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

in hive-196917 •  4 years ago  (edited)

꿈을 꿨다. 거주지를 옮긴다는 의미로는 생전 처음으로 시골동네를 떠나 올라온 대구, 그 때의 그 느낌이 떠오르는 그런 꿈.

동대구터미널의 버스매연은 목이 매웠고, 껌파는 걸인과 노숙자를 슬쩍 비켜서 찾아간 뒷골목 만화방은 퀘퀘했다. 지하철을 2호선 공사가 한창이었던 반월당 도로 바닥의 쇠판들은 버스가 바퀴가 한 바퀴를 완전히 돌기 전에 서너번씩 땅 속으로 꺼질듯 덜컹거렸다. 버스가 반월당역에서 명덕, 교대, 영대병원역을 지나는 사이에 창 밖의 풍경들은 서로 다른 장르의 만화책을 기워둔 것처럼 연결고리 없이 바뀌어갔다.

병원과 상업시설, 한의원 등 꽤 보기 좋은 조명들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애견샵, 승복, 불교용품 등 투박한 형광등 간판을 이마빡에 붙인 단층건물들이 슬레이트 지붕에 기와를 어설프게 쌓은 채 줄줄이 나타났다. 애견샵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도심의 전통시장이 허물어져가고 있었고, 시장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자동차 부품이나 네비게이션 등을 파는 3~4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러다가 초록색이나 다 타버린 연탄재 색의 지붕을 얹은 단층 개량한옥이 나타나기도 하고 롯데리아나 투다리, 막창집 등 술집들이 줄지어 나타나기도 했다.

낮은 가격에 혹해 찾아간 앞산 아래 미군부대 옆, 컨테이너촌이라 해도 괜찮고 쪽방촌이라고 해도 괜찮아보여서 뭐라고 불러야할지 애매해보이는 골목길. 저렴한 단기임대 방들이 어슷하게 어긋나 잎맥처럼 뻗은 그 골목길 중 한 곳으로 꺾어들었다. 진흙으로 진창이 된 마당을 조심스레 가로질렀으나 다섯걸음도 못 가서 운동화 바닥에 지층마냥 흙물 자국이 길게 생긴 걸 보고 돌아섰던 월세 10만원짜리 방.

들안길, 황금동, 범어동의 유흥가에서 일하면서 택시 기본요금이 끝나는 지점의 골목길까지 흘러온 사람들을 옆 집 이웃으로,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정장을 입고 밤에 출근했다가 날이 밝을 무렵에 흐느적거리며 퇴근하던 사람들을 위아래층 이웃으로 만나서 구석진 빌라의 구석구석을 칸칸이 채워 살면서 하수구 냄새가 깔린 복개도로의 침침한 골목을 걷던 나날들.

잠이 깨어 지도와 로드뷰를 둘러보니 그 모든 곳은 이제 그 모양으로 남아있질 않았다. 대규모 백화점, 49층 아파트, 펜스로 둘러진 재개발 공터.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그랬다.

꿈의 내용은 이제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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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많이 잃고 이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군요...아니..안 잃었을 때도 요상했으려나.

많이 따고 난 다음에 다시 한 번 봐주세요. 저는 지금 2017년에 넣은 돈을 일부 회복 중입니다. 이제 2200%만 더 오르면 본전입니다.

너무나 생생하신 꿈이군요^^
꿈에서 초록색을 느끼시디니~

컬러로 꾼 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전의 그 지붕 모양만으로도 그 때의 색이 저절로 떠오르곤 하니까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해서
미처 변화를 못느끼며 사는지도 모르겠네요.
꿈으로만 남으려나요?

옛 술꾼들이 취생몽사라고 했던 게 괜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구단위개발 덕분에 삐뚤빼뚤하던 그 집들과 그 골목길과 가로수들이 통째로 반듯한 직사각형으로 바뀌어 버리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의 흔적을 찾기 힘든 것들이 많아지고 있네요.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기억들이 쌓여가지요. 그러다 어느 한순간 술한모금 마시지않아도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뒤적이며 삶을 돌이켜 봅니다..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