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위축은 불황의 원인이 아닌 결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소비 위축 때문에 촉발됐다는 주장이 많다. 내가 듣는 수업의 교수님도,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님도 그렇게 얘기하신다. 학파 간 시각 차이긴 하겠지만, 나는 소비 위축이 불황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지지한다.

소비가 위축되는 것은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이 없는 이유는 시장에서 교환될 재화와 서비스를 '제대로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부가가치 창출력(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소비 위축의 원인이다. '잃어버린 20년'이 소비 위축을 만든 것이지, 소비 위축이 '잃어버린 20년'을 만든 게 아니다.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인 주류경제학자들은 설비, 재고, 지식생산물 등 자본재(실물 자본)가 많으면 생산 능력이 충분하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주류경제학자들은 일본 소비 위축의 원인이 생산 능력이 부족한 데에 있다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을 배격했다.

그러나 생산 능력은 실물 자본의 '존재 그 자체'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업가적 능력'이 결합해야 비로소 자본은 생산 능력을 갖는다. 기아차 소하리 공장은 1990년대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90년대의 소하리 공장은 망했고, 지금의 소하리 공장은 잘 돌아간다. 그 차이는 90년대 기아자동차의 기업가적 능력보다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현대자동차그룹의 기업가적 능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소하리 공장의 생산 능력은 '존재 그 자체'에서 오지 않았다.

실물 자본이 충분한데 불황이 올 경우, 케인스 경제학자들은 통화량을 늘리고 재정 적자를 키워 소비와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돈은 풀리면 풀릴수록 '기업가적 능력' 측면에서 후순위에 있는 기업가에게 흘러들어가게 된다. 돈이 흘러들어가지 않더라도, 돈의 공급이 늘어 돈의 가격이 떨어지니 주주와 채권자가 실패한 기업가로부터 돈을 회수할 유인이 떨어진다.

실패한 기업가에게 돈을 회수하지 않으면, 그가 운영하는 실물 자본이 우수한 기업을 만나 생산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이 지연된다. 정확히 그와 같은 경로를 일본이 겪었다. 일본에 축적된 실물 자본은 긴 시간 동안 생산 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중앙은행이 돈을 풀면 투자가 늘어나며 소비가 늘고 호황이 찾아온다. 그러나 늘어난 돈은 원금에 이자를 붙여 상환해야 할 돈이다. 원금과 이자는 투자가 성공하여 돈을 벌어 들여야 상환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가적 능력이 없는 기업가에게 돈이 계속 흘러들면, 늘어난 돈은 최종재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고 다시 상환되지도 못한다. 실물은 충분히 생산되지 않고, 시중에 유통되는 돈의 양만 늘어난다면 결과는 물가 앙등뿐이다.

결국 돈을 묶어야 하는 시점이 온다. 돈을 묶으면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한 기업은 부도가 난다. 노동자는 실업 상태가 되고, 실물 자본은 유휴 상태에 빠진다. 소비는 위축된다. 그래서 중앙은행은 다시 통화량을 늘리고, 정부는 재정 적자를 키우지만 사태는 악화될 뿐이다. 불황기에 돈을 풀면 결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다.

1. 돈이 흘러들진 않지만, 돈의 가격이 떨어져 실물 자본이 재배치되는 과정이 지연된다. 생산 능력이 저하되어 소득이 창출되지 않으므로 소비도 위축된다. 결국 경제에 대한 기대 심리 자체가 붕괴하여 장기 불황으로 간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여기에 해당한다.

2. 돈이 흘러들어 호황 국면이 연출된다. 그러나 또 다른 부문에서 잘못된 투자를 유발하여 다시 불황의 씨앗을 뿌린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이나 일본의 아베노믹스가 이런 경로를 밟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4차 산업 혁명, 셰일 혁명 등이 실물 생산을 증대하는 기제가 되어, 돈 풀기의 부정적 효과를 어느 정도 상쇄하고 있다. 한편 투자의 결과가 어떠하든 투자에 돈을 쓰기만 하면 GDP는 늘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단순히 GDP가 늘어났다는 것을 실물 생산이 늘어난 것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따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