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미-중 관계에 관한 말기 암 선고

in hive-196917 •  8 months ago 




이 책의 저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부상하는 세력과 지배 세력 간에 발생하는 극심한 구조적 긴장을 말한다. 부상하는 신흥세력은 ‘신흥세력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자의식과 권리의식의 신장, 국제적 인정욕구, 에너지의 분출 등의 특징을 보인다. 이 거울상으로서 ‘지배 세력 증후군’은 쇠락에 대한 공포와 불안, 도전세력에 대한 편집적 반응을 보인다. 이 둘은 죽음의 나선처럼 현명한 지도자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돌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미국과 중국이 이미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걸렸다는 결론에서 어떻게 하면 두 나라가 파국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미국과 중국이 죽음의 나선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의 비슷한 예를 찾아보고, 여기서 교훈과 전략을 찾아야 한다. 이 책의 주제는 대충 이러하다. 이 책은 과거 500년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발동한 예 16 사례를 찾는다. 여기서 네 사례를 빼고 모두 전쟁으로 끝을 맺었다. 거칠게 계산해 보자면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가능성은 75%다. 희망적인 숫자는 아니다. 높지만 필연적이지 않은 두 나라의 충돌을 피하고자, 어떤 경우에 파국적 전쟁을 피했고, 어떤 경우에 전쟁으로 치달았나를 각각 교사와 반면교사로 삼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이를 저자는 응용역사학이라고 말한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걸린 나라들이 결국 충돌을 일으킨 지정학적 응력은 같다. 그러나 그 양상은 상당히 다르다. 16세기 초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충돌은 두 나라의 종심 외각, 동맹국에서의 대리전을 특징으로 한다. 대영제국과 프랑스의 패권 경쟁은 전 세계를 무대로 100년 넘게 지속하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프로이센은 내부 통일을 위해 프랑스를 전쟁 뛰어들도록 자극했다. 상대방의 핵심이익을 사소하게 취급한 미국은 진주만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미-중이 평화를 유지하는데 실마리를 줄 수 있다고 저자가 주장한, 충돌을 피한 예를 보자.

충돌을 피한 첫 번째 예는 15세기 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갈등이다. 당시 도전자 에스파냐와 지배 세력 포르투갈은 해양 무역과 새로운 식민지를 두고 벌인 경쟁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안을 바탕으로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음으로 충돌을 피했다. 이 두 나라는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따라야 하는 처지였다. 최악의 경우 파문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조약은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와 같은 경쟁자들로부터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으므로 두 나라는 이 조약을 준수했다.

두 번째 예는 좀 난감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1990년대 독일 통일 이후 통일 독일과 프랑스, 영국이 무력 충돌 없이 평화를 유지한 것을 투키디데스 함정을 벗어난 예로 들기 때문이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된 단일 초강대국 질서에서, 그 하위 동맹수준의 영국, 프랑스가 독일과 무력 충돌을 일으킬 리 있었을까? 어쨌든 이 책에서는 당시 유럽이 무력 충돌은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세 번째는 20세기 초, 미국과 영국이다. 20세기 초,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과 대서양 서편에서 미국의 힘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이유는, 미국의 국력 신장이 영국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까지 높아졌기 때문이다. 영국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미국의 경제, 군사적 역량은 영국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만약 미국과의 충돌은 영국의 어느 최고위 군사위원이 말했듯 “어떤 상황에서도 영국이 압도적이고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바로 코앞에 건함 경쟁을 벌이고 있는 독일이 있었다. 미심쩍은 프랑스도 있었고, 독이 못지않게 힘을 가늠하기 힘든 러시아도 있었다. 멀리 떨어진 신대륙의 일에 힘을 쏟을 여력도 없었다. 냉엄한 현실주의가 이들의 충돌을 막은 제1 요인이긴 해도, 문화적-언어적 공통점도 영국이 우아한 퇴장을 받아들이기 쉽게 했을 것이다. 

네 번째, 예는 미-소 냉전이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에 대한 살벌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실제 무력 충돌을 일으키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핵무기다. 이 책에서 말하듯,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지만, 핵무기는 예외“다. 상호확증파괴(MAD)는 어떤 경우에도 미국과 소련이 직접 싸워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가 됐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우발적인 충돌을 막기 위한 섬세한 약속, 핵무기 감축, 탄도무기 요격 프로그램의 금지, 등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데탕트를 이끌기도 했다. 이 차가운 전쟁에서 미국은 결국 승전했고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벗어났다.

 

이제 역사의 교훈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지금 중국의 도전이라는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금 미국의 ‘포용과 견제의 이중 전략(engage but hedge)’이 비현실적이며 전혀 효과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중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책임감 있는 주체로 거듭날 것이라는 생각은 안이하다.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될 생각이 없고, 미국의 지도력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영국이 미국의 부상을 받아드렸듯, 수용하는 방법이 있다. 강력한 경쟁 상대와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힘의 균형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아니면 힘 빼놓기 전략도 있다. 가능한 중국의 경제적으로 봉쇄하고, 내부 분열을 유도하고, 정치적으로 고립시켜 미국과의 상대적 힘이 강해지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이다. 소련과 했듯이 장기적 평화를 위해 협상할 수도 있다. 각자 내부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각각의 핵심이익을 분명히 하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수도 있다. 두 나라는 협력해야 할 전 지구적 의제와 공유할 수 있는 핵심이익이 있다. 이를 통해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여기까지가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이 나온 게 2017년이다. 지금 2024년,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저자가 강조했듯, 미국이 중국을 대하는 ”장기적 안목과 전략”을 수립한 것 같지는 않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외교에 관한 어떤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저자는 2017년에도 ”미국 민주주의가 치명적인 징후를 보이는 현실“에 대해 개탄했다. 강력한 도전자와 직면한 지금, 미국은 어느 때보다 허약하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개념을 형성한다. 그 언론은 서구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서구의 시각을 더 많이 접하고, 서구의 입장에서 세계를 판단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중국을 은근히 무시한다.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과 영향력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는 통념이 팽배하다. 어떤 시점에서 일본처럼 장기불황에 시달리다 이류 국가로 추락할 것이라는 희망 어린 예측이 수두룩하다. 정말 그런가? 

이 책의 전반부는 중국의 객관적인 힘을 소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PPP(Purchasing Power Parity)로 환산한 GDP다. 각국의 물가수준을 고려하여 실제 구매력에 가깝게 지표를 수정한 것이다. 이 지표가 실제 개인, 사회, 국가의 경제적 복리와 규모를 더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 이견은 별로 없다. 중국은 이미 2016년에 PPP로 바로잡은 국내 총생산(GDP)에서 미국을 넘어섰다. 지금 중국의 GDP는 미국보다 20%나 더 크다. 이 격차는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미국보다 높은 현실에서 더욱 벌어질 것이다. 일일이 중국의 부상을 증명하는 자료를 나열할 필요는 없다. 경제 규모, 기술, 군사력, 국제적 영향력 면에서 중국은 이미 초강대국화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저자가 말하듯 투키디데스 함정에 걸려든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나라가 함정을 벗어나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위 책의 내용을 고려하면 상황은 암담하다. 

우선 저자가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작동했던 500년간 16개의 사례 중, 함정을 탈출했던 4개의 예를 보자. 저자는 이 예에서 함정 탈출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중 대결에는 이런 실마리를 적용할 부분이 없다.

지금은 500년 전, 파문 위협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중재했던 교황처럼 초국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없다. 저자가 예를 들었던 국제법은 조롱받고 있고, UN은 거의 식물화 되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의 부상과 프랑스-영국 관계를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걸린 것으로 보는 것은 아예 비현실적이다. 당시 이들 나라는 미국의 하위 동맹국들로, 서로가 전쟁을 불사하고 지켜야 할 위신, 이익, 두려움이 없었다. 즉 이 사례는 아예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작동한 예로 부적합하다.

20세기 초, 미국의 초강대국화를 받아들인 영국의 예는 어떤가? 저자가 말했듯, 당시 영국은 현실적으로 자국을 아득히 뛰어넘은 미국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독일과 러시아, 프랑스와 같은 인접한 국가의 더 절박한 위협을 다뤄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사실상 같은 문화권이다. 비유하자면, 여러 적과 싸우느라 지친 왕이 자기보다 훨씬 힘세진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중국과 미국 어디도 쉽게 상황을 인정하고 상대국과 공존에 나설 것 같지는 않다. 두 나라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매우 거만하고, 문화와 인종 면에서 공통점은 없다. 게다가 한 나라의 국력이 다른 나라를 경쟁을 포기할 정도로 커진 것도 아니다. 

미-소 간 냉전은 약간의 실마리를 내줄 수 있다. 이 두 나라의 열전을 막은 것은 ‘상호확증파괴(MAD)’다. 핵무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보여준 파괴력이 오히려 평화를 지켰다. 어떤 이유에서든 핵전쟁은 안 된다는 전제하에 미국과 소련은 나름의 게임의 규칙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규칙에는 서로 간의 탄도미사일과 핵탄두의 수를 제한하는 것(중거리 탄도탄 제한협정, 전략무기 제한협정)은 물론, 서로의 핵 투발 수단을 요격하는 기술을 제한하는 것(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협정)도 포함된다.

현재 이 모든 협정은 지금 파기됐다. 미국과 중국이 MAD를 보장할 어떤 협상을 한다는 움직임은 없다. 더욱 음울한 상황은 ‘상호확증파괴’를 피하거나 무력화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다고 오해할만한 기술의 등장이다. 예를 들면, 강력한 탄도탄 방어체계, 반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속한 핵무기 투발 수단, 적국의 핵 통제를 무력화할 사이버 무기, 등이다. 모두 상대방에게 신속한 일격을 가하면서도 핵 보복은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게 만드는 기술이다. 만약 이런 판단을 하게 된다면, 적대적인 두 국가는 충돌 초기에, 더 기습적으로 대규모 핵 공격을 하려는 동기가 생긴다. 요약하자면, 미국과 소련의 평화를 강요했던 ‘상호확증파괴’는 점점 와해하고 있다.

 

이 책 내용은 말기 암 선고와 비슷하다. 진단은 명확한데, 치료법이 딱히 없다. 저자는 그래도 희망적인 예를 찾고, 거기서 응용할만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더 음울하다. 아무리 봐도 응용할만한 수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이 말기 암을 극복하려면, 두 나라는 훨씬 장기적 안목을 갖고 대화하고, 서로의 핵심이익을 자극하지 않으며, 서로를 덜 적대적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모두 현재 정반대로 가고 있다. 미-중이라는 지각이 충돌하는 판의 경계에 사는 우리는, 우선 분명한 선고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을 번영하게 했던 2차 세계대전 이후 질서와 평화가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현실을 부정(Denial)하고, 분노하고(Anger), 협상하고(Bargaining), 우울(Depression)해할 시간이 없다. 진단에 따라 대비할 뿐이다.

 

최소한 두 나라의 한 편에서 몸을 바치거나, 정권에 따라 편이 이리저리 바뀌는 것은 피해야 한다. 적과 함께 기습하여 날려버려야 할 존재로 비치거나, 힘으로 쥐고 흔들어 내부 여론을 유리하게 조종해야 할 허약한 존재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는 국내 사정도 음울할 따름이다. 

이 두 나라의 충돌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위 글과 다른 글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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