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쓸데없이 명함 백 장 만드는 대표

in hive-196917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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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명함 백 장 만드는 대표


백수가 되어 신난 나는 가장 먼저 명함을 만들자고 마음 먹었다. 나눠줄 동료가 있는 건 아니고 공유할 업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은 회사 대표 놀이'에 딱 맞는 작업이란 바로 사무실을 꾸미고 명함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사무실이 없고 사무실을 마련할 돈도 없으므로 방 한 구석에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기의 커다란 책상과 커다란 모니터를 샀다. '사회에 나를 위한 작업 공간이 없다면 스스로 만드는 수밖에!' 라는 뻔뻔한 마음으로 모니터 받침대와 충전 되는 마우스 패드까지 구매했다. 그런데 역시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바로 명함이 없어서가 아닐까. 저렴한 가격으로 최상의 만족감을 주는 바로 그 물건.

지금까지에 있어 명함은 회사에서 대량으로 찍어내 이름만 살짝 바꾼 빳빳한 종이였다. 처음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함에 담긴 명함을 만나는 친구들마다 나누어 줄 정도로 자부심이 가득했는데, 계약이 만료되자 그 명함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종이가 되었다. 명함을 보고 있으면 과장되게는 과거의 영광을 작은 종이에 압축시킨 물건이 아닌가 하며 투덜거렸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뒤, 나는 요청 받지 않아도 내 명함을 직접 만드는 어른이 되었다. 현재의 기쁨을 담은 명함으로. 이 정도면 꽤나 그럴듯한 어른 아닌가.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자존감이 높은 사람.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으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하는 이 말이다.

평생 직장이라는 말은 사라진지 꽤 되었다. 2년의 내일채움공제가 너무 길다고 느껴질 정도로 우리는 이직의 삶, n잡러의 삶에 익숙하다. 자연스레 브랜딩이라는 단어는 기업을 넘어 개인에게까지 접목되었고 다소 박하기는 하더라도 그래서 그런지 모두가 브랜딩에 혈안이다. 자신의 가장 괜찮고 동그란 부분을 깎아 보여주고 내어준 다음 지식 부가 가치 산업으로까지 발전해 강의를 하거나 책을 내면 그게 브랜딩의 정점이라고들 말하는 것 같고. 직장이라고는 스타트업과 인턴만 해본 나지만 말을 하나 보태면, 돈이나 남을 위한 브랜딩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즐거울지 몰라도 나중에는 괴롭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호랑이굴 같은 브랜딩 시장에서 명함은 쓸데없는 물건이다. 잘 만든 명함보다 잘 만든 포트폴리오에 더 값을 매기는 사회여서다.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일일이 휴대폰에 저장할 바에야 카카오톡으로 연락처를 공유받는 게 더욱 편하다. 물론 리멤버라는 앱으로 명함을 찍어 자동으로 스마트폰에 인적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사람도 있으나, 온도를 재고 손 소독을 하고 마스크를 껴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기에 명함을 주고 받는 상황이란 점점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굳이 제주도 배송비까지 내며 명함을 만들어야 했을까, 라 물으신다면 당연히 네! 잘못하면 손에 베일 듯이 날카로운 명함만 쥐다가 뽀송뽀송하니 두텁고 모서리는 동그란 명함을 만지니 기분이 포근하다. 브랜딩 컬러 진단이라는 비용을 내지 않고 스스로 취향에 맞춰 색깔을 잡은 것도 한 몫 했다.

프리랜서로 백 일을 살아보니 회사 밖이 지옥인 건 알겠다. 프리랜서는 들어온 일 하나를 잘못 하면 하나뿐인 업체를 잃어버리는 지름길이 될 수 있으니 회사 안보다 더욱 조급해진다. 게다가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았는데도 책임감이 동반된다. 이제 와 밝히지만 어느날부터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마저 부담이 되었다. 예전엔 아무도 안 읽어 주어서 아무렇게나 썼는데, 이제는 발행 직후에도 바로 독자님들이 생겨서다. 어느 작가님께 "자기 검열 하지 마세요! 마음껏 쓰세요!"라는 말을 듣고부터는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지는 않으련지의 걱정을 접고 마음 가는 대로 썼지만.

명함을 만든 지는 백 일이 다 되어가는데 열 장도 채 쓰지 못했다. 반 이상은 친구에게 자랑할 용도로 보내준 것이니 명함이 지닌 역할을 반의 반절도 수행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면 뭐 어떠랴. 내 기분만 좋으면 되었지. 코로나가 끝나고 나중에 독자님들을 만나게 되면 책과 함께 명함을 드리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명함이 너무 많이 남아서요.

무기력한 날에는 커피나 차를 한잔 내리면 좋은데, 티포트나 드립백 커피가 없으면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한 잔 사다가 회사 대표인 척 한다. 침대나 의자에 앉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음료를 마신다.
할 일이 있으면 딱 두 시간, 게임을 한다면 한 시간 식으로 시간을 정해두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처럼 몰입하는 척한다. 그 정도도 충분하다. 나를 미워하기 쉬운 세상에서 자학을 멈추고 샤워를, 청소를, 취미나 일을 했다는 것만으로 무척 만족스러운 날이다.
_아무런 기쁨도 없을 듯한 날에, 『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

무기력한 날에는 명함을 만듭시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지망생이더라도 뭐 어때요. 경찰관이 되고 싶다면 공시생이라도 뭐 어때요. 개발자가 되고 싶다면 취준생이라도 뭐 어때요. 나중에는 쓰일 수 있을 테니까. 언젠가 제 백 장의 명함도 전부 사라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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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업무 때문에 만든 명함도 거의 그대로예요 ㅎㅎㅎㅎ
힘내세요 작가님~^^

업무로 만든 명함이 있으시군요! :> 감사합니다 파치아모님도 힘내세요!

명함 참 이쁜데요?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나를 표현해 주는 물건이긴 하네요. ㅎㅎ

세상에 소속감을 드러내는 물건 같더라고요. 칭찬 고맙습니다 :)

줄 곳이 그리 많지 않아도 소속감에 소속한 단체의 명함을 굳이 만들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ㅎㅎ

종이 한 장으로 소속감을 보여준다는 게 신기해요. 특히 회사 밖에서의 명함은 더욱 소중하더라고요!

내게도 예쁜 명함 한장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