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디 이야기

in kr-cat •  5 years ago 

그 아이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건 2006년 11월 23일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짝꿍네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짝꿍이 웬 꼬질꼬질한 새끼 고양이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웬 고양이냐고 묻자 짝꿍은 당황하면서 말했다. "너 버스 태워 보내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만났어. 옆집 대문 앞에서 빽빽거리면서 울더라고. 안쓰러워서 몇 번 쓰다듬어줬더니 집까지 따라오는 거야. 애가 좀 아파 보이길래 일단 박스 안에 티셔츠 같은 걸 깔아줬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네."

다음 날 나는 우리 집 고양이들 모래랑 사료를 챙겨서 짝꿍네로 갔다. 사진으로만 봤을 땐 픽 쓰러질 것처럼 아파 보여서 걱정했는데 꽤나 건강해보였다. 녀석은 금방 적응한 것 같았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젖은 빨래처럼 박스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녀석이 눈을 빛내며 박스 밖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녀석은 기어코 박스 탈출에 성공했다. 박스 안에 넣어 두었던 밥그릇을 꺼내서 녀석 앞에 밀어주었다.

그 날 저녁 나는 녀석을 데리고 집에 왔다.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짝꿍네 집에 두는 것보다는 사료도 있고 화장실도 있는 우리 집이 그나마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키울 생각으로 데리고 온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울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면 다른 곳에 입양 보낼 생각이었다. 우리집 첫째와 둘째를 데려온 고양이 카페 입양 게시판에 글을 썼고 몇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중 제일 괜찮아 보이는 사람과 만날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서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 다들 이렇게 힘들 게 보내는 거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가까스로 계단 몇 개를 내려가봤지만.. 나는 그냥 거기까지였다. 정말 죄송하다며 문자를 보냈더니 그 분은 너그럽게 이해해주셨다. '정이 벌써 많이 드셨나봐요. 그 아이에게도 참 잘된 일이네요.'

이름을 로디라고 지었다. 길에서 만난 아이라서 로디, 늘 신나고 경쾌한 멜로디 같은 아이라서 로디. 우리집 첫째 씽은 쥐약을 먹고 죽은 엄마의 빈 젖을 빨다가 굶어죽기 직전에 구조되었고, 우리집 둘째 하루는 아파트 단지에서 사람 손을 너무 많이 타는 바람에 어미 고양이가 돌보지 않아서 크게 쇠약한 상태로 구조되었다. 로디는 앞선 두 아이와는 좀 달랐다. 큰 목소리로 가는 사람을 불러 세웠다는 점이, 누군가를 통해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주었다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성격도 좀 달랐다. 물론 세 마리 다 제각기 다르긴 했지만 로디는 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씽은 먼 곳으로 여행 가려는 친구를 불러 세우며 이건 챙겼어? 그럼 저건? 하고 살갑게 챙겨 물을 성격이라면, 하루는 '여행 같은 걸 도무지 왜 가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가고 싶다면야 뭐'하면서 친구의 무거운 가방을 기꺼이 대신 들어 줄 성격이다. 반면에 로디는 마음이 내키면 당장이라도 세계여행을 떠날 것 같은 성격이다. 아무리 말려도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

그런 로디가 몇 주 전부터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씽을 먼저 보낸 기억이 있고, 올 초에 유키를 보낼 뻔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애초에 적지 않은 나이였으니까. 게다가 눈에 보이는 증상이 나타났다면 이미 병세는 손쓸 도리 없이 진행되어 있을 확률이 크다. 곡기를 끊고 구석진 곳을 찾아들던 로디에게 수액을 놓아줬지만, 초반에 잘 들어가던 약은 나중에는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비틀대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그래서 링겔을 놓기 위해 바늘이 몸에 들어와도 크게 반항하지 않던 아이가, 어느 날 아침 크게 화를 내며 바늘을 제 입으로 뽑아내려 할 때 엄마와 아빠는 마지막을 직감했다고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점심 무렵의 일이다. 나는 집에 전화를 걸었고 엄마와 함께 엉엉 울었다.: 편하게 자다가 가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봐, 자기를 평생 돌봐준 사람들 앞에서 눈을 감았으니 로디도 마음이 편할 거야, 로디한테 신경을 너무 못 써준 거 같아서 너무 미안해, 아냐 로디는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우리 집에 있는 매일 매일이 신기하고 행복했을 거야, .. 정돈되지 않은 후회와 위로의 감정을 주고 받았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떠난 애완동물들이 마중 나와 있대, 로디가 이젠 씽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겠다, 씽도 이젠 안 심심해서 좋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로디가 우리를 떠난 날이지만 씽이랑 로디가 다시 만난 날이기도 해.. 라는 내 말에 엄마는 훌쩍대면서 말했다. "근데 걔네 사이 별로 안 좋잖아." 우리는 씽과 하루와 로디가 모두 어린 고양이일 때,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지금보다 10살씩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찬 상태에서 눈을 접어 웃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렇게 웃는 지 우는 지 모를 시간을 한참이나 보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엉망진창의 감정을 나누며 나는 엄마와 다시 가족이 되었다. 로디는 가는 길에도 나에게 이런 선물을 남겼다.

씽을 보내던 당시의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내 마음 속에는 엉망진창의 감정이 넘쳐났는데 그걸 나눌 사람이 없었다. 내가 나를 부정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 속 엉망진창의 정돈되지 않은 감정을 무시하려 했다.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 때와 비교하자면 지금은 훨씬 건강하게 극복 중이다. 일단 내 엉망진창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엉망진창의 상태로 그대로 공유했으며, 나와 매일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들에게는 빠짐없이 내가 겪은 일을 전했다. 나의 슬픔을 전했고 그들의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극복해 나가고 있다. 거기까지는 눈에 띄는 성과다.

문제는.. 이 상실이 나의 불안을 다시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차피'와 '결국엔'이 혀를 낼름대며 나를 노리고 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헤어지게 되어 있고, 결국엔 이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날 뿐이라는 진술이 나를 집어 삼키려 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 추상적인 두려움이라면 추상적인 용기를 내보려 노력하는 것으로 대처할 텐데, 지금 내가 겪는 증상은 헤어짐과 죽음의 모든 경우의 수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버리는 것이라서 추상적인 용기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몸 어딘가에서 암세포가 증식하고 있는 상상, 빙판길에 차가 미끄러져 전복되는 바람에 큰 사고가 나버리는 상상, 바람에 떨어진 간판에 맞아 크게 다쳤다는 연락을 받는 상상, ... 이 상태에 접어든 뇌는 다소 흥분한 상태로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불행을 빠르게 수집한다. 그걸 미리 알아놓는 것만으로도 내가 거기에 대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몇 번이나 겪었던 증상인데 어떻게 빠져나왔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 일단은 그게 '증상'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 출발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이건 앞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

로디야, 잘 도착했어? 씽은 잘 만났고? 너는 어디 내놔도 기죽는 법 없이 당당한 애니까 거기서도 금방 잘 지낼 거라 믿어.

같이 있을 때 조금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만큼 미련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별에는 어김없이 그런 미련한 후회가 따라오는 것 같아. 그치만 난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건 오히려 각별한 마음의 표현 아닐까? '이별'이라는 말은 헤어지고 싶지 않은 이와 어쩔 수 없이 헤어질 때 쓰는 말 같아. 꼴도 보기 싫은 사람과 연을 끊고 그걸 '이별'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잖아. 그러니까 모든 이별은 각별한 이와의 분리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당연히 '더 잘해줄걸'이라는 마음이 생기는 거겠지.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마음을 다해 잘해줬다 하더라도, 그 이별이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마 '더 잘해줄걸'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난 '더 잘해줄걸'이라는 마음은 미련한 후회라기보다는 우리 사이가 얼마나 각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되새김이자 다짐이라고 생각해.

내가 너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보다는 네가 나에게 잘해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우리집 셋째 고양이로 와줘서 고마워. 아빠에게 살갑게 대해줘서 고마워. 매번 엄마 발치에 붙어 자준 것도 고맙고, 지난 번 한국 갔을 때 내 손이 닿을 때마다 골골거려 준 것도 고마워. 늘 편안하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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