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서호(西湖)에서의 결전
민국무림(民国武林)을 해부하다.
1929:决战西湖——解密民国武林,还原“一代宗师”
왕가위 감독의 10년 역작 <일대종사(一代宗师)>가 다시금 국민들 마음속의 무림정서에 불을 붙였다. 왕가위 감독은 스스로, 그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결코 단순한 상쾌한 복수(快意恩仇)의 무협 이야기가 아니며, 표현하려는 바는 민국무림(民国武林)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민국시기는 중국무술의 마지막 전성기가 될 수 있었을까? 당시의 무술은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을까? 전통 무술인과 중국 무술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영화를 본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여흥이 가시지 않았다.
1929년 절강성 항저우에서 1차 국술유예대회(一次国术游艺大会)가 열렸다. 그 대회는 당시 거의 모든 무림인사와 무술 조직을 망라했었다. 기자는 사료를 찾아보고 무술전문가를 방문하여, 중국무술의 전성기로서 그 지나간 무림을 드러내고자 한다.
“겨루기(把式)”에서 “무림(武林)”으로
1929년 5월 절강성 정부주석 장징쟝(张静江)은 서호박람회의 준비로 반년을 바쁘게 보냈다. 박람회 개막을 보고, 그는 곧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다시 한 번 “절강성 국술유예대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사실 1928~1929년은 장징쟝이 정치적으로 매우 낙담한 두 해였다. 장징쟝은 국민당의 원로일 뿐만 아니라, 쑨원의 혁명 배후의 주요 후원자였다. 쑨원은 이렇게 감탄했다. “동맹회의 성립 이후, 가장 용감하게 출자한 사람은 바로 장징쟝이다!”
1928년 북벌 성공 후 국민정부는 남경으로 천도했다. 본래는 경력으로 보았을 때 장징쟝이 핵심권력층으로 드는 게 순리였다. 하지만 그의 뿌리가 깊은 것을 꺼려, 장제스는 대권을 쥔 뒤로 중앙에서 그를 배제하여 절강성 주석으로 내보내버렸다.
새해를 맞이하며 장징쟝은 절강성의 진흥을 다짐하며 가슴 속 울분을 토해냈다. 서호박람회를 진행한 것은 절강성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신은 어떻게 하면 고조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해낸 것은 무술이었다.
청말민초 시기는 나라가 위태로웠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전통문화 또한 외래 문명 앞에서 무너지던 때였다. 유교는 5.4 신청년에 의해 전복되었고, 사회에서는 중의학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신화 같던 바둑 국수 장러샨(张乐山), 왕윈펑(汪耘丰)마저 이름 없는 일본 4단에게 패배하니…… 전통문화 전반이 패퇴하던 때였다.
이때 주류문화에 들지 못했던 “무술”이 갑자기 흥기하여 국민들의 정신을 고조시키고, 강국강종의 한 희망이 되었다.
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师)>의 시나리오 작가 중 한 명 서호봉(徐皓峰)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림’이란 단어는 민국무협소설가 궁바이위(宫白羽)가 발명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무술하는 사람을 일컬어 ‘겨룬다(把式)’, ‘무를 행한다(武行)’라고 했었죠. ‘림(林)’은 고급문화 살롱의 개념입니다. 사림(词林)이나 금림(琴林)처럼요. ‘림(林)’을 더하면 품격이 높아지죠.”
항저우사범대학의 교수이자, 무술사 연구 전문가인 저우웨이량(周偉良)은 기자에게 설명해주길, 명청시기는 무술을 금지한 것은 무인사회의 지위가 낮은 직접적인 원인이라 했다. 당시에 무술을 익히는 이들은 자주 민간 종교와 함께 움직였다. 남방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반청복명(反清复明)”의 천지회(天地会)로 일명 홍문(洪门)이라 불렸고, 북방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쪽은 백련교와 의화단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모든 무술 익히는 교단을 ‘권교(拳教)’라고 부르며 엄격하게 탄압했습니다.” 때문에, 민간에서 무술을 익히는 것은 은밀한 환경 아래 진행되었다.
근대시기 민간무인이 처음으로 대중의 눈에 띈 것은 의화단 운동이었다. 의화단에는 무당이 많긴 했지만 그 기술이 탁월한 무예고수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을 이끌고 톈진의 노룡두 기차역을 습격한 대도(大刀) 리춘이(李存义)는 바로 저명한 형의권의 대가였다.
베이징 함락 후 여러 서양병사를 때려 죽였고 최후에는 서양 총기에 쓰러진 청팅화(程廷华) 또한 팔괘장의 거벽(巨擘)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탄쓰퉁(谭嗣同)의 탈옥을 모의한 대도오왕(大刀王五)과, 정무화의 창립자 곽원갑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사람들의 귀에 익은 강호협객들이었다.
허나 지금 사람들은 리춘이, 대도오왕, 그리고 곽원갑 모두가 표국을 열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청팅화는 베이징 안경점의 사장이었다.
서호봉은 기자에게 이르길, 비록 청말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대협의 이야기들이 주류문화에 의해 받아져 유명해진 것은 민국 이후의 일이라 했다.
청말, 일본의 부상에 혁명당원들은 크게 자극받았다. 그들은 전국민의 상무(尚武) 경향이 국민정신을 고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문명과 그 정신, 야만과 그 신체’는 당시 사회의 공통인식이었다.” 서호봉은 말했다. 이 때문에 서북군의 고위장교 장지쟝(张之江)이 국민당 정부에 “무술”을 “국술(国术)”로 고치자고 제안했을 때, 그렇게 빨리 정부 측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국(国)”이라는 글자를 통해, 사회가 무술을 중시하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929년 5월 3일 절강성 정부위원회 제 223차 회의에서, 장징쟝(张静江)이 제기한 국술유예대회 안건이 통과되었다. 비록 장징쟝은 절강성 국술관의 관장직을 겸했지만, 그는 닭 묶을 힘도 없는 문인이었다. 전국적인 무술대회를 열려면 국면 전반을 주관할 전문가가 없어서는 안 됐다. 때문에 그는 중앙국술관 부관장 리징린(李景林)을 떠올렸다.
중앙국술관에게 힘을 빌리다
민국무림에서 리징린(李景林)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바오딩(保定)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장쭤린(张作霖) 밑으로 투신했다. 작전에 있어 용맹했기에 그는 빠르게 장쭤린이 아끼는 장군이 되었다. 허나 그는 1926년 서북군 고위장교 장지량과의 대결전에서 패배하고는, 그 뒤 군사계를 물러나 고위망명객(寓公)이 되었다.
기이한 일이 있어야 책이 되는 법일지니. 2년 뒤 그 전쟁 때의 원수가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전쟁 때문이 아니라 무술 때문이었다.
1926년 장즈쟝이 리징린을 물리 친 뒤, 그는 오랜 군생활로 반빈불수의 처지에 이르렀다. 병에 걸린 뒤 장즈쟝은 주변의 권유로 태극권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반년을 하니 병세가 과연 좋아졌다. 본래 무술의 고장—하북성 창저우(沧州)에서 태어난 장즈쟝은, 중화무술의 현묘함에 감탄하였다. 이후 그는 군에서 물러나 무술보급에 전념했다.
1928년 중앙국술관이 남경에 만들어졌다. 장즈쟝은 직접 관장을 맡았다. 그러면 부관장은 누굴 앉혀야 하는가? 그는 그때 난징에 망명해온 리징린을 생각해낸 것이다.
군벌 외에도 리징린은 “무당검협(武当剑侠)”으로 알려져있었다. 리징신의 무당검에 관해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철로 수리를 담당할 때, 공병들이 지하에서 걸출한 “무림비급(武林秘籍)”인 “무당검보(武当剑谱)”를 발견했다. 본래 무공의 기초가 있던 리징린은 그 검보를 보고 천하에 비할 바 없는 무당검을 익혀냈다고 한다.
이 지극히 전설적인 이야기는 당연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리징린은 확실히 옛날부터 무당파의 전인 쑹웨이이(宋唯一)의 문하에서 검술을 배웠다.
“그의 검법이 얼마나 대단하지는 말할 게 못된다. 그가 무림에서 지위가 높았던 것은 일단 군사 정치 양쪽에서 모두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우웨이량(周伟良)의 말이다.
장즈쟝의 성의에 감동하고, 동시에 무술을 널리 알리고자하는 희망에서. 리징린은 흔연히 중앙국술관 부관장 직을 맡았다.
중앙국술관 건립 후 각 성, 시, 현마다 국술관이 들어섰다. 통계에 따르면 1934년 말에는 이미 전국에 24개의 성급 국술관이 있었으며, 현급 국술관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치 많았다. 국술관 시스템의 성립은 무술을 널리 알리고 무술인재를 배양하는 데 있어 예상치 못한 작용을 했다. 중국무술 최후의 전성기는 국술관 시스템의 성립과 불가분한 관계가 있었다.
장징쟝은 리징린을 청해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준비주임을 맡겼다. 중앙국술관의 명성을 빌려 수많은 무림인사를 초청하는 것도 있었지만, 중앙국술관에서만 일찍이 이런 종류의 경기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1928년 10월, 중앙국술관은 인재를 충원하기 위해 난징의 공공체육장에서 제1차 전국국술시험(일명 제1차 국시(国考))를 진행했다. 당시 시험은 연무대 형식이었고, 중량을 가리지 않음을 물론 보호구도 끼지 않았다. 주먹과 발을 그대로 썼었으며, 3선 2선승제였다.
무술을 겨루어 무림맹주를 다투었다. 이는 무협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이다. 하지만 서호봉은 기자에게 말하길, 현실에서 이러한 상황은 매우 드물게 발생했다.
“진정한 고수들은 손속을 겨루지 않아요. 악수를 하고, 한 눈에 대강 서로가 어떤지 알아보죠. 만약 상대방의 주먹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굳이 망신당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화 <일대종사>에서는 궁바오션(宫宝森)과 엽문(叶问)이 금루에서 병전을 두고 겨루는 장면은 상상 속에서만 일어난 일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통 무인들은 모두 체면을 중시했다. 한 사람이 무술을 겨루어 이기고 지는 것은 그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한 문파 전체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때문에 모두들 이런 공개 비무를 극력으로 피하려 했다. 한 번 손을 쓰면 생사를 걸고 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서호봉의 말이다.
제1차 국시는 중국무술 사상 최초로 공개된 비무대회라 할 수 있다. 제1차 국시는 문파의 제약을 타파했고, 선수들은 자기 문파의 영욕을 짊어지는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경기장면은 상당히 처참하여, 뼈가 부러지고 힘줄이 끊어지거나,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는 등이 매우 흔했다.
제1차 국시 우승자들 중에는 이후 중앙국술관에 들어가 가르친 사람이 많았다. 제1차 국시는 결코 조직적으로 매우 원만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값진 경험이었다.
장징쟝의 초빙을 받은 후, 리징린은 흔쾌히 항저우로 가 서호의 커좡(柯庄)에서 준비위원회 회의소에 들어갔다. 1929년 10월 11일 서호박람회 폐막 당일,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준비위원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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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기간은 한 달
기간으로 보자면 절강성 국술여유대회는 준비기간이 불과 한 달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대규모 전국국술대회를 여는 건 준비위원회에게 있어 실로 작지 않은 도전이었다.
<절강국술유예대회회간(浙江国术游艺大会汇刊)>(이하 <회간(汇刊)>)에 따르면 준비위원회는 회의부와 집행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집행부 이하에는 총무, 비서, 교제, 장무(场务)의 4개 처가 있었다. 총무처는 재무를, 비서처는 대외 홍보와 오고가는 문서 작성을, 교제처는 전국무림인사의 신청 및 초청 작업을, 그리고 장무처는 대회회장의 설비시공을 맡았다.
모든 준비 업무 중 경기장 건설이 가장 중요했다. <회간>에 따르면, 경기장은 본래 항저우 서대가(西大街)에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재정청에서 “해당 지역은 대중들을 수용하기에 편리치 않다”는 답신을 보냈다. 이에 경기장은 항저우 통강교(江桥) 옛 무서(抚署) 자리로 변경되었다. 구무서는 30묘의 부지였으나 신해혁명 때 혁명군이 담장 하나 빼고 다 불태웠다. 장무처는 당장 안에 비무대를 세워 바로 사용코자 하였다.
<회간>에 적혀있는 경기장 설계도면을 보자면, 비무대는 정사각형으로 높이는 4척이고 길이는 56척이었다. 비무대 뒤에 심판석을 설치하고, 그 심판석 좌측에 군악대 자리가, 우측에는 신문기자석이 있었다. 후면에는 휴게실 7칸이, 좌편에는 보급실 3칸이, 그리고 우편에는 의무실 4칸이 있었다. 각 선수의 요구에 응하고자 의무실에는 중의사와 서양의사를 모두 두었다.
비무대 앞 관중석은 부채꼴 모양으로, 좌우에 특별관람석을 설치하고 정면은 일반관람석으로 삼았다. 관람의 편의를 위해 관람석은 안쪽이 낮고 바깥이 높게 설계되었으며, 관람장 실내의 벤치만 대략 2만여 개에 달했다. 이 밖에도 경기장 정문에는 매표소, 직원휴게실, 그리고 주차실을 설치하였으며, 정문 밖에는 임시상가까지 늘어서 있었다.
이는 설계에서 시공까지 대략 1달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80년 전에도 준비인원의 작업 효율이 높았으며 그 설계이념이 선진적이어서, 뭇 사람들을 감탄케 한다.
경비 조달을 위해 절강성 정부는 1기 국술참관권을 발행했다. 소위 국술참관권은 사실 한 세트라, 정가는 4위안에 10장의 표가 들어있었다. 각각은 4전에 1장이었는데, 소매로 파는 5전짜리에 비해 다소 쌌다. 게다가 참관권은 경품추첨에 참가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라 할만 했다.
5전은 대충 얼마인가? 저우웨량(周伟良) 교수가 기자에게 말하기를, “당시 5전은 최상품 돼지고기 1근을 살 수 있는 돈으로, 현재 인민폐로 하면 대략 30~50원 정도에 해당한다.” 당시에도 이런 표는 싼 편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나중 들어 참관권 발행에 문제가 생겼다. 1929년 <상해화보(上海画报)>에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참관권 발행의 내막>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 문장에 따르면 국술참관은 원래 11월 13일에 복권을 추첨하기로 했는데, 청부업자 쉬신푸(徐信孚)가 대회에 낸 10만원 보증금이 지연됨에 따라 복권추첨은 23일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쉬신푸는 본디 서호박람회에서 독일 폐결핵 약을 팔던 상인이었다. 그는 관람권이 이익을 낼 거라 보고 참관권의 90%에 대해 판매를 청부하고자, 선불로 10만원의 보증금을 내겠다고 했다.
허나 사실 쉬신푸 본인은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그래서 항저우의 다오셩(道胜)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 했다. 헌데 일이 목전에 닥칠 즘 은행대출 일이 잘 되지 않았다. 때문에 발행날짜가 임박했지만 보증금이 오지 않게 된 것이다. 다행히 이때 항저우 현지에서 한 상인이 도와 800장의 참관권을 사기로 하여, 그제야 참관권이 순조롭게 시장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항간에는 참관권 추첨 비리라는 검은 그림자가 계속 떠돌아다녔다. 기자가 중앙국술관주가 발행하는 잡지 <국술주간(国术周刊)>에서 본 바에로, 어떤 이는 복권 1등상 2만원 사금이 결국에는 리징린에게 들어갔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재미있는 것은 <국술주간>의 대답이다. “리징린 주임이 얻었다고 하여 무슨 흑막이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 참관권 사건의 풍파로 원만했던 준비공작에 그늘이 드리워졌었다.
“영웅첩”이 뿌려지다
한편에서는 장무처가 경기장을 짓느라 분주하기 그지없었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준비위원회가 “영웅첩(英雄帖)”을 뿌려 각지의 무술인재를 모으는 작업을 요란하게 진행하였다.
준비위원회는 각성과 각 특별시 정부에 보낸 전문을 보면, 이번 국술대회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찾는 일이었다 할 수 있다. “남녀불문은 물론, 승려인지나 속가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기량만 뛰어나다면 모두 와서 솜씨를 펼쳐 보일 수 있었다.
무협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머릿속에 대략 대문파 화산의 논검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국술여유대회에는 얼마나 많은 문파의 무림고수가 찾아왔을까? 저우웨이량 교수가 기자에게 알려준 바에 따르면, 실제 상황은 무협소설 중의 묘사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중국무술에서 문파의 개념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무협소설에 쓰인 그런 치밀한 조직이나 분명한 경계는 없다. “중국무술은 대략 130여 개의 권법 종류가 있고, 각 종류 아래에는 문파들이 있다. 이 둘은 관계가 있으나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태극권은 일개 권법 종류(拳种)이다. 그 밑에는 권법 만 있는 게 아니라 태극검, 태극창, 그리고 태극의 각종 무술이 공부(功夫)가 있어, 하나의 무예(艺业)를 이룬다. 게다가 타극권은 점차 5개의 파로 형성되었다. 양식(杨式), 진식(陈式), 손식(孙式), 오식(吴式) 등이다. 이게 바로 문파다.”
이는 요컨대, 같은 권법 종류를 수련하는 사림이 반드시 같은 문파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런 국면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서호봉이 기자에게 말하기를, 명청 600년간 무술을 금지한 때문에, 무술을 익히는 이는 상대적으로 폐쇄된 환경에서 몰래 기예를 전하고 무술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폐쇄된 환경에서 같은 권종(拳种)도 다른 전인의 깨달음, 연역(演绎), 승화 등을 통해 다른 특색을 가지도록 진화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표면상의 단절상태 또한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서로 다른 권법 종류 또한 접목되는 상황이 나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태극매화문(太极梅花门)은 태극권과 매화권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중국무술에 문파가 얼마나 많은지, 한 권사가 어떤 문파인지 말하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
서호봉은 국술유예대회 조직형식의 뛰어난 점으로 문파의 경계를 허물고 각성 정부나 각지 무술관 단위로 인재를 선발한 것을 꼽았다. “국술관은 국가교육기구이며 어떤 문파에 속하지 않는다. 겨룬 이가 문파의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고, 때문에 누군가가 졌어도 한 문파의 패배라고 느끼지 않게 했다.”
문파의 영예 문제와는 연관되지 않아, 무림인사들은 홀가분하게 싸움터로 나갈 수 있었지만, 각 성시의 명예가 걸려있었고 각 조직은 여전히 상당히 중시되었다. 각 성시는 국술유예대회의 회신에서 볼 수 있었듯, 어떤 보증기관은 각지의 국술관이었고, 어떤 것은 성이나 현 정부가 공모를 담당한 것이었다. 베이핑(현 베이징) 특별시는 뜻밖에도 시장이 직접 관여했다.
요컨대 자기 성의 영예를 위해 각 성과 시 조직은 상당히 고심하였다 할 수 있다. 어떤 남방의 성시는 무풍이 흥성하지가 않았던지라 특별히 사람을 보내 감숙성에서 용병을 구하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보고 중앙국술관의 부관장으로서 리징린은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관장 장지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대회 참가자들은 대략 50여 명으로, 모두 국술에 노련한 명가(名家)들입니다. 연습하고 고심하기를 그치지 않기를 40년으로 이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요. 이번에 저는 검술을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순전히 개인 자격으로 초대되었고, 대다수는 항저우에 오기를 허락했습니다. 각 성에서 참석자를 고르는데 달인이 있는가 없는가는 알게 못되고, 강소성과 절강성 국술관 교원 전원이 시합에 참가한다는데 …… 관에서 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지라, 신속하게 고수를 초빙한다는 제 얕은 소견으로 각 성의 조롱을 면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장즈쟝은 상당히 담담했다. 회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내 경기는 승패가 어떻게 나던 관계없이, 모두 동포이니 영욕을 얻고 맘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번 경기의 주된 의의는 상무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며 쌓여온 약함을 제거하는 데 있으니 …… 본관은 이름 없는 고수도 마다치 않습니다만, 회의 참석을 위해 따로 초청할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사실이 증명해주듯, 리징린의 우려는 괜한 것이었다. 절강성 국술여유대회에서 중앙국술관의 교사들이 우쭐대긴 했지만, 오히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했다.
대회개막
절강성 국술여유대회는 1929년 11월 15일 14시에 개막될 예정이었다. 하느님 무심하시게도 큰 비가 내리자, 준비위원회는 일정은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기자가 11월 16일 <항저우민국일보(杭州民国日报)>를 보았을 때, 준비위원회는 1면에 개제한 “긴급통보”에서 대회가 16일 9시에 개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통보 끝에 조직위원회는 “비가 온다면 순연함(天顺延)” 네 글자를 적어두어, 일기예보 없는 어쩔 수 없음을 드러내었다.
다행히 11월 16일은 맑았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항저우 구무서는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기 그지없었다. 민국정부의 중요인물 장챵(张强), 절강성 주석 장징쟝(张静江), 민정청 청장 주쟈화(朱家骅), 항저우 시장 저우샹셴(周象贤) 등 정계의 중요인물이 각각 경기장에 도착했다. 9시 정각이 되자 경기장에 방울소리 울리며 군악합주가 벌어지니 절강성 국술여유대회가 정식으로 개막했다.
개막당일 3만여 관중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1929년 11월 23일자 <절강상보(浙江商报)>에는 이런 생동감 있는 묘사가 있다.
입구에는 컬러액자와 꽃종이가 선연했다. 현판에는 리징린 장군의 대련(长联)이 걸려있었다.
종오산 절수의 장관(综吴山浙水之大观)
뛰어난 인물들 모두 모이니(间气所钟)
용과 호랑이, 폭풍우라도 안색이 질리겠네 (龙虎风雷齐变色)
북에서 모이고 남에서 물리치니 그 강함이 같을 터 (萃北胜南强于一室)
사방에서 모여올지니 (四方来回)
단련한 공력은 기재마저 찢어 죽이리 (鸟熊功力屠奇才)
시상대 위에는 우승자에게 줄 은병풍 펼쳐져 있었다. 시상대 쪽에는 중서 임시 의원이 설치되어 부상인원을 편리하게 치료할 수 있었다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온 곳에서 온 관중이 어찌 그저 만 명 뿐이겠는가. 소수의 1위안짜리 좌석과 특수자격자 외에도, 모두 시상대 앞에서 모여선 것이 마치 구멍의 구더기마냥 우글우글하니, 정말 볼만한 것이었다.
당시 기자는 두 명의 모직코트를 입은 묘령의 여성 둘이 인파에 밀려 창백해지다 못해 울먹이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다행히 경찰이 제 때에 그 두 여성을 인파 밖으로 밀어주었다.
대회 초반 나흘 동안은 시범을 보였고, 5일째가 되어서야 비무를 시작했다. 비록 시범 당시는 비무 때처럼 열기가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수만 명의 항저우 관중이 몰려들었다.
국술여유대회는 민국무림의 유명인사들을 거의 망라했다. 오씨 태극권의 창시자 우졘췐(吴鉴泉)은 태극권을 시연했고, 의권(意拳)의 창시자 왕샹자이(王芗斋)은 창해용음(沧海龙吟)을 시연했다. 리징린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태극검을 추었고, 쑨원의 경호원이었던 남북대협(南北大侠) 두신우(杜心五)는 귀두수(鬼头手)를 시연했다. “발끝으로 서 장내를 나는 듯이 세바퀴 도니……”
그해 대회가 끝나고, 리징린은 무술대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한 장관을 보여줬다. 민국무림 정점들을 드러낸 화폭이라 할 수 있다.
남권, 북퇴에게 밀리다
11월 21일 비무 첫째 날, 항저우 관중들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디어 보도에 따르면 이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6만 여명에 달했다.
대회 <회간(汇刊)>에 실린 바에 따르면, 첫째 날 비무 신청자는 128명이었다. 대회는 11시에 개막할 예정이었지만, 당시에는 시간관념이 별로 없어서 11시가 되어도 나오지 않는 선수가 많았다. 대회는 비무 시간을 13시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평함을 위해 대회는 특수한 방식으로 조를 짰다. 먼저 둥근 나무구슬에 비무자의 번호와 성명을 쓰고, 위원들의 감독 하에 나무구슬을 큰 놋쇠 통에 넣은 것이다. <회간(汇刊)>에 실린 사진을 보자면, 놋쇠 통에는 나무구슬보다 조금 더 큰 구멍이 가득 있었다. 나무구슬을 흔들어 나온 대로 비무 순서를 정했다.
13시가 되자 실제 출석자는 109명으로 4개조로 나뉘어졌다. 3개 조에 32명이었고, 네 번째 조는 13명이었다. 조가 다 짜지자 비무할 이들은 조 내에서 제비를 뽑아 상대를 정했다. 비무인원들은 모두 회색의 간편한 복장을 입고, 허리에는 붉은 요대를 감았다.
첫 번째 피리가 울리면 양측은 비무대 안 정해진 링 안에 선다. 두 번째 피리가 울리면 양측은 허리를 굽혀 예를 차린다. 세 번째 피리가 울리면 비무가 비로소 시작된다. 선수들이 비무할 때마다, 모두 2명의 감찰위원들이 홍백기를 들고 비무대 위에서 심판을 맡았다. 필요할 때와 경기를 끝낼 때를 위함이었다.
“진문이장(津门二张)”이라고도 칭해지는 톈진의 무술가 장홍쥔(张鸿骏)은 1980년대부터 국가무술 심판을 맡아왔다. 그가 기자에게 알려주길, 비무 중 심판의 역할은 매우 크기에 반드시 전문가여야 한다. “그래야 언제 멈추라 외칠지 알죠. 그렇지 않으면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감찰위원회 명단에서 드러나듯, 감찰위원들은 비록 심판위원보다는 명성이 크지 않았지만, 모두 무림에서 명성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비무자들이 거리낌 없이 싸울 수 있도록, 국술유예대회 비무규정을 상당히 간단하게 만들었다. 눈 찌르기, 목 조르기, 태양혈 때리기, 낭심치기 외에, 다른 것은 조금도 거리낄 게 없었다. 제1차 국시와 마찬가지로 3판2선승제 방식을 택했는데, 단지 매 판마다 3분 제한이 있었을 뿐이었다.
시작할 때만해도 양측의 점수로 승부를 정하라는 규칙이 있었다. 첫째 날 경기를 해보니 의외로 무승부가 많이 나왔다.
저우웨이량(周伟良)은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점수’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선수는 점수를 많이 얻기 위해 더듬고 빠질 수 있었다. 그런 경기는 볼만하지 않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첫째 날 비무를 본 뒤 <상해보(上海报)>의 한 기자는 크게 실망했다. 그는 경기 장면을 두고 상상 중의 무림고수의 대결만큼 멋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개 뒤엉켜서 서로 마구 때렸다. 일반인이 서로 때리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더 우스운 것은 상대가 따귀를 때리면 자신도 따귀를 때리는 것으로, 입에 피범벅이 되어 때리는 소리가 끝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 의료인원들은 오직 따귀 맞은 사람만 치료하기도 바빴다.
규칙이 불분명하다며 경기장에서 패배를 인정하길 거부하고 비무대에서 버티는 사람도 있어서, 잠시 온 곳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런 광경은 아마 모든 관객이 예상치 못한 바였다. <국술여유대회일간(国术游艺大会日刊)> 편집 판펑치(潘凤起)가 쓴 바에 따르면, 초기 어떻게 싸우는 장면을 보도해야할지 토론 할 때는 무협소설마냥 생생하게 주먹과 발차기가 오가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보고 난 뒤에는, 현실이 상상에서 상당히 거리가 멈을 발견했다. 대개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보이지 않은 채 경기가 끝나버리곤 했다. 결국 그들은 이긴 자와 진 자의 명단을 쓸 뿐이었다.
그렇다면 실제의 싸움장면은 정말로 관객의 기억처럼 보기 안 좋았을까? 무술가인 장홍쥔(张鸿骏)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싸우는 것은 정말 보기 안 좋습니다. 무술을 연습하여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투로를 없애는 것이지요. 제가 그쪽이 무슨 권을 낼지 생각지 않고, 그쪽이 오면 제가 그냥 있는 거죠. 가장 좋은 기술은 본능적 반응이고, 가장 좋은 건 한 방에 적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한 방에 적을 제압하는 건 당연히 별로 볼 게 없죠.”
1980년대 절강성 무술가 링야오화(凌耀华)는 선배 스승이 남긴 필사본 노트를 바탕으로 <천고일회 —1929년 국술대경기(千古一会——1929年国术大竞技)>를 정리하여, 잡지 <무혼(武魂)>에 발표했다.
첫째 날 격투장면이 어째서 관객성이 없었는지 링야오화가 제시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날 비무는 두세 판의 북권 맞대결 외에, 모두 남북의 대결이었다. “남북격투의 차이가 너무 커서, 남권 수련자는 전부 북측에 패배했다. 남북권은 대결하면 대개 한 번에 승부가 나기에, 빠르면서도 깔끔하게 치러진다.”
이러한 해석에는 확실히 역사적 근거가 있다. 제 1차 국시와 절강성 국술여유대회 두 차례의 경합을 통해 남방무술계는 남북방 권술의 격차를 보았고, 때문에 일찍이 한 차례 큰 규모로 “북권남전(北拳南传, 북쪽의 권법을 남쪽에 전하다)” 활동이 있었다. 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师)>는 이 “북권남전(北拳南传)”을 배경으로 한다.
서호봉은 기자에게 말하길, 소위 “북권”이 가리키는 것은 북방에서 발원한 권종(拳种)이고, 당시 흥행한 북권은 주로 형의권, 팔괘장, 팔극권 등이었다. “남권”은 주로 남방에서 발원한 “홍권(洪拳)” 등이다. “영춘(咏春)”은 전형적인 남권이다.
저우웨이량이 기자에게 말하길, 비록 명나라 시기 사료에 “영춘인은 기격에 능하다”고 적혀있긴 하지만, 영춘(咏春)은 당시만 해도 매우 유명한 권종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폭발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모두 엽문이 가르친 한 문도, 이소룡 덕이다.
서호봉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남북권의 격차는 권종 본래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시세의 문제였다.
“청말에 주요 전쟁은 모두 북방에서 일어났다. 의화단이 노룡두 기차역을 습격한 그때, 형의권 종사 리춘이(李存义) 또한 끼여 있었다. 팔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진격했을 때, 팔괘문은 대도로 외국인들 찍어 내렸다. 이에 비해 남방은 실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어떤 권종이 직접 전쟁과 관계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떤 권종이 1~2 세대 간에 걸쳐 있는지에 따라 실전능력은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
늙은 권사, 젊은 학생에게 밀려
첫째 날 관객성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 심판위원회는 규칙을 재정비하여 타격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뒤 경기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유명한 노권사가 국술관 출신의 후배에게 꽃잎 떨어지듯 밀려난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중앙국술관 교습반 학생 자오얜하이(曹宴海)와 상하이 융안(永安)에 있는 셴스(先施) 공사 총표두 류가오셩(刘高升)의 경기였다.
<중앙국술관사(中央国术馆史)>에 따르면 류가오셩은 체격이 크고, 금종조와 철포삼을 익혀 그 아래 3000제자가 있었다. 별호는 “동두철비진강남(铜头铁臂镇江南)”(놋쇠머리 철 팔뚝 강남을 압도하도다)이였고, 저명한 상하이의 “삼유(三刘)” (류바촨(刘百川), 류샤오볜(刘小辫), 류가오셩(刘高升)) 중 한 명이었다. 대회전까지만 해도 류가오셩은 우승이 점쳐지는 선수 중 하나였다.
경기 전 그는 수십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상하이에서 시안현(西安县)까지 걸어가며, “이무회우(以武会友)”(무로써 친우를 모음)이라는 큰 깃발을 들고 경기를 이겨가며 위세를 떨쳤었다. 남경에 돌아온 이후에는 중앙국술관에서 시범을 보이며 굵은 대나무 장대를 손으로 두 동강 내곤 했다. 항저우 경기로 오며 그는 승리를 자신했었다. 상하이 기차역에서 출발할 때, 제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폭죽을 터트렸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득의만만하여 두 빈 상자를 상금 포장용으로 들고 갔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많은 선수가 류가오셩을 상대하길 꺼려하여 기권했다고도 한다.
시합 둘째 날, 첫 번째 경기는 자오얜하이와 류가오셩의 대결이었다. 자오얜하이는 무술대사 “곽연자(郭燕子)”(곽 제비) 궈장셩(郭长生)의 제자였다. <중앙국술관사>에 따르면 경기 전 궈장셩은 제자더러 시의적절한 대책을 알려주었다. “류가오셩은 경공(硬功)이 있지만, 그 기운이 필히 뻣뻣하고 둔하니 결코 너처럼 빠르지 않다. 빠름(快)으로 승부를 보라.”
경기가 시작되자 자오얜하이는 “격보구자(激步钩子, 발로 갈고리를 걸다)”를 사용하여 가오셩승을 땅바닥에 쓰러트리려 했지만, 그가 류가오셩의 타리를 차자 오히려 자신의 다리가 저려왔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 류가오셩은 자오의 오른 다리를 잡고 땅바닥에 거꾸러트리려 했지만, 자오는 오른다리로 류의 오른쪽 종아리를 바깥쪽으로 떼어나고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오에 의해 류가오셩은 바닥에 내던져졌다. 경기장이 자오옌하이에게 갈채를 보낼 때, 류가오셩은 크게 외쳤다. “말도 안 돼!”
리징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류가오셩에게 물었다. “어째서 말도 안 되오?” 류가오셩은 대답했다. “이건 넘어진 것이지, 쓰러트린 게 아니오.”
몇 분 쉬고 난뒤, 세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자오옌하이는 류가오셩은 감싼 채 몇 바퀴 돌더니, 한 번 몸을 틀고 류가오셩을 두 장 밖으로 내동댕이 쳤다. 자오얜하이가 물었다. “류 노사, 이번은 어떻습니까?”
3판2선승제인지라, 류가오셩은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둘의 경기에 대해서는 글마다 그 내용이 다소 다르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다.
그런데 어떤 글에 따르면 당시 <당대일보(当代日报)>와 <대공보(大公报)>는 <자오얜하이가 류가오셩을 때린 철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어>라는 제목으로 경기에 대해 보도했다고 한다. 허나 기자가 도서관에서 본 바로는 1929년의 <당대일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로 항저우 지역에는 1949년 6월 창간된 <당대일보>만이 있었다. 게다가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기간의 <대공보>에는 그런 글이 개제된 적이 없었다. 이 경기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수수깨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간(汇刊)>에 따르면 자오얜하이가 류가오셩을 이긴 것은 확실하다. 노사부가 어째서 후배를 이기지 못하였는지, 장홍쥔의 해설은 이렇다. “노사부의 경공(硬功)이 강할 수는 있어도 실전경험이 부족했습니다. 돌이나 벽돌을 쪼갠다고해서 때리는 것도 잘하는 건 아니죠.”
장홍쥔의 사부는 자오다오신(赵道新)은 당시 국술유예대회에 참가했었다. 자오다오신은 일찍이 장홍쥔에게 말하기를, 한 명성 있는 권사가 한참 후배에게 맞아 졌었다고 했다. 둘째 날 그들은 연달아 그 권사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권사는 “하(嘿)”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을 쳤다. 책상 귀퉁이가 한 번에 부러졌다. “사람을 때리는 건 물건을 부수는 게 아냐. 자네가 여자 동지를 때린다 쳐도, 그녀가 거기 서서 자네 때리는 걸 기다리겠나?”
<천고일회(千古一会)>에는 우스운 경기장면 하나가 적혀있다. 경기 3일차, 강서성의 노승이 두 명의 제자와 함께 참관을 왔다. “둘째 제자는 몸이 근질거려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했다. 노승은 둘째 제자가 대단찮음을 알았기에, 곧 스스로 몸을 앞으로 내밀어 한 번 다퉈보기를 요구했다.” 과연 노승과 선수 후펑샨(胡凤山)과 손속을 겨루었고, 후펑샨이 바로 노승의 머리를 쳤다. 노승은 두개골이 함몰되어 피를 흘리며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그러나 이렇게 괄괄한 장면은 당시 신문이나 <회간>에 나오지 않는다. <회간>에 따르면 대회에는 출가인 단 한 명만이 참가를 했다. 그러나 그 출가인은 실력이 그렇게 출중하지 않아 2회전에서 탈락했다.
우승자 셋은 모두 하북성 사람
26, 27일 이틀간 대회는 최종 결전을 진행했다. 연달은 비무 끝에 26명의 선수가 마지막 결전에 들었다. 결전에 앞서 대회 조직에서는 항저우 주요도로에 <오늘 오전 10시 결승전 확정>이란 공고를 붙여두었다. 결승전은 그날 6만여 관중을 모았다.
12시 이후 비무 인원들은 “국술(国术)” 두 글자 붉게 세져진 하얀 반팔 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나왔다. 치우징얜(邱景炎)과 가오쇼우우(高守武)의 기권 탓에, 결승전 진출자는 12쌍으로 나눠졌다.
일설에 따르면 대회진행 동안 몰래 담합이 진행되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우승 유력자로 이야기되던 자오얜하이에게 우승을 장뎬핑(章殿卿) 쪽으로 양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뎬핑(章殿卿)은 리징린의 옛 부하이자, 당시 마침 리징린의 딸과 연애 중이었다. 그래서 “리징린 노사의 체면을 살려주길 바란다.”고 했다는 것이다.
<회간>에는 당연히 이런 야사를 담을 수 없는 법. 하지만 이날 기록된 대결장변을 보자면, 자오옌하이는 확실히 이전의 용맹함이 없었다. 그는 장뎬핑과 마주치자 두 번이나 스스로 물러났으며, 한 번 부딪치고는 쓰러졌다.
기자가 확인하길, 경기인원 명단에는 확실히 국술기관이나 정부에서 온 이가 많았다. 게다가 장뎬핑은 리징린이 사사로이 보증하여 추천했던 이라,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장뎬핑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그렇게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항간에서 전하기를, 중앙국술관 출신 선수들이 상위권을 독점하기 위해, 비무 중에도 동문끼리 서로 고의로 져준 정황도 있었다. <천고일회>에 따르면 리징린은 후펑샨(胡凤山)을 만나 용맹을 떨쳤는데, 마청지(马承智), 가오줘린(高作霖), 리칭총(李庆从) 등이 그에게 다쳤다. 왕즈칭(王子庆), 주궈루(朱国禄), 장뎬핑(章殿卿) 등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리징린이 일찍이 후펑샨에게 말하길, “펑샨, 내일은 네가 1등한 셈 치거라. 때릴 필요 없다. 상위 여섯명이면 족하다.”
후펑샨이 말했다. “안 때리는 게 어찌 가능하겠습니다. 1등한 셈 치는 건 망신스럽죠. 1등은 5000원인데, 저는 서호변에 노사를 위해 양옥을 짓고 그로 하여금 노후를 보내게 해야 합니다.”
지나친 자신감 때문인지, 다음날 후펑샨은 주루궈와 왕즈칭에게 패배하여 5위에 그쳤다. 그 글에서 해석하기로, 비록 후펑샨 또한 중앙국술관 교수반의 학생이었지만, “사승관계가 얽혀있어 계파가 달라 천양지차에 상호보수적이었다.” 무림에서는 각 계파 및 인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당시 외부인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니, 지금 사람으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한 가지 설로서, 우선 말하는대로 한 번 들어둘 법하다.
무대 아래서 얼마나 답합을 했던지 간에, 결승전은 여전히 매우 훌륭했다. <회간>에 쓰인 바에 따르면, 장뎬핑과 주궈루는 모두 체구가 우람하여 서로 힘이 필적하니, 서로 맞붙자마자 실로 용호상박이라 할만했다. 이후 장뎬핑은 한 쪽 다리를 주궈루에게 감기니, 장뎬핑이 땅에 떨어질 뻔 했지만 이내 한 다리로 수분을 버티다 겨우 넘어졌다.
장뎬핑과 왕즈칭의 경기에서는 왕즈칭 쪽이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장뎬핑은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 두 사람이 마주치면 상처가 더해질까 싶어, 장뎬핑은 왕즈칭에게 인사하고는 그에게 1등을 넘겼다.
왕즈칭, 주루궈, 장뎬핑은 절강성 국술여유대회에서 상위 3명에 들었다. 1등은 장즈칭으로 5000원의 상을, 2등은 주루궈로 상금 1500원을, 3등은 장뎬핑으로 상금 1000원을 탔다. 셋은 인품이 좋고 절개가 있어, 경기장에서 바로 결전에 오른 26명의 선수에게 나누어주었다. 며칠 후 <대공보(大公报)>는 “상위 세 명의 우승자 모두 하북성 사람”이라고 대회의 결과를 보도했다.
최후의 전성기
절강성 국술유예대회가 훌륭하게 막을 내렸다. 해당 대회를 통해 국술을 널리 퍼트리고 민중이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해당 대회는 강남 인사들로 하여금 북권(北拳)의 위력을 알게 해주었다. 이후 손록당(孙禄堂) 등 무술명가가 강남으로 와 무술관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치니, 전체 남중국무술의 발전이 전개되었다.
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师)>에서 이야기되는 “오호하강남(五虎下江南, 다섯 호랑이가 강남으로 내려오다)” 또한 이번 무림대회와 불가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절강성 국술유예대회에서 몇 명의 중앙국술관 출신 선수들이 상위권을 휩쓸어 중앙국술관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힘입어 중앙국술관에서는 적지 않은 보통민중 및 학생 훈련반이 개설되었다.
1930년대는 중앙국술관의 교관과 지도원들이 기관과 학교를 나눠 적지 않은 무술교습소를 세웠다. 1932년 8월 장지쟝의 노력으로, 중앙국술관은 여자 교수반을 추가로 개설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거하면, 항전직전까지 중앙국술관의 각 무술학교(훈련반)에서 배양한 학생은 약 3~400명이었다.
1936년 6월 장지쟝은 9명의 엄선된 선수를 데리고 “중화민국체육대표단”이라는 시험팀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함부르크에 가 제 11회 올림픽에 참가했다. 당시 유럽인은 일본유도는 알았으나 중국무술은 몰랐다. 하얀색 비단 훈련복을 입은 중국 국술대 대원들이 강유상제(刚柔相济)의 태극권 시범을 보이자, 전 경기장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후, 진스셩(金石生)의 소림권, 류위화(刘玉华)와 코우윈싱(寇运兴)의 단도(单刀) 대련 시범, 푸슈윈(傅淑云), 류위화의 권법 대련시범, 정화이셴(郑怀贤)의 비차 곡예(飞叉) …… 독일관중은 눈이 휘둥그레져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당 올림픽에서 중국체육 대표단은 수상을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결승전에 들지도 못했다. 다만 탁월한 중국무술 시범은 다행히 중국체육계가 체면을 차릴 수 있도록 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중화국술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여러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그해 중국무술은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무술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항일전쟁이 터져 그 발걸음을 흐트러트렸다. 중앙국술관이 사천으로 옮겨가면서 그 가르치고 배움이 쇠퇴하였다. 수많은 국술관 학생들은 전선으로 달려나갔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중국무술 마지막 전성기는 거기서 멈추었다. 그때의 사람 황홀케 하던 무림인사들은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중국무술관련입니다. 다들 시간 있으시면 <일대종사>나 <사부> 영화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