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복제되어 양육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진짜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불치병에 걸린 인간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 수단의 희생양. 바로 ‘장기기증’이다. 장기기증 후 몸 상태에 따라 몇 번이고 육체를 도려내는 기증을 반복한다. 단 한 번의 기증으로 소멸되는 존재도 있고, 수차례나 기증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인간들이 이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얼마나 많은 기증을 통해 ‘진짜’ 인간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의 잔인한 모습인지, 아니면 단지 종족 보존을 위한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인지 묻는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혹시 무엇을 놓치고 있진 않은 것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멍한 느낌과 함께 "나를 보내지 마"라는 작은 메아리가 고요한 어둠 속에서 명료하게 들려온다.
복제되어 태어난 이들은 정부의 통제 하에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학교라고 칭하는 테두리 안에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한다. 폐쇄적인 특징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학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지만, 그들의 신체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구조로 개조되어 있다. 신체적으로 성교가 불가능하거나, 성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식을 낳을 수 없을 뿐이다. 유전적인 요소를 거세당한 이들은 종족 번식과 생존에 대한 의지까지 상당 부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돌파구를 탐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들의 운명을 차분히 받아들이면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들을 길러내는 학교에는 진짜 인간인 선생님들이 있다. 선생님들은 이들에게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도록 가르친다. 그중에 뛰어난 작품들은 특정 시기 때마다 찾아오는 ‘마담’이라는 인물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아이들은 궁금해한다. 도대체 자신들의 작품을 어떤 목적으로 가져가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아이들은 직관적으로 느낀다. 그들의 운명과 작품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금기사항이다. 아이들 스스로도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학교와 선생님들에 의해 의도된 학습인 것이다. 때문에 누구도 현실을 맞서 전면전을 펼치지 못한다. 그렇게 어느 것 하나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 채 그들은 어른이 되어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면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보내진다. 비록 미래의 ‘장기 기증자’들이 모여사는 통제된 공간이지만, 그곳에서는 여행도 가능할 만큼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도망치거나 자신들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주위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생활한다. 보잘것없는 욕심과 야망은 그들이 가진 전부이다. 태어날 때부터 형성된 심리적 경계선은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순응하는 존재로 낙인찍어 버렸다.
그들 운명의 마지막 여행지는 무색무취하다. 운전을 배우고, 장기 기증자들의 회복을 돕는 간병인이 되었다가, 곧 저 자신도 장기 기증자가 되어 간병인의 도움을 받다가 끝내 소멸된다. 그들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 안에서 기계처럼 생활하다 삶을 마감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의미 있는 문학 작품이다. 올해가 2018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2017년 수상작이라는 의미는 오늘날 문학계가 바라보는 문학의 가치를 고찰해 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일본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차분한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다. 아이들의 심리 묘사 또한 압권인데, 주목할만한 점은 그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공감대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체에는 담담한 껍데기 속에 예민함이 숨겨져 있다. 비록 읽는 속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독자라면 곧 이 책의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인간과 복제된 존재들의 관점을 넘나들며 무거운 시선으로 읽거나, 복제된 존재들은 잊어버리고 순수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한 편의 성장 소설로 읽어도 꽤 괜찮은 편이다. 그만큼 다양한 매력을 담고 있다.
미래의 우리들도 현재의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가정한다면, 모던클래식이라는 장르로 불리는 현재진행형의 고전을 미리 만나보는 것도 즐거운 독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나른한 오후, 일독을 권해본다.
책 속의 한 줄
내가 멋대로 규칙을 어긴 때가 있다면,
토미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지 두어 주 후 실제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차를 몰고
노퍼크에 갔을 때이다. 특별히 찾은 것도 없었고,
해안 끝까지 간 것도 아니었다.
-Page. 392-
리뷰를 보고, 책을 읽고 싶어졌습니다. 우리 미래에 닥칠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설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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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감사드립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오나, 문체나 분위기는 담담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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