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8282

in kr-pen •  7 years ago 

바빠 죽겠는데, 앞 차가 운전을 더럽게 못했다.

약속 시간은 일곱 시, 회사 언니가 그렇게 아까워하던 남자였다. 뮤지컬 티켓 두 장을 끊어주고서 받아낸 연락처, 카톡으로 나눈 대화는 합격점이었다. 아니, 합격 이상이라 하는게 맞겠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에 약간의 위트까지. 약간 친해지자 저질스런 섹드립을 날렸던 이전 남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제 저녁부터 입을 옷과 머리, 메이크업까지 전부 고민해서 완벽한 세팅을 마쳤고, 하루 종일 땀이라도 날까봐 슬금슬금 걸어다녔다. 그렇게 준비를 했건만, 왜 하필 빌어먹을 초보 운전을 앞 차로 만나서 이렇게 늦고 있는 걸까. 심지어 뒷유리에 '초보'가 아니라 '보초'라고 적어놨다.

경운기도 유유히 돌아나갈 것 같은 우회전 차선에서 무슨 성인군자랍시고 지나가는 사람을 다 기다려주는지... 답답한 마음에 상향등을 일곱 번, 빵빵을 열 한 번을 썼다. 그와중에 미안한 마음은 있는지 연신 비상등을 켜줬다. 확성기만 있었더라면 '야이 등신아! 비상등 켤 시간에 악셀좀 밟아! 번호가 아깝다 8282 새끼야!' 라고 외쳤을거다. 빌어먹을 흰색 모닝새끼.

주차를 마치고 레스토랑에 도착한 시간은 일곱 시 사십이분. 남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차가 많이 막혀서 저도 방금 도착했는걸요. 여기 파스타가 유명해서 주문해 놨는데, 혹시 드시고 싶은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여기 스테이크도 잘하고 샐러드도 아주 맛이 좋아요."

남자와의 대화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우리는 마치 낮 열두 시의 라디오처럼, 일 초도 쉬지 않고 즐거운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런 남자들은 대체 어느 곳에 숨어있는 걸까. 왜 진작 만나지 못했을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후식을 마치니 아홉 시 사십 칠 분, 문득 흰색 모닝이 생각났다.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사십 분은 더 이야기 할 수 있었을 텐데... 빌어먹을 흰색 모닝새끼.

"8282번 차주분 계신가요?"

웨이터가 바쁜 걸음으로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8282 차주를 찾고있었다. 아이고 그 멍청한 8282 흰색 모닝이 또 사고를 쳤나보구나. 옅은 웃음이 삐쳐나왔다. 웨이터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와 8282번 차주인지 물었다.

"아뇨."
"네, 전데요."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마침내 남자가 일어났다. 나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인 채 "다, 다녀오세요."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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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초 ㅎㅎㅎ
번호가 아깝다 ㅎㅎ

단편 소설 재밌네요 ㅎㅎㅎ

저도 초단편 소설 하나 올렸었는데 이런 재미는 없고 우울함으로 무장했네요 ㅎㅎㅎ
그래도 제 우울한 소설도 링크걸어봅니다 ^^
https://steemit.com/kr/@megaspore/2tjlg1

댓글 감사합니다. @megaspore 님의 글은 표현력이 참 좋으시네요. 댓글들에 온통 안부를 여쭙는 내용들이 많았던 걸 보면 의도하신 대로 충분히 전해졌던 것 같네요. 자주 좀 써주세요!

온통 안부를 여쭙는 내용 ㅎㅎㅎㅎㅎ

저는 당연히 “소설도 쓰시네요^^”이런 댓글이 올라올줄 알았는데 연말인데 왜 그러시냐고 안부를 묻는 댓글만... ><

ㅎㅎ 한편의 콩트를 보는 것 같네요~ 쫙 빨려들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주세요 :)

저 남자... 인간적인 부분을 남겨놨군요. 너무 완벽하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해 봐야 합니다.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재미있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최근 스팀파워 임대받으신거 보고 친한사람들의 포스팅은 역차별을 당할 수 있다고 하셨길래 '혹시 나도...?!?!!?'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역시나였군요.

반가우면서도 서운한 이 기분은 뭘까요...

그 문단 끝에 보면 친하더라도 뉴비인 분들은 지원한다고 돼 있습니다 -_-+

실화인줄 알았어요 ㅋㅋㅋㅋ 단편이라고 써있는거 봤는데도 넘 생생해서. 유쾌하네요. 제가 초보운전이라 쬐끔 찔렸지만 ㅎㅎㅎ 명대사 복습하며 사라집니다.

번호가 아깝다 8282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