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 미루기 병

in kr-daily •  7 years ago  (edited)

언제부터 미루는 습관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인지 그렇게 자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습관은 만성적이다.

해야 할 일을 미룬 적은 많지 않다.
어렸을 땐 모든 일을 미뤄왔지만, 언제부턴가해야 할 일은 미루지 않게 됐다.
공적인 일을 미루지 않으면서 나의 미루기 병은 점점 더 사적이게 변했고, 더 내밀해졌다.
그것은 미루기보다는 방치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워지는 병이었다.

가장 오래전 미루기를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비디오방에서 빌렸던 짱구 비디오테이프가 떠오른다.
연체료가 얼마였는지, 얼마나 오래 반납을 미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반납을 제때 못하면 연체료를 내야 한다는것과 내가 꽤 오랜 기간 반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날들이 계속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미루기 병의 특징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기에 더욱더 미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엔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포가 된다.
어린 시절 나에게 비디오 플레이어 안에 들어있는 짱구 비디오테이프는 공포 그 자체였고, 시도 때도 불현듯 찾아와 나를 괴롭히던 악몽이었다.

비디오 연체의 말로는 생각보다 허망했다.
끝없이 미뤄오던 중에 우리 집이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 테이프를 반납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연락 두절 상태(이른바 먹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만약 몇만 원의 연체료를 내고,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더라면 이 미루기 병은 쉽게 고쳐졌을까?

내 미루기 병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이 커지지만, 그 두려움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하루의 연체료는 얼마이고, 며칠을 밀렸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체료의 액수가 얼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두려움에 떨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치과 진료를 미루고 있고, 사자마자 맡겨 놓은 물건을 찾으러 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이미 너무 시간이 흘러 나를 기억할까? 라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이 지긋지긋한 병을 언젠간 떠나올 수 있을까?
이미 이 습성은 나란 인간에게 너무나 결합해 있어 영영 떼 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미루기보다는 방치...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워지는 병...

왠지 격하게 공감가는 글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커지는 것은
아마도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두려움의 실체가 모호하다 하셨는데
이렇게 모호하다 생각하시는 것으로
이미 어느정도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 아닐까요?

어렵긴 하지만 "두려움" 떨쳐버립시다!
오늘도 화이팅 입니다. ^.^;;

공감가네요:)저도 미루기병이 있는데...미루다 미루다 발등에 불똥 튀어야 그제서야 하곤 했었는데 아직도 고쳐지진 않은것 같은데...생각을 안하려고 해요ㅎㅎ

생각을 안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면 등 뒤가 서늘해지는 것 같은! 그런 미루기 병:)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