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양반전? 정규직전?

in hive-196917 •  5 years ago 

양반전 아니 정규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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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正規)란 대저 땅 깨나 보유했거나 입에 금숟갈 물고 태어난 양반은 아닌, 중인(中人)들 가운데에서 그 노동과 생활의 질을 달리하는 이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며 비정규(非正規)라 함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예로부터 경기도 영종진에는 그 두 집단이 섞여 살았다. 어느 날 주상 전하께서 즉위 후 변방을 순시하시다가 그 두 집단 간에 드리워진 차이를 가슴 아파하시며 하교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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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은 무엇이며 비정규직은 무엇인가. 막비왕민(莫非王民)! 그 누가 왕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냐. 인천 부사와 영종진첨사는 하시라도 빨리 그 차이를 없애고 내게 보고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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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기절초풍한 부사와 첨사는 상의하여 우선 비정규 가운데 타의 모범이 되고 성실했던 자를 골라 시험삼아 정규를 삼아 보고자 하였다. 이를 널리 공표하니 한 늙은 비정규가 손을 들었다. “정규는 아무리 연차가 낮아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수십 년을 일해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소인이 장차 정규가 되어 보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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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와 첨사는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이는 전하의 뜻이니 네 뜻이 참으로 전하의 마음과 같도다. 우리가 정규와 비정규를 모두 모아 놓고 이를 증인삼고 증서를 만들어 본관이 서명할 것이다.” 부사와 첨사는 관부로 돌아가 관내의 정규와 비정규, 그리고 양반과 평민 모두를 동헌뜰에 모았다. 그리고 정규직 사령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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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와 첨사는 양반 귀족으로 정규와 비정규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니 정규가 취해야 할 바는 정규에게 물어 정규가 행하는 그대로를 적어 가르치라 하였다. 이에 정규 하나가 문서를 작성하여 비정규 앞에서 준엄하게 읽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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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통(文統) 3년 모월 모일에 이 문서를 만드노라. 비정규가 정규로 바뀌니 이는 파천황과 같은 일이요 성은이 하해와 같음이라. 비정규는 이제 ‘비’(非)자를 뗌에 있어 다음과 같이 행하고 익히고 새길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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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정규는 넷으로 구분된다. 약간의 법과 기타 과목을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각종 고시 급제요, 그 다음으로는 하급 공무원이요, 다음으로 공기업 정규요, 그 다음으로는 대기업 정규이며 이 아래로는 중소기업 정규도 있으나 대기업 비정규만도 못하며.... 어쨌든 그러하고 그 아래로는 일괄로 비정규라 일컫는다. 정규직 사령장은 길이 2자 남짓한 것이지만 정규의 이익은 막대하다. 일단 이 사령장을 얻기만 하면 웬만하면 잘리지 아니하며 상당한 연봉을 받고 안정적인 노동 환경이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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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만드는 공정에서도 근무시간에 와이파이를 요구할 수 있으며 형편이 좋은 곳 정규의 경우 자식의 유학 비용까지도 타먹는 경우도 있다. 비정규들처럼 해고의 공포에 날마다 사로잡힐 이유가 없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비정규에게 주거나 하청을 내리되 책임은 모두 그들에게로 돌아가며 사고가 날 경우 ‘우리는 원칙을 지켜 교육을 시켰는데 들어먹지를 않았노라’고 하면 탈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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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정규의 경우는 회사 사정에 따라 형펀이 천차만별이고 공무원 정규는 직급과 부처에 따라 일하는 양이 여러 갈래이나 공기업 정규들의 경우는 실로 성은이 망극한 곳이다. 엄격한 시험을 거쳐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서만 따내는 작위와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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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던 공기업 정규가 별안간 사령장을 집어던지며 인천부사와 영종진첨사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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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법은 없사옵니다. 소인들 청와궁 앞에 나아가 머리를 찧고 이마에 피를 내어 외칠 것이옵니다. 주상 전하께서 기회는 공정할 것이라 하셨나이다. 여러 번 그러셨나이다. 저희가 이 작위를 얻기 위해 들인 공은 하늘에 낳고 흘린 땀은 백두산 천지를 짜게 만들고도 남으니 저들 같은 비정규를 어찌 하루 아침에 우리의 자리에 앉힌단 말입니까. 아아 하늘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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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태에 부사와 첨사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데 늙은 비정규가 나와 입을 떼었다. “소인도 질문이 있습니다. 정규님께 여짜와도 되올는지.” 부사와 첨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정규가 정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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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규님들이 들인 공은 무엇이고 땀은 무엇이오.”
“당신들이 놀 때 우리는 공부를 하였소. 잡과의 그 많은 과목들을 외우고 서당에 서원에 돈 갖다바치기로 고래등같은 기와집 전셋값을 날렸소. 당신은 사서 삼경이 무엇인지나 아시오. 당신들이 판판 놀 때 우리는 공부를 하였고 노력을 하였으며 노량진 고시촌에서 컵밥 먹으면서 수년을 꿇었소. 그래도 공이 무엇이고 땀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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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맞으나 많은 기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잘했다 하나 못한 이들이 여러분에 비해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사서삼경을 얼마나 외우셨는지 모르겠으나 이 영종진 항구 출입 업무에 사서삼경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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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그대는 애초에 나라의 과거 제도와 관리 등용 체계 자체를 무시하고 있소. 열 개 틀린 자보다 아홉게 틀린 자가 우월한 것이고 다섯 개 외운 자가 세 개 외운 자보다 위에 있는 것, 그게 공정함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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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공부할 때 우리는 일을 해야 했다면 그게 판판 논 것입니까. 여러분들의 부모가 고시촌 여막 값이라도 주고 노량진에서 컵밥 먹을 때 여러분한테 컵밥 팔았던 주막집 시비(侍婢)들은 평생 여러분과 같은 반열에는 설 수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들 사서삼경 공부했던 서당비 서원비, 그게 없어서 여러분과 함께 시험 보지 못한 사람들과 여러분이 경쟁해야 한다는 게 공정하다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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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환경에서도 노력하는 사람은 다 결실을 거두는 것이오. 무능한 자들의 말장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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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와 비정규는 나랏법으로 정해진 고용의 형태이지 신분의 차이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문서를 다루고 관령을 집행하지만 저희는 문을 지키고 파수를 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권리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희에게 여러분의 권리를 일부라도 허용하는 것은 그리도 고깝다는 말씀이십니까?”
“시험을 보란 말이오 시험을”
“직군이 다르고 분야가 다르며 일이 다른데 여러분의 시험을 말씀하시는 것이 공정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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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일을 하다가 별안간 정규가 되어 거들먹거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평소 거들먹거리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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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말이오. 우리가 거들먹거린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렇게 할 거라는 이야기지. 잡일을 하며 몇 푼 받다가 갑자기 연봉 5천만냥을 받으면 당연히 그리 되겠지.”
“그 잡일하다 5천만냥 말도 사실은 아닙니다만, 왜 우리는 그 돈에 거들먹거리고 여러분은 국민의 공복이 되신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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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우리는 시험을 봤다고 하지 않았소! 여러분과는 다르다는 말이오.”
“결국 정규 여러분들은 비정규들이 여러분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게 싫으시다는 말입니다. 평생 보장되는 일에 여러분과는 다른 사람들이 끼는 게 싫다는 것입니다. 행여 여러분들이 받는 새경이 줄어들까 지레 설레발을 치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문제는 시험을 누가 잘보나가 아니라, 잘 본 사람과 잘 못 본 사람 사이를 신분으로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 길고 짧음을 가려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의 차이를 줄이는 일입니다. 시험 잘 보았다고 평생 거칠 것 없고 시험 못 보았다고 평생 빛 볼 일 없다면 그것이 어찌 ‘조선지옥’(朝鮮地獄)이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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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그대들도 그래봐야 중인이며 노동자인 것을! 더 좋은 조건에서 더 많은 이들이 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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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끝낸 비정규 노인은 첨사와 부사에게 깊이 절하고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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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정규(正規)직이라 으스대나 전혀 바르지 아니하며 자신들의 특권을 전혀 양보할 의사도 뜻도 없이 다른 이들의 권리를 가로막는 데만 목소리 높으니 자신이 강도인지도 모르는 강도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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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더러 정규 하라 하시면 이런 강도 아닌 강도가 되라 하니는 것과 같으니 소인은 사양하겠습니다. 또한 온 나라에 만연한 문제를 도외시하고 주상 전하의 성은에만 의지하는 것은 언발에 오줌누기일 뿐이니 첨사와 부사님네들은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애초에 정규와 비정규를 가른 양반님네들이 더 큰 도적이라는 것도 기억하시구요.” 하고 동헌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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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 밖에서는 잡과 준비생 15만 명이 몰려나와 자신들의 꿈을 꺾는 정규직화 결사 반대를 악쓰고 있었다. 비정규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고 탄식하였다. “지옥이 따로 있는가. 아귀들이 산다면 지옥이지. 날이 갈수록 더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할 텐데 통과한 소수만 즐겁고 그렇지 못한 다수가 비참한 나라가 나라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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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years ago (edited)

ㅋㅋㅋ 역시 기발하시네요

세상에 이런 법은 없사옵니다. .... 저들 같은 비정규를 어찌 하루 아침에 우리의 자리에 앉힌단 말입니까.

이런 스스로 도적인지 모르는 도적이 아직도 많아 안타깝네요

갑갑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