나 가장 오래 머물 명상 홀은 온도가 더 낮았다.





‘…아… 망했다.’

‘….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영혼이 탈곡되어 지친 몸으로 9:30분 취침시간에 맞춰 잠이 들었다.



( 생략했지만 물론, 기분 좋은 일도 있었다.
명상 코스에 도착한 순간, 산책로를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택시에서의 우울한 기분은 자취를 감추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더 깨끗하고 안락하고 컸다. 원룸 정도 크기에 옷장이며 옷걸이며 서랍장이 있어 아주 편리했다. 미리 샤워를 하고 나와서 공용 드라이기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세상에! 우리 집에 있는 드라이어보다 바람이 강력하고 시원했다. 오기 전에 식사가 꽤 맛있다는 글을 읽었었는데 저녁은… 어느 맛집보다도 맛있었다! 아니, 느끼한 거 싫어하고 담백한 간을 좋아하는 내게 이렇게 취향을 저격한 식단은 없었다. )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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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읽히면 좋겠네요. 명상 이야기 너무 좋아요.

우와 이런 진심 담긴 응원이라니 감동했어요🥹
감사드려요!

제가 명상하러 가는 기분입니다. 너무 생생하게 잘읽었어요 ^^ . 근데 정말 맘 졸이셨겠어요 ~

해피드림님 감사드려요ㅋ 진정하려 애썼지만 어찌나 후회를 했는지 몰라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