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국공내전기 미 해병대 중국 파병과 북-중 군사 동맹의 형성, 진영기(고려대)
5월 25일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개최된 전쟁사 포럼은 우리 사회전반의 전쟁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추진되었다. 전쟁이란 현상을 군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문제인식에서 출발한 전쟁사 포럼에는 전쟁 학계, 법조계, 언론계, 영화 및 출판계 및 군출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가했다.
전쟁사 포럼은 내년이 6.25 전쟁 70주년이라는 점에서 우선 6.25 전쟁과 관련한 내용을 주로 다루기로 했다. 이번에는 두사람의 발표가 있었다. 먼저 고려대 역사연구소 진영기 연구원이 ‘제2차 국공내전기 미해병대 중국파병과 북-중 군사동맹의 형성’을 주제로, 그리고 서울경제신문의 권홍우 기자의 ‘시민과 군인, 그 승리의 역사’를 주제로 각각 발표를 했다. 아래 내용은 진영기 연구원의 발표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진영기 연구원은 중국 북부 파병에 관련된 미 해병대의 작전 사료와 미 합참의 군사 정책 관련 자료들을 중심으로, 제2차 국공내전 시기의 미 해병대의 중국 북부 파병이 중공군에게 미친 영향과 동시기에 이뤄진 중공에 대한 북한의 군사원조와의 연계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발표내용
미 해병대의 중국 북부 파병은 ‘포위작전'(Operation Beleaguer)이라는 명칭으로 1945년 10월 1일부터 국공내전 끝나는 949년 5월 16일까지 이루어졌다. 본 발표에서는 미 제3상륙군단이 중국 북부에 상륙한 1945년부터 제3상륙군단의 주력인 제1해병사단과 제6해병사단이 미국 본토로 송환되는 1947년까지의 작전 내역을 다루었다.
1945년에서 1947년까지 중국 북부 지역에서 주둔하는 동안 제3상륙군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접수했다. 동시기에 제3상륙군단은 중국 북부에서 중공군과 충돌하였다 . 중공군은 미국의 전후 안정화 활동에 반대하고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과 충돌을 불사했다. 해당 시기에 북한은 중국에 본격적인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결국 미 해병대의 개입으로 입지가 어려워진 중공군을 북한이 지원하면서 북중 동맹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해병대의 중국개입과 긴밀한 북중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종식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자, 마오쩌둥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 해제를 서두를 것을 명했다. 소련군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중국 공산당은 만주와 중국 북부에서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고 전후 중국의 주도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한편, 장제스는 일반명령 제1호에 근거하여 중공군에게 현 위치를 벗어나지 마라고 요구했으나, 중공군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 와 만주 지역의 확보를 위한 군사 활동을 지속했다. 국공합작 기간 동안 잠재해 있던 국공간의 균열은 일본군 무장해제 및 항복 접수 문제로 인해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국공 내전이 재발할 경우, 소련의 개입과 영향력이 확장될 것을 우려하여 국민당과 중공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하고, 연합 정부를 구성하여 중국대륙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미 해병대 제3상륙군단의 파병은 전후 중국 내 국공 분열 양상과 소련의 확장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군사적 대응전략이었으며 전후 안정화를 고려한 강온 양면 성향의 대외 전략이었다.
미 해병대의 중국 파병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본국 송환, 그리고 중국 내 연합국 거류민 및 자산 보호 등 전후 안정을 주목적으로 했다. 중국 북부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본국 송환을 개시하는데 있어 충칭 정부를 지원하는 임무가 있었으나, 중공군을 자극하지 말라는 중립적인 군사 작전 수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만주와 화북에서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제3상륙군단의 관할지역인 베이핑, 친황다오, 톈진 등 주요 도시와 주요 교통로 및 통신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다. 미 제3상륙군단은 중공의 전략에 차질을 초래했다. 결국 중공군은 1945년 말부터 1947년 초까지 특히 허베이 지역 내 미 제1해병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대 중국 정책방향으로 인해 제3상륙군단은 중공군의 적대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대응조치는 취하지 못했다. 미 해병대는 화북의 중요 거점들을 지키면서 전후 안정 지원 활동을 수행했다. 이는 미 해병대의 중국 파병이 국공 합작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대 중국 정책에 따라 중립적이고 평화 유지 작전 차원에서 시행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 해병대의 전후 안정화 작전은 만주 및 화북 지역에서 전략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중공군에게 위협이었다. 미 해병대에 대한 중공군의 압박 실패는 전략적 기반의 약화로 이어져 중공군이 남만주에 고립되는 위기를 초래함과 동시에 북한과의 군사적 동맹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공군의 위기 상황에 대해 북한은 1946-47년에 걸쳐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중공군에게 전력 회복의 기회였으며 국민당에 대한 공세의 전환점이 되었다. 중공군은 북한을 회랑으로 삼아 전략적 철수를 완수할 수 있었으며, 병참기지로서의 지원을 받아 재정비의 시기를 거칠 수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항구 및 교통로를 통해 북만주 근거지와 전략적 연결을 되살리면서 총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 중공에 북한군의 증강을 목적으로 한 조선족 부대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미군정과 적대적인 남한 정부로부터 동맹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중공은 2개 사단급의 조선족 부대와 14,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켜 북한의 군대 창설에 기여했다.
국공내전을 통해 미국은 중공의 중국 본토 장악과 북한-중공 관계를 고려하여, 전후 극동 안보 전략과 대외 군사원조를 통해 공산 세력의 확장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과 필리핀을 주요 전략 거점으로 삼고, 군사 원조를 통해 남한이 북한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중공 및 북한 정권을 봉쇄하고 있던 미국은 북한이 남침을 개시하자 신속하게 참전했다. 이렇게 볼 때,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의 미 해병대와 중공군의 충돌, 그리고 북한의 군사원조는 전후 동북아 지역에서의 냉전 형성에 있어 군사적 대립 구도 및 동맹 관계의 초기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었으며, 국공 내전과 6.25 전쟁의 연계성 연구에 중요한 군사(軍史)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토의내용 요약
상기 내용 발표후 진행된 토론에서 미국의 제3해병군단의 파견이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미국이 국부군과 중국 공산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국 국부군에 대한 지원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미해병대가 상륙한 지역이 1920년대 중국의 군벌이 활동하던 지역으로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미해병대의 작전지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의 진로와 유사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군대는 미해병대를 침략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이렇게 중국의 핵심이익 지역에 미 해병대가 참가한 것만으로도 미국이 중국에 대한 안정화작전은 부차적인 목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중국에서 미해병대가 수행한 작전과정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갑자기 세계질서를 책임지는 상황에 봉착하면서 보여준 미숙한 점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중국공산당 군대가 북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대한 추가설명도 있었다. 북한에는 일본군이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무기가 있었는데 김일성은 거의 7-80%정도를 마오쩌뚱에게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도 군수품과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김일정은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했다고 한다. 북한은 무기부족으로 군대를 창설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군대를 우선적으로 지원했다. 결국 중국은 국공내전의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의 지원을 받아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군의 군수관련한 기록중에서 일본무기와 장비가 많이 있었다는 추가설명도 있었다. 따라서 중국이 6.25 전쟁이 벌어지고 인천상륙작전이후 참전하게 된 이유도 국공내전시 북한의 지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린바오가 세력투쟁에서 패배하자 만주지역에서의 공산군대 활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과 함께,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만주에서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인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연변대학교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도 있었다.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었으나 국공내전 당시 북한의 역할을 고려해 보면, 북한이 중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지원을 받았다는 관점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