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맥주 초콜릿
좋아하는 것들. 언제부터 내가 커피 맛을 알게 된 걸까. 밤늦게까지 공부한답시고 독서실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마셨을 때부터?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코코팜이나 마운틴듀, 큰집식혜 같은 걸 더 자주 마셨으니까. 그렇다면 엄마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내 것도 커피 2, 설탕 2, 프림 3 정도로 타 마실 수 있었던 때부터였나? 아니면 아메리카노의 고소하고 진한 맛이 쓰지 않게 느껴졌을 때부터?
맥주는 언제부터 좋아했던 걸까. 취기가 올라 알딸딸한 상태가 되면 좀 더 즐겁고 정신없어진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대학생 때는 밥값을 아껴 작은 병맥주 두세 병을 사 마시는 게 낙이었다. 수입 맥주는 꿈도 못 꿨고 적당히 시원하고 알싸한, 하지만 취기가 오르는 데는 하자가 없는, 그런 맥주들을 마셨다. (지금은 내가 마시고 싶은 맥주를 만 원에 네 캔 정도 고를 수 있다.) (달라진 건 딱히 없는 건가?)
초콜릿은? 커피, 맥주와는 달리, 가방이나 주머니 속에만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종종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환기할 줄 안다는 걸 부러워했다. 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를 물고 잠깐 머리를 식히는 게 좋아 보였는데, 나에게는 그러한 쉼이 허용되지 않았다. 목이 아프고 머리가 핑핑 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게 담배의 맛이라고도 했다. 여하튼. 담배를 대신하는 게 내게는 초콜릿이었다. 그중에서도 빨간 포장박스의 가나 초콜릿을 무지하게 먹었다.
뜬금없이 커피, 맥주, 초콜릿 얘길 꺼낸 건 역류성식도염 때문이다. 지난해부터인가 종종 목이 붓고 침을 삼키기가 어려웠다.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몸살기가 있는 줄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에는 목이 따끔따끔하고 입에서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불쾌한 맛이 느껴져서 이비인후과에 갔다. 의사는, 증세로 봐서는 역류식도염 같다고 일단 염증약을 처방할 테지만 내과에 가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약만 먹고 내과에는 가지도 않았다. 대신 인터넷에서 역류성식도염에 좋은 음식, 치료 방법 같은 걸 찾아봤다. 원치 않게도, 역류성식도염에 안 좋은 음식도 알게 되었는데 그중 커피, 맥주, 초콜릿이 있었다. 나는 인터넷 게시물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커피와 맥주를 마시고 초콜릿과 초코과자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또 다시 목이 따끔따끔하고 침을 삼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눈물이 났는데 그건 아파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평생 커피나 맥주, 초콜릿을 못 먹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시경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내과에 가면 내시경을 받아야 한다! 어쨌든 일주일 내에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내과에 가겠다는 심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삼가고 있다. 그리고 매일 양배추를 먹는다! 앞으로도 매일 먹을 것이다.
그리고 벚꽃
어제는 밤에 벚꽃을 보러 나섰다. 한 달 전쯤만 해도 추위가 가시기만을 바랐는데, 봄이라는 게 왔고 심지어 꽃까지 피니 겨울 같은 거 애초에 별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꽃이란 건 사람을 참 들뜨게도 하나 보다. 벚나무가 가득한 언덕에는 얼굴을 찌푸린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하긴 벚꽃놀이라는 것 자체가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꽃을 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존재할 테니까. 나도 그 무리 속에서 잠깐 들떠 벚꽃 사진을 찍어댔다.
같이 간 사람은, 벚꽃은 질 때가 더 예쁘다고 했다. 바람에 날려서 떨어지는 벚꽃을 보는 게 좋다고, 벚꽃 잎이 깔린 길을 걷는 게 좋다고 했다. 낮에 본 목련 생각이 났다. 목련이 좋다. 희고 큰 꽃잎들은 단순히 예쁘단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고귀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집 근처 제법 큰 목련나무를 볼 때면 왠지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했는데, 어제 낮에는 목련 꽃들이 반은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희고 희었던 색은 온데간데없고 갈색으로 짓무른 것처럼 보였다. 나무에 달린 꽃들도 갈색 물이 들어 있었다. 피고 지는 모습이 이렇게나 다른 꽃이 또 있을까. 피는 모습에 비해 지는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다.
네이버 블로그에 비공개로 일기를 (띄엄띄엄) 써온 지 10년이 넘었다. 오랜만에 옛날 일기를 훑어보다 10년 전 12월에 쓴 일기가 마음을 붙잡았다. 정년을 앞둔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갔었나 보다. 탁자에는 바스러질 것 같은 플라타너스 낙엽 몇 장이 놓여 있었나 본데, 그때 하신 말씀이 주옥같다. “낙엽인들 꽃이 아니랴. 미래의 어느 날들에는 근사한 일들만 펼쳐질 것 같지만, 살아보니 다 똑같더라. 그러니까 너흰 그때그때 재밌게 살아.”
당시에는 교수님 특유의, 삶을 관조하는 듯한 태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하신 말씀도 이해했을 리 없다. 그리고 분명, 교수님은 교수 정도 되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제 조금은 그때 말씀을 이해할 것만 같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꽃처럼 탁자에 올려 두신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나는 근사한 미래를 꿈꿨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 근사해진 건 무얼지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그때보다 좀 더 고집스러워졌고 불평불만이 늘었으며, 심지어는 커피, 맥주, 초콜릿 따위는 입에 대지 않으려 하고 있다.
목련은 지고 벚꽃이 폈다. 작은 꽃잎 하나에도 피는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는데, 조바심 같은 거 내지 말고 바뀐 계절에 서서히 적응해 보려 한다. 아니 그보다, 갈색으로 짓무른 목련에도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봄이었으면 한다.
애플님, 오래간만이에요! :-) 커피와 초콜렛 암요 암요 하며 읽다가 애플님 일기에 쓰여있던 교수님 말씀 부분에서 멈춰서 몇 번 더 읽었어요. 그 많던 나는 다 어디로 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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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해 주셔서 감사해요~ 반갑습니다. 그 많던 내가 합쳐지고 변하고 해서 지금의 둥근 님ㅎㅎ이 된 게 아닐까요? 옛날 일을 돌아보면 가끔 울컥해질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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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보았는데...
더 근사해진 건........;;
애플포스트님 너무너무 반가워요 오랜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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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해 주셔서 좋은데요~~ 오랜만입니다~ 얼굴 모르는 사이지만, 짧은 아이디와 사진, 글을 얼굴 삼아서 서로 반가워하고 그러는 일이 참 따뜻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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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제 피드가 잘못됐나...애플님 새글을 못본 건 아닐까 들러보곤 했어요...
자주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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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참아야한다는게 안타깝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살아보니 다 똑같더라라는 말이 오늘 따라 참 슬프게 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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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게요, 건강이 진짜로 최우선인 것 같아요. 에빵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춘곤증도 오고 봄에 잠깐 지치기도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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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났는데 그건 아파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평생 커피나 맥주, 초콜릿을 못 먹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공감되는 말이네요.
저는 커피를 가장 좋아하는데, 요즘은 저녁에 맥주도 손을 대고 있습니다.
게다가 쓴 커피에 단 초콜렛을 함께 먹는 걸 좋아하죠.
결국 커피, 초콜렛, 맥주 콤보네요.
공감하며 읽다가 꽃 얘기에서는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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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커피에 단 초콜릿. 지금으로서는 밥 대신 커피와 초콜릿만 먹으래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요.
문득, 커피가 참 맛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커피를 가장 좋아해요. 커피와 함께하는 시간이나 사람을 좋아한 것 같긴 하지만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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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흡연가들이 부러운 이유는 담배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환기' 하는 시간을 일정 주기로 실행한다는 점.. 백프로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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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의 환기, 에 대해 공감해 주시는 분이 있다니. 이런 얘기 몇 번 해 봤는데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더라고요. 반갑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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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나서 제가 하는 환기가 뭘까 생각을 곰곰히 해보았습니다. 저는 엄청나게 달달한 커피를 마시는게 저에게 환기더군요. 커피와 초콜릿이 없는 삶은 저에게 상상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10년전과 지금을 비교했을때, 사실 저는 바뀐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삶의 경험을 적립했다는 점에서 근사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덜 흔들리고 덜 아파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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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좀 불편해지니 커피, 초콜릿 같은 거 잠시 안 먹을 수도 있더라고요. 커피, 맥주, 초콜릿을 입에도 안 댔더니 오늘은 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차마 마시지 못했어요..ㅠㅠ
10년 전보다 근사한 삶. 이것만으로 정말 멋진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저는 덜 흔들리고 덜 아파할 수 있는 걸, '이렇게나 무뎌지다니' 하며 한탄하기도 합니다. 어느덧 또 금요일이 왔네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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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맥주... 저도 그래서 식도염이 자주 오는걸까요? 병원은 무서워서 못가고 여전히 즐기고 있다는... 초컬릿은 먹으면 너무 먹어서 아예 손들 안대요... 그래도 작정하시고 끊으시고 양배추를 드시는 모습이 대단하세요. 어떻게 커피을 안 마시고 살 수 있죠? ㅜㅜㅜ 밤에 보는 벚꽃은 상당히 예쁘군요. 밝을 때보다 더 서늘하고 아련한거 같아요. 나이드는건 다 그런거 아닐까요. 더 고집스러워지고 불평만 늘고... 좋지 않은거 알면서도 아직 딱 끊어내지 못하는 guilty pleasure인 나이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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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염을 앓고 계시는군요... 초콜릿은 진짜 한 번 먹으면 끝이 없죠. 큰 봉지 사다 놓으면 책 보면서 야금야금 티비 보면서 야금야금 금세 없어져요. 초콜릿은 안 먹어도 되는데, 정말 커피는, 그 향은 못 참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나중에 아예 못 먹게 될 수도 있을까봐 조절하고 있어요.ㅠㅠ
나이 드는 게 다 그런 건가요? 그럼 다행이에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왠지 위로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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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몸의 변화가 이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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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참 슬픈 거군요. 그 변화에 따라 생활태도도 바꿔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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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몸도 마음도 불편 하시겠어요
식생활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더라고요
빨리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교수님 하신 말씀이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하면 맟을것 같아요
지고 있는 목련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야 겠어요
새하얀 꽃을 피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니 온 몸이 온통 멍들었구나...
그리고 연민에 정을 느껴야 겠어요 ㅎㅎ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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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꽃을 피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니, 온몸이 온통 멍들었구나...
이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동물이든 식물이든, 말을 건넸을 때 더 가깝고 정답게 느껴지나 봐요.
항상 따뜻한 생각 전해 주셔서 감사 또 감사해요^^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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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님의 글을 보고 나서 벚꽃은 봄에 피는데도 가을의 정취를 닮았다는 느낌을 받네요.
그래도 굳이 봄에 피는 꽃에서 가을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그냥 봄에는 봄답게 가을에는 가을답게 그 순간 순간을 즐기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쓰다보니 그 교수님 같은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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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우울한 면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또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가을을 제일 좋아하기도 하고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봄에는 봄답게! 좀 밝게 지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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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스마일^0^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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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아플땐 배추과가 만병통치약이래요ㅎㅎ 그때그때 잼있게 삽시다..오늘도 행복한 하루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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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감사해요^^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말이에요. 예쁜 조약돌을 모아놓은 거 같다니... 제게 과분한 말 같네요. 저는 모난 돌 같은 사람인데ㅎㅎ
오늘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날이 맑네요.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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