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teem]문명의 붕괴(Collapse) | 재레드 다이아몬드/ #4 마야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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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teem]문명의 붕괴(Collapse) | 재레드 다이아몬드

  1. 모아이섬
  2. 핏케언섬과 헨더슨 섬
  3. 아나사지문명과 그 이웃들- 북아메리카 남부의 문명들/ 고대문명연구팁들
  4. 마야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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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명의 붕괴

위대한 문명은 왜 사라졌나



    Collapse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Collapse)』. ‘과거의 위대한 문명사회가 붕괴해서 몰락한 이유가 무엇이고, 그들의 운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 책이다. 문명의 ‘붕괴’는 단순한 쇠락이 아닌 완전히 몰락해버린 사회들을 비교·분석한다.
  • 고려해야 할 다섯 가지 요인:
    1)환경 파괴, 2)기후 변화, 3)적대적인 이웃, 4)우호적인 이웃의 지원 중단, 5)사회에 닥친 문제에 대한 주민의 반응



재앙의  기본적 패턴

이스터 섬, 아나사지, 마야,그린란드의 바이킹





이미 황폐해지거나 밀림이 우거진 문명의 흔적에서도 고고학적 발굴 자료와 지질학,생물학,역사적 기록, 과학적 연대측정이 더해지면 수천년 전의 과거가 살아난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4. 마야문명의 붕괴

버려지고 잊혀진 채 반경 수 킬로미터의 숲에 감추어진 도시, 심지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 도시 만큼 내게 깊은 감명을 준 곳은 세계 어 디에도 없었다." 마야 사회는 선사 시대 사회의 붕괴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에게 여러 점에서 유리한 편이다.

첫째, 마야는 문자 기록을 남겼다. 물론 화가 치 밀 정도로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째,마야 도시들이 남긴 탁월한 예술품과 건축물에 매료되어 많은 고고학자가 마야 연구에 뛰어들었 다.
그 후 기후학자들과 고생태학자들이 마야의 붕괴 원인이라 할 만 한 기후 및 환경 변화의 징후를 찾아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마야어를 사용하며 옛 고향에서 살아가는 마야인들이 있다.
다행히 옛 마야 문화 의 많은 부분이 붕괴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덕분에 마야 땅을 방문한 초 기의 유럽인들은 당시 마야 사회에 대해 소중한 정보를 기록해두었다.

유럽인 이 마야와 처음 접촉한 때는 1502년이었다. (콜 럼버스가 신대륙발견 10년 후),
1527년 에스파냐인들이 마야를 본격적으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97년이 되어서야 에스파냐는 마야의 마 지막 왕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에스파냐인들에게는 거의 두 세 기에 걸쳐 마야 사회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1549년~ 1578년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 주교는 역사상 최악의 문화 파괴자로 그는 '이교도' 의 관습을 뿌리뽑아야 한 다는 이유로 마야의 모든 문서를 불질렀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 는 문서는 네 권에 불과하다. 한편 그는 마야 사회에 대한 자세한 기록 을 남겼다. 또한 한 원주민에게 들었다며 기록해둔 마야 문자의 해독법 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거의 4세기가 지난 후 해독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주로 환경적으로 취약하고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기술과 문화에서 뒤떨어진 작은 사회들을 주로 다루었다.

하지만 마야는 다르다. 콜럼버스가 도래하 기 전의 신세계에서 마야는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한 사회들 중 하나였다. 또한 문자 기록을 광범위하게 남긴 유일한 사회였 고, 신세계 문명을 주도한 두 심장부 중 한 곳에 위치했다.
마야의 환경이 카르스트 지형과 예측 불가능한 강수량에서 야기되는 문제를 갖지 만 세계의 보편적 기준에 따르면 그다지 취약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1. 그들은 삼림 파괴와 그에 따른 침식으로 환경 을 훼손시켰다.
  2. 기후 변화, 즉 가뭄도 마야의 붕괴에 한 몫을 했다.
  3. 마야 사회 내에서의 내홍도 큰 역할을 했다.
  4. 끝으로 정치 . 문화적 요인, 특히 왕과 귀족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쓰지 않고 경쟁적으 로 전쟁을 치르고 기념물 건립에만 몰두한 것도 마야를 붕괴로 몰고 간 원인이다. p 221

옥수수 농업의 한계

--> 전쟁하거나 사치하면 안되는 땅에서

다른 지역의 농부는 보통 네 배 이상이 먹을 식량을 생산해서 지배계급에게 바쳤다. 그러나 마야의 농부는 가족에게 필요한 식량의 2배를 겨우 생산할 수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마야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농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 한계가 무엇이었을까?

첫째, 마야의 농업은 단백질을 거의 생산 하지 못했다.
마야인의 주식이던 옥수수는 유럽인의 주식이던 밀이나 보리에 비해 단백질 함유량이 적다. 가축들도 몸집이 크 지 않아 유럽의 젖소, 양, 돼지, 염소 등에 비하면 살코기가 적었다. 또 한 다양한 곡물을 섭취한 중국이나 서(西)유라시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안데스 지역의 농부들에 비해서도 마야인이 섭취한 곡물 의 종류는 적었다. 안데스 지역의 사람들은 옥수수 이외에 감자, 고단 백의 키노아 등 많은 곡물을 섭취했고 라마(아메리카 낙타: 옮긴이)의 살코기까지 먹었다.

둘째 마아의 옥수수 농업은 생산력도 떨어졌다. 마야 지역의 습한 기후 때문에 옥 수수를 1년 이상 저장할 수 없었다. 미국 남서 지역의 건조한 기후에서 살았던 아나사지 사람들은 옥수수를 3년 이상 저장할 수 있 었다.
끝으로, 안데스엔 라마가 있었고 유럽인들에게는 말과 황소, 당나귀와 낙타가 있었지만 마야인들에게는 발을 갈고 짐을 끄는 데 이용할 만한 가축이 없었다.

마야에서 육상 운송은 전적으로 인간이 감당해야 했다.

가령 전쟁터에 나간 군대에게 식량을 보낸다고 해보자. 짐꾼이 옥수수 한 짐을 짊어지고 전쟁터까지 가는 동안 그 일 부를 먹어야 했고, 다시 돌아오면서 그만큼의 옥수수를 먹어야 했기 때 문에 군인들에게 전해지는 옥수수의 양은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 가 여행길이 멀어질수록 짐꾼이 먹어야 하는 양도 늘어나게 마련이어 서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때문에 군사 원정의 거리와 기간에서 큰 제 약을 받았다.

마오리족의 호전성?

보통 전쟁의 승패는 식량 공급에서 결정된다. 그 증거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역사에서 찾 을 수 있다. 마오리족은 예부터 서로 치열한 전쟁을 빈번하게 치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이웃한 부족끼리의 전쟁일 뿐이었다. 그들도 장거리 군사 원정은 불가능했다. 그들의 주식은 고구마였고 원정에 나선 군인들을 먹일 수 있을 정도로 고구마를 생산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감자를 가져왔다.

1815년부터 감자 재배가 시작되면서 마오리족의 식량 생산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 결과 1818년부 터 1833년까지 15년간 마오리의 역사는 피로 물들었다.
영국인들에게 감자와 총을 얻은 마오리 부족들은 그런 혜택을 입지 못한 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부족들까지 공격할 수 있었다.

마야 사회는 정치적으로 작은 왕국들로 분할되어 끊임없이 서로 전 쟁을 벌였다. 멕시코 계곡의 아스텍 제국( '치남파스' 농법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집약적 농법을 사용했다)이나 안데스의 잉카 제국(잘 건설된 도로 망에서 라마를 이용한 곡물의 운송이 가능했다)처럼 큰 제국으로 통일되지 못했던 이유도 식량 공급의 제약에서 찾을 수 있다.
마야의 군인들과 관리들은 소규모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장거리 군사 원정을 조직할 수 없었다.

훨씬 훗날인 1848년 마야인들이 멕시코의 토호들에게 항거해 폭동을 일으켜서 승리를 목전에 둔 듯했지만 옥수수를 수확하려고 전 쟁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마야 소왕 국들의 인구는 기껏해야 2만 5,000~5만에 불과했다. 왕국의 면적도 왕궁을 중심으로 걸어서 2~3일의 거리를 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왕이 식량 창고나 무 역을 직접 관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도 찾아지지 않는다. p 233

마야의 구역 중 가장 큰 곳이
'코판 구역' 으로 면적은 5평방마일이다.

토양침식

코판 부근의 땅 은 대부분 가파른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골짜기의 토양에 비해서 언덕의 토양은 비옥한 편이 아니다. 언덕의 경사지는 급속히 침식되고, 10년 내에 생산성이 4분 의 3가량 떨어지게-된다. 집터의 수로 짐작해보면 코판밸리의 인구는 5세기부터 가파르게 증 가해서 750~900년경에 약 2만 7,000명까지 도달했던 것으로 여겨진 다.

마야의 기록에 따르면 티칼과 테오티우아칸의 귀족들과 관계된 사 람들이 426년에 이곳에 도착하면서 코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650년 부터 750년 사이에 왕들을 찬양하는 기념물들이 대대적으로 건설되었다.

권력,사치,경쟁

700년 이후에는 귀족들이 경쟁적으로 그들의 궁전을 짓기 시작해 서, 800년쯤에는 약 20곳에 궁전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약 250명을 동 시에 수용할 수 있는 방들을 갖춘 50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 져 있다. 그러나 왕과 왕궁, 귀족들과 그들의 궁전들도 농부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가장 먼저 정착 해서 농사를 시작한 곳은 골짜기의 저지대인 코판 구역이었고, 인구가 증가한 까 닭에 휴경기를 단축하고 이모작과 약간의 관개 시설로 저지대에서의 농작물을 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650년경부터 사람들은 언덕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덕 비 탈은 한 세기가량만 경작된 듯하다.

환경파괴, 인구

곧 모든 사람이 다 시 골짜기에 모여 살았다. 언덕에 살던 사람들이 다시 골짜기로 내려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골짜기에 세워진 건물들의 기초를 조사해보면 골짜기가 8세기에 퇴적물로 덮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달리 말하 면 언덕 비탈이 침식되면서 토양의 양분이 골짜기로 홀러내려갔다는 뜻이다

코판의 인구는 왕 과 귀족이 줄어든 것보다 더 큰 폭으로 감소되었다.
950년경 1만 5,000명 정도/ 전성기의 54퍼센트인 셈이다. 그 후 인구는 꾸준히 감소되어. 1250년경에는 코판 밸리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 후 숲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도 코판밸리에 사람이 없었다 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붕괴의 복합적 요인들

마야의 역사에는 고전기의 붕괴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일부 지 역에서 두 번의 작은 붕괴가 있었다.
150년경 엘미라도르를 비롯한 마야의 일부 도시들이 붕괴된 적이 있었고,
6세기 말 과 7세기 초에 티칼에 하나의 기념물도 세워지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또한 고전기의 붕괴를 이겨내고, 그 이후에 또다시
1250년경 에 몰락한 치첸이트사, 1450년경에 붕괴된 마야판이 있었다.
고전기의 붕괴는 결코 완전한 붕괴가 아니었다.

수십만의 마야 인이 살아남아 에스파냐 사람들과 싸웠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남부에서 과거에 마야의 중심이었던 곳 은 거의 완전히 버려졌다.
도시들의 붕괴는 실제로 '권력의 순환(power cycling)' 에 불과 했다.

예컨대 일부 도시는 더 강력해졌고, 그 후 쇠락하거나 정복당했 지만 다시 힘을 되찾으면서 이웃 도시들을 정복하는 형태였다.

562년 티칼 은 경쟁자이던 카라콜과 칼라크물에게 정복당다.
그러나 티칼은 조금씩 힘을 되찾아 마침내 695년 이후 많은 도시들을 병합 시켰지만 고전기에 붕괴되고 말았다.

마야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도시들은 각각 다른 흥망성쇠 를 겪었다. 예컨대 유카탄 반도의 북서부에 위치했던 푸크는 700년경 에 거의 빈 땅이었지만 750년 이후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반면 에 그때 남부의 도시들은 붕괴되고 있었고, 900년부터 925년 사이에 잠 시 인구가 증가되는 추세를 보였지만 950~1000년에 다시 붕괴되는 비 극을 맞았다. 마야 중심부, 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 중의 하나가 세워진 엘미라도르는 기원전 200년에 시작되어, 150년경에 버려졌다.

1.기후

마야의 붕괴 원인을 이해하는 데 주목해야 할 현상은 가뭄 이다.

호수 바닥의 퇴적층에서 추출한 퇴적물에서 우리는 마 야의 가뭄과 환경 변화를 추론해볼 수 있다. 가령 가뭄으로 호숫물이 중발해서 물의 농도가 짙어지면 호숫물에 용해된 석고, 즉 황산칼슘이 침전된다. 동위원소 산소 18은 농도가 짙어지는 반면에, 물에 함유된 가벼운 동위원소 산소-16은 대기 중으로 증발한다. 호수에 서식하는 갑각류는 산소를 흡수해서 껍질 속에 저장한다. 그 산소는 퇴적물 속에서 그대로 보존되어 때문에 그 작은 동물들이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산소동위원소들을 분석할 수 있다. p245

기후학자들과 고생태학자들에 따르면
마야 지역이 기원전 5500년부터 기원전 500년 까지는 상대적으로 습한 지역이었다가 마야 문명이 발흥하기 직전, 즉 기원전 475년부터 기원전 250년까지는 건조한 기후였다. 기원전 250년 이후 기후가 습하게 바뀌 면서 고전기 이전의 마야 문명이 순조롭게 발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 정되지만

기원후 125년부터 250년까지 다시 가뭄이 닥치면서 엘미라도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붕괴한 것으로 여 겨진다.
다시 습한 기후가 찾아오면서 고전기 마 야의 도시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600년경에 닥친 가뭄으로 티칼이쇠락했다.
최악의 가뭄이 760년경에 시작되어 800년에 절정을 이루 면서 고전기 마야가 속절없이 붕괴된 것이라 추정된다.

여러 도시들이 시간적 차이를 두고 붕괴했지만 세노테, 우물, 호수 등에서 안정된 물 공급을 받은 도시들은 살아남았다.
가장 타격을 입은 지역은 남부의 저지대였다. 첫째,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다. 둘째, 지표가 지하수면에서 너무 높이 있어 비가 내리지 않을 때 물을 구할 수 없어 심각한 물 문제에 봉착 했다. 고전기 남부의 저지대는 인구의 99퍼센트를 상 실했다.

전쟁

전쟁도 농지를 줄이는 요인 중의 하나였다. 두 왕국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위험지대에서 어떤 농부가 편안하게 농사를 지었겠는가!

고전기 마야가 붕괴되었을 때 마야인들에게 가뭄이 처음 닥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혹독한 가뭄이었다. 그리고 고전기의 마야가 붕괴된 시기에는 이주할 빈 땅도 없었다. 아 있지 않았다.

왕과 귀족들

'왕과 귀족들이 그들의 사회에 내재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부를 축적하고 전쟁을 벌이며 경쟁적으로 기념물을 세우고. 이 런 행위를 뒷받침할 만한 식량을 농부들에게서 갈취하려는 단기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지도 자가 그랬듯이. 마야의 왕들과 귀족들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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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놔두면 야만으로 가버리는 인간들...
문명과 야만 사이의 끝없는 전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