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에서는 왕릉을 '한양 서대문 밖 100리 안에 둘 것' 이라고 했고, 대부분의 왕릉이 그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강을 넘어가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지금의 서울 강북이나 외곽 지역에 흩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릉은 거기에서 벗어나는 예외 중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바로 무덤의 주인이 단종이기 때문이다.
영화 [관상] 이나 여러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계유정난으로 조정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2년 후에 단종에게서 양위를 받고 단종은 상왕으로 내려앉는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금성대군의 복위 운동 실패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는다. 결국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죽게 되는데,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목을 매어 죽었지만 여러 정황이나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타살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양에서 영월까지 따라와 그를 모셨던 궁녀들은 단종이 죽자 모두 강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 훗날 숙종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궁녀들을 제사지내는 단도 만들어진다.
세조가 정치를 못했다고 볼 수 없지만, 비열한 방법을 통해 왕위를 찬탈한 것에 불과했고 세종과 단종의 피를 받은 단종 역시 매우 똑똑했던 만큼 단종이 왕위를 이었더라도 세조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역사에서 단종은 각종 전설과 야사, 뒷 이야기가 많이 내려져 오는 왕 중 하나인데 이런 전설과 이야기가 하도 많아 모두 언급할 수는 없다.(전설의 고향 몇 편을 찍을 정도는 될 것이다.)
하나만 언급하자면, 단종이 죽은 이후 영월부사가 부임하는 날에 급사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때문에 영월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영월은 폐읍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한 대담한 사람이 영월 부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였는데, 부임 첫 날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더니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소년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신임 부사가 곧 단종임을 직감하고 부복하니 단종은 자신이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있어 목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달라고 하려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영월 부사들은 겁이 많아 단종을 보자마자 죽었다는 것이다. 신임 부사는 단종의 옥체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엄흥도가 알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은 홀연 사라졌다. 다음 날 부사가 호장 엄흥도를 불러 전날의 이야기를 해주자 엄흥도는 자신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역사 기록이나 설화 양쪽 다 엄흥도가 단종을 장사지낸 후,자취를 감췄다고 하므로 이건 말이 맞지 않는데 설화의 다른 버전 중에는 꿈에서 단종에게 영월부사를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단종의 무덤을 파보니 과연 활줄이 목에 얽혀 있어 활줄을 푼 뒤 다시 묻고 정중히 제사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영월부사가 급사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월의 관리들이 여럿 죽는 일이 벌어졌고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영월 군수로 부임한 뒤 제문을 지어 단종의 넋을 위로했고 그 뒤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선조 14년 2월 1일 7번째 기사)
이런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가장 명분이 없는 왕위 찬탈을 당했고 능력을 제대로 펴기도 전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얼마나 백성들의 동정을 많이 샀는지를 알 수 있다.
단종은 한국 무속에서 모시는 신들 중 하나이기도 한데, 한국 무속에서 신이 되려면 원한을 가지고 억울하게 죽거나 충분한 능력과 존경을 받아야 한다. 또한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언덕 위에서 정자각이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담이 둘러진 영천도 보인다.
*산세가 대단하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낼 때 땅이 얼고 눈이 와서 무덤을 만들기 어려웠는데, 노루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눈밭에 앉아 눈을 녹였다고 한다. 그 자리를 파서 장사를 지내니 그곳이 장릉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장릉의 자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길한 곳이라, 나중에 단종으로 복위되고나서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지관들이 와서 산세를 살폈으나 이장할 필요가 없어 격식에 맞추어 묘제만 고쳤다고 한다.
*장릉의 전경.
다른 왕릉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단종의 무덤, 장릉은 일반적인 왕릉 형태와는 차이가 있다. 정자각의 정면에 능이 없는 것도 그렇고, 석물도 어딘가 부족하다.
이는 단종의 무덤이 처음부터 조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지만, 글쎄. 실록이 항상 제대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종의 시신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장사지내지 않자 영월호장 엄흥도라는 사람이 충절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그리고 매장을 지내자마자 벌을 받을까봐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갔다고 한다...)
이후 제대로 무덤이 지켜지지 않았고 관리되지 않다가 중종 때에야 묘(당시는 노산묘)가 관리되었고, 숙종 때 복위되어 단종 묘호를 받자 비로소 장릉이라 칭하여 제대로 관리하게 된 것이다.
단종의 슬픔과 억울함이 서린 곳, 그리고 여러가지 전설과 야사가 얽힌 곳이 바로 이곳 장릉이다.
*한편 장릉은 한자 표기에 따라 대한민국에 세 가지의 장릉이 있는데, 하나는 이 단종의 무덤, 하나는 인조의 무덤, 하나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정원군)의 무덤이 있다. 헷갈리지 말자. 단종의 무덤 장릉은 莊을 사용한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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