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사] 기원전 27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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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B.C. 27,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is granted the title Augustus by the Roman Senate, marking the beginning of the Roman Empire.

기원전 27년에 카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받다. 이는 로마 제국의 시작이었다.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프린켑스 세나투스(원로원 제 1인자),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 (임페라토르)이자 로마 제국의 첫번재 왕조인 “율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개창자입니다. 대단히 뛰어난 정치가로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단 한번도 황제, 왕을 자처하진 않았습니다. 역대 로마의 프린켑스 중 “프린켑스 = 종신 임페라토르”라는 공식을 만들고 이를 아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자신의 혈율들에게 합법적으로 승계헤 프린키파투스 (원수정)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에는 아니지만 후대 사람들에게 로마 최초의 황제이자 유럽 최초의 황제로 평가 받습니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는 원체 이루어진 업적이 많으니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올라가기 전까지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깜냥을 잘 알아서 자신이 부족한 군사적 재능은 그 유명한 아그리파를 등용해서 일체를 맡기고, 내치에 신경써서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서양사에서는 카이사르 이상으로 능력자로 인정받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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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 유년기

어릴때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후는 옥타비우스) 입니다. 기전원 63년 9월 23일에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라트라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이인 율리아의 딸 아티아였습니다. 친모 아티아가 카이사르의 조카딸이니,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카 손자(종손)이 됩니다. 여튼 어린시절의 옥타비아누스인 옥타비우스는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아버지대에부터 원로원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전까지는 부유한 평민 집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서 쭈욱 성장하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성장을 계속하게 됩니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지만 어머니가 재혼한 사람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도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년이 되었을 때,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원정에 참여합니다. 이때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를 굉장히 좋게 본 것 같습니다. 그 힘든 원정길에 불평 한마디 없이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고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었죠.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히스파니아 속주를 탈환한 다음,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를 일리리아 지방의 아폴로니아로 보냅니다. 이때 옥타비우스는 그리스 문학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2) 내전기

이때 카이사르는 군사적인 재능이 결여된 옥타비우스에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붙여서 같이 보냅니다. 아그리파 특유의 솔직담백함과 성실함은 그 예민한 옥타비우스도 마음의 문을 열게했다고 합니다. 같이 아폴로니아에서 공부를하다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러자 바로 이탈리아 귀국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때 이름을 옥타비아누스로 바꾸게 됩니다. 일단 친구 아그리파와 극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비무장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하지만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조직해 둔 군대를 언제라도 로마로 보낼 채비도 이미 마쳤다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작업은 참 치밀하게 해 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또 얘기해 보도록 하죠.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친양자 입적에 필요한 모든 조치에 힘을 쏟습니다. 입양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었을때 비로소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바꾸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굴러온 돌이잖아요 카이사르는 본부인 사이에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은 클레오파트라와 낳은 카이사리온 뿐이었습니다. 딸도 있었으나 폼페이우스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다가 요절하죠. 그리고 유언장에 카이사리온 내용이 없는걸로 봐서 그냥 혼외자로 본 것 같습니다. 여튼18살의 옥타비아누스는 귀국 직후 카이사르파의 구심점이 되었고, 가장 춤성심이 많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 조치에 크게 실망한 사람이 안토니우스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안토니우스를 거의 유언 집행관처럼 취급했습니다. 당연히 다음의 황제 자리는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좋게 볼 수 없었겠죠. 그래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악수가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행동이 되었고, 또한 그의 아내는 풀비아의 여러 몰상식한 행동까지 문제가 되면서 결국 로마 시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행동이 되어 버리죠. 결론적으로는 안토니우스의 행동은 그의 군사적인 능력과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가 저평가 되는 원인이 됩니다. 결론적으로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보는 안목이 대단했음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됩니다.
여기에 카이사르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것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원로원도 가세합니다. 옥타비아누스를 18살짜리 애송이로 본 그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서 안토니우스까지 몰아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파인 키케로를 스스로 찾아가 앞으로의 일에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 이후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죠. 안토니우스가 키케로와의 사이가 최악이었으니, 옥타비아누스와 손잡은 키케로는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을 합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누굽니까?? 당대 최고인 카이사르가 인정한 후계자 그래서 키케로를 안토니우스를 쫒아내는데만 이용하고 키케로를 버려버립니다. 그 이전까지는 양의 탈을 확실히 쓰고 방심하게 두었다가 확실히 배신을 하고 키케로를 처형해 버립니다. 자신의 양아버지인 카이사르와는 다르게 옥타비아누스는 뛰어난 정치력을 이용 오히려 자신의 정적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없어버리는 능력을 이후에도 잘 발휘하게 되죠. 이제 카이사르의 유언을 제대로 집행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은 안토니우스를 압박하게 되고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도망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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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2. 2차 삼두정치

18세의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서 안토니우스를 몰아낼려고 하는 원로원의 계획은 착착 진행됩니다. 참으로 웃긴일이죠.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파의 적에 가까웠는데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를 쫒아내겠다는 일념하나로 군사통제권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쥐어 줍니다. 물론 혼자 군사권을 쥐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여서인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를 같이 딸려 보냅니다. 근데 무티나 해전에서 이 두사람이 공교롭게도 전사하고 맙니다…. 시기가 참 묘하죠. 몇몇 학자들은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여튼 군사권을 독점한 옥타비아누스는 이 군사력으로 원로원을 압박해서 집정관이 됩니다. 그리고 원로원이 몰아내려했던 안토니우스와 다시 화해하고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히스파니아 총독인 레피두스까지 끌어들여 제 2차 삼두정치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시시건건 방해하는 원로원을 척결해 버립니다. 탄핵 연설을 한 키케로의 손은 따로 잘려서 안토니우스의 분풀이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에 남아있던 브루투스 일파와 회전을 치르게 되고, 안토니우스가 대승하여 브루투스가 자결하고 결국 삼두정치 일파들이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이를 해방자 내전이라 일컷습니다.
이제 로마제국을 갈라 먹습니다. 부유한 동방을 안토니우스가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뺐기고 북아프리카만 가져갑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은근슬쩍 안토니우스의 것이라고 공인된 갈리아도 자기손에 넣게 되죠. 그리고 이외에 색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력을 키워 지중해의 해상권을 쥐고 로마로 들어가는 곡물 수송을 끊어버립니다. 카이사르 군단병의 보상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처제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을 함으로써 타협합니다. 산적한 문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보상 문제도 처리되고 다시 힘을 키우게 되자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전쟁을 선포 합니다. 이때도 안토니우스의 도움과 아그리파의 뛰어난 지휘로 시칠리아의 색스투스를 쫒차내고 시칠리아마저 통제권을 얻게 됩니다. 레피두스는 병사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자 항복하고 최고 제사장이라는 명에직을 얻습니다. 이제 로마의 서쪽은 옥타비아누스가 장악을 하게 되죠 그리고 이 시기에 일리리아 정벌을 아그리파와 단행해 일리리쿰 속주를 복원하여 최초로 내전이 아닌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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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스투스 폼페이우스

3. 2차 삼두정치의 종말

그럼 이러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머하고 있었을까요??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방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늘리고 동방으로 망명한 귀족들중 일부를 사면하여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세력은 옥타비아누스보다 훨씬 컷습니다. 그러나 군단병 대다수가 카이사르파 출신이어서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지지기반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삼두정이 5년 연장된 후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파르티아 원정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2만명의 군대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달량 2000명만 보내어서 난감해 하던 터에 클레오파트라의 재력으로 간신히 원정군을 편성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원정에서 고생을 많이 합니다. 보급선을 노린 파르티아 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죠. 하지만 간신히 승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는 이 승리이후 거대한 실책을 하게 됩니다.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한 것이었습니다. 개선식은 반드시 로마에서 해야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수호신에게 바치는 제사와 같은 의식이었기 때문이죠 이를 다른도시에서 한다?? 그러면 로마를 배신하는 행위랑 다를바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에게 휘둘려 시리아의 영토도 넘겨주고 클레오파트라사이의 아들에게 동방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클레오 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진정한 후계자로 선언해 버리는 멍청한 짓을 해 버립니다. 기회만 노리던 정치 10단 옥타비아누스가 가만히 있을수 없겠죠. 이 같은 안토니우스의 행적을 비판하고 국가의 적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을 하게 되는데, 이에 화가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해 버립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문구는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렌산드리아에 묻어달라” 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로마시민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안토니우스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장되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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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

이제 로마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려야 하겠죠?? 이제 그리스 서쪽의 악티움에서 한판 붙게 됩니다. 근데 여기서도 또 하나의 실수를 안토니우스가 하게 됩니다. 바로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스를 버리고 이집트에서 싸우자고 했던거죠. 휘하 장군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철수하는 안토니우스의 해군을 옥타비아누스 – 아그리파의 군대가 덮쳐버립니다. 전쟁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철수하는 적을 치기란 매우 쉬운일… 안토니우스는 해군 따위 별거 없고 육군으로 승부를 보면 이길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지만, 이 승부를 지켜보고 있던 그리스 의 모든 속주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 버립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생각대로 안되었던 거죠. 이제 안토니우스는 모든 기반이 잃어버립니다. 정치 10단인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1년간 그리스에 머물면서 확실하게 그리스를 장악하여 등뒤를 깨끗하게 만들고는 이제 이집트로 진격합니다. 이때 안토니아수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결을 시도해서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으로 협상을 시도하나 카이사르의 아들은 자신뿐이어야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살려둘 리 없었습니다. 카이사리온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클레오파트라를 전리품으로 로마에 데리고 갈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굉장히 유명 인사였습니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염문을 뿌렸고 안토니우스의 패배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클레오파트라가 유명인사일 수 밖에 없었죠.
클레오파트라를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있어서 이점은 치욕이었고 군주로서의 체면은 아에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과바구니에 독사를 숨겨와서 자결을 하게 되죠. 하지만 정치10단 옥타비아누스는 여기서 또 하나의 정치적 쑈를 벌입니다. 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같이 묻어준 것이죠…. 대단합니다. 진짜….
이제 삼두중에서 두명이 제거된 상태라면 이제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일만 남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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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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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온

4. 옥타비아누스의 무서운 점

옥타비아누스의 무서운 점은 서둘지 않았다는 겁니다. 서둘러 권력을 잡았을 때 로마가 분열되고 권권력자 암살되는 것을 봐온 그로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합법적으로 전부 얻어내고 맙니다. 우선 기원전 28년, 아그리파와 함게 1차 조정헌법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양부인 카이사르의 일을 떠올립니다. 노골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면서 군림했던 카이사르가 어떤일을 당했던가?? 현재 힘의 차이로 눌리긴 했지만 언제라도 브루투스처럼 암살자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기원전 27년 1월 16일 옥타비우나수는 원로원을 소집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 라고 발표합니다. 원로원은 당황했지만 기뻐했고 존엄한 자의 의미인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정치10단 아우구스투스의 교묘한 전략에 불과했습니다. 실권은 여전히 손에서 놓지않고 내전 때문에 임시로 부여된 권한만 포기합니다. 그래서 공화정의 뼈대는 있으면서 자신이 나라를 제1시민(프린켑스)이자 총사령과(임페라토르) 로서 죽을 때 까지 통치하는 원수정(프린키피투스)를 실시했습니다. 이날이야 말로 바로 로마의 제정이 시작된 날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붙였던 타이틀은 그대로 로마 황제의 칭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황제들의 칭호도 임페라로트 카이사르 (이름) 아우구스투스 라고 불리게 됩니다.

5. 평가

여기에는 내용의 길이상 아우구스투스의 이후 통치에 대해서 기록하진 않았지만 대단한 정치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아버지가 암살당하는 것을 보고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았으며 공화정을 무너뜨리면 어떻게 될지 알았기에 뼈대는 유지한체로 실권을 휘두르는 원수정을 기획하기도 했죠. 정치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했으며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자신에게 반대되는 세력은 확실하게 척결하는등 강한 모습과 온난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은 모범적인 군자상 그대로 하지만 권력을 사용할때는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이게 아우구스투스를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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