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는 네 명의 내담자 중 두 명이 연락 없이 오지 않았다. 상담을 시작할 때는 상담 구조화라는 걸 하게 돼 있는데, 치료 시간이나 비용이나 약속 취소와 같은 부분에 대해 다루게 된다. 상담 약속을 취소하려면 최소 하루 전에는 문자나 유선으로 연락을 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약속을 지키는 내담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상담 약속을 연락 없이 캔슬내는 내담자라 하더라도 일반 식당 예약 같은 것에서는 노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반되는 모습을 가정할 수 있는 것은, 연락 없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비언어적 메시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식당 주인에게 굳이 비언어적 메시지를 던질 필요는 없다. 식당에 가면 가는 거고 못 가면 못 가는 거지 그 텍스트 바깥의 맥락을 가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상담은 이런 거래가 아니라 관계다. 관계이기 때문에 맥락을 고려해서 내담자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려 할 수밖에 없다. 즉 상담이 뭔가 불만족스럽거나 라포 자체가 형성이 안 됐다거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내담자들이 의도적으로 노쇼하는 경우는 없다. 나중에 회기 안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면 반드시 표면적인 이유가 있다. 아팠다거나 갑자기 집안 행사가 있었다거나 등등. 매주 오는 상담인데 상담 오는 것을 깜빡했다고 말하는 일도 많다. 대부분은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자기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노쇼가 한 번 정도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그럴 수도 있었겠다 넘어갈 수 있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주에 오지 않은 두 내담자 모두 이번이 두 번째 노쇼인지라 상담 관계를 재검점해 보게 된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대학원 입학 자소서에 '누군가를 돕기 위해 blah blah~' 써놓았지만 그건 진심이라기보다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원 진학할 때는 누굴 돕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나 자신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를 알려면 필히 남을 알아야 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혼자인 인간은 선할 이유도 악할 이유도 없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관계를 통해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지게 마련이고, 그런 관계 안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켜 가게 마련이다. 고로 나를 알려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남도 궁금해지게 됐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보면 나와 남에 대한 '호기심'과 호기심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의 과정에 있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호기심만 가지고서는 이 직업을 계속하기가 어렵다.
노쇼만 봐도 그렇다. 노쇼가 발생하면 일단 짜증이 난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내가 일하는 상담 센터는 나라에서 운영되는 곳인데 노쇼가 발생하면 페이를 안 주기 때문이다. 페이가 회기수로 계산돼 지급되는데 노쇼는 회기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분명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내 귀한 토요일의 일부를 거기 할애했는데 인정해주지 않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이걸 알고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 선임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센터를 그만둔다고 내게 말한 바 있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 내담자와의 관계에(노쇼하지 않았던 다른 내담자와의 관계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이 센터는 비자발적으로 오는 내담자가 많아서 조기종결(drop-out)이나 노쇼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 이에 앞으로도 짜증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는 이 짜증을 감당해 내기 버거운 게 사실이다. '사명감을 갖고 일해 보자!'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없던 사명감이 생겨나진 않을 것이다.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댓가가 오지 않으면 사명감은, 그런 게 있었다 하더라도 눈녹듯 사라져버리기 쉬운 무엇이다.
돈 주고 10회기 이상 상담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가 기관은 상담비용이 무료라서 그나마 내담자풀이 확보되는 것이다.(무료라서 더 쉽게 생각하고 결석이 잦은 것도 있지만.) 상담만으로는 돈이 안 되니까 다들 강의도 뛰고 수퍼비전도 하고 워크샵 열고 심리학 대중서를 쓰고 여러모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국에서 상담으로 밥 벌어 먹고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굴 돕기 전에 상담자 자신부터 도와야 할 판이다. ㅎ
자신의 생계가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누굴 돕고 싶어도 돕는 것이 어렵다. 멘탈이 유연하려면 물적 토대도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상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을 살펴보면 여전히 무급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곳이 많다. 상담가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에서는 돈을 내야 하는 곳도 많다. 돈을 안 주는 것인지 못 주는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기관도 기관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최소한 임상심리전문가 코스에서 무급자리 개설한 셋팅의 전문가는 전문가로서의 양심이 없는 것이다. 실적 압박은 있는데 기관에서 사람 뽑아도 돈은 못 주겠다고 하니 무급 자리들이 생기는 것이다. 수련생들은 어쨌든 간에 수련을 마쳐야 전문가 자격을 취득하고 밥벌어 먹고 살 수 있으니 이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런 열악한 수련을 거치고 나면 저임금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노쇼 때 돈 못 받는 것도 당연한 게 돼 버리고 여러모로 '심리서비스를 왜 돈 주고 받아?', '나 좀 상담해줘. 무료로'라는 세간의 인식에 이질감 없이 동화된다.
힘든 사례도 잘 다룰 수 있는 유능한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 어떤 방식이 됐든지 간에 자기 물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상태라야 심각한 병리를 지닌 내담자를 상담하는 것이 더 수월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역설적이게도 SES가 낮고 보다 심각한 문제를 지닌 내담자를 초보 상담자들이 맡고 경제적 여력 있고 비교적 건강한 내담자는 베테랑들이 맡는다. 베테랑이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힘든 케이스를 저렴한 비용에 맡고 있는 경우도 물론 있을 테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분명 그렇다. 돈이 없고 심각한 문제를 지닌 내담자는 치료에도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심리서비스에 대한 지원에서 구색만 맞추려 하고 초보 상담자들의 인력을 갈아 넣으려고만 하니 인력이 계속 바뀌고 내담자는 지속적으로 서비스 받는 게 어렵다. 관계가 형성될 만하면 상담 선생님이 떠나 버린다. 나도 예외가 되긴 힘들다. 나라 돈으로 운영되던 이전 직장 관둘 때도 내가 치료하던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 아이에겐 내가 세 번째 선생님이었다. 정이 들 만하면 떠나 버리니 그 아이 심정이 어땠을지..
글이 두서가 없는 것은 심리서비스 쪽에 여러가지 문제들이 뒤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이 대학 저 대학에서 필요 이상으로 심리 관련 학과가 많이 개설되고 있고, 현실을 알려주지 않은 채 석사생들을 너무 많이 뽑고, 임상심리 수련생들은 1:100의 경쟁율을 통과해서도 무급 수련 체계에 죽어나고 있고, 상담심리 석사 졸업하고 상담사가 되기 위해 수련 받으려면 돈을 학기당 백에서 이백은 내야 하고, 나라의 구색 맞추기식 사업에 내담자들만 피해 보고 있고, 상담 센터 개소의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아무나 센터를 내고 있고.. 끝도 없다.
이런 정황을 알았을 때 내가 심리학과 대학원을 진학했을까? 그 땐 너무 간절했으니 알았더라도 했을 것 같지만, 요즘 학생들은 훨씬 더 똑똑하고 정보 수집에 탁월하니 재고하는 추세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 같다.
첫 직장은 심한 박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달 평균 야근 시간이 20시간을 넘어가는 열악한 노동 조건이었다(야근은 대부분 실적과 관련된 작업 때문이었다. 서울시에 보여주기 위한. 욕 나오는.). 이 직장에서 값진 인생의 교훈을 하나 얻었는데, 나 같은 범인에게 '사명'이나 '소명'은 돈 앞에서는 휴지쪼가리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누굴 도우려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노동한 만큼의 댓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그런 게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누굴 돕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돕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첫 직장을 때려쳤다.
좀 러프하게 본다면 상담은 상담자가 내담자를 돕는 게 맞다. 돕는다는 말을 선호하지 않는 것은 단지 내 개인의 성격 때문일 수 있다. 이론적 배경을 떠나서 내담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뭐든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만 누가 누굴 돕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때도 많다. 나 역시도 불완전하고 한계가 많고 간혹 가족 앞에서 바닥을 드러내는 그런 취약한 인간일 뿐인데 '돕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 때가 많은 것이다, 특히나 돈 앞에서! 노쇼 앞에서!
상담심리전문가가 되어서 센터를 차려서 내 집 한 채 마련하고 차도 있고 뭐 그런 윤택한 삶이 가능하다면 그 때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사회환원 차원에서 무료로 종합심리검사를 해줄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일단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상담 역시 이런 나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갈 수밖에 없다. 노쇼는 페이에 포함시키지 않는 기관에서 일하지 않는 등. 돈을 받는 한 내담자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고 내담자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지만 상담비를 계속 해서 내지 않는다면 그 상담은 종결하는 것이 옳다.
상담은 엄밀하게 말하면 누군가를 돕는 것이 아니다. 돕는다는 표현은 '(무료)봉사'로, 너의 노동력을 소외된 계층을 위해 갈아넣으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대치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나는 이 표현이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라에서는 상담을 무료봉사, 아무리 좋게 봐도 최저 시급 정도의 가치도 없는 무형의 서비스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심리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는 것이 상담이다. 얼마나 받아야 되는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돈 없는 소명이나 사명을 강요할 순 없다.
사명이나 소명을 논할 수 있는 물적 토대 튼튼한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경력의 사다리 위로 빠르게 올라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다른 베테랑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지 계속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경력 사다리의 위에 올라갔을 때, 수련생에게 노동에 합당한 임금을 줄 수 있고, 내가 가진 재능으로 정기적인 자원봉사도 할 수 있는 그런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저는 강박적으로 약속을 지키는 성격이라서 무의식적으로 늦는다거나 약속을 잊어버린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노쇼하면 형사처벌이라도 하게 만들어야 이 문화가 개선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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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iee님은 철두철미하신 분이로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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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자의 고충이 느껴지네요. 노쇼의 경우는 한 것으로 쳐 줘야 할 것 같은데, 적용이 쉽지만은 않은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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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라에서는 실적이 중요하지, 노쇼로 인해 상담자가 페이를 못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관심도 없어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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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다'는 것에 사회적으로 부여된 사명이나 소명이 강제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좋은 의지는 자발적으로 나와야지 (혹은 자발적으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잘 조성해주어야지) 그냥 억지로 끌어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불 의지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이용해야하고,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이 부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장"에서는 결국 필수재로 공급하는 공급자들이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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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지는 자발적으로 나와야 된다는 데 백번 공감해요.
상담자들뿐만 아니라 정신보건(=정신건강) 분야에 있는 모든 사람들, 특히 국가기관에 속해 필수재로서 서비스를 공급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여기 적어 놓은 것과 비슷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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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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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몇 년은 고생하겠지만, 이 꼴 안 보려면 최대한 빨리 1급 따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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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연락없는 노쇼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약속을 어길때 마다 상담의 제약을 두거나 몇개월 동안 상담을 받을 수 없다거나 하는 식의 패널티가 적용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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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세 번 노쇼인 경우에는 상담이 자동으로 종결됩니다. 그런 패널티가 있긴 한데.. 이게 심리치료라는 맥락이다 보니 원칙대로 적용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연달아 세 번을 안 온다면 종결하는 게 맞겠지만 한 주 오고 한 주 안 오고 또 한 주 오고 이런 경우들이 있어서 애매해지는 부분이 있어요. 후자라면 상황을 봐가면서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는 게 뭘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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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댓글을 썼다가 지웠습니다. 생각이 많아지는 글입니다. 모쪼록 어려운 길이지만 기운 잃지 마시길 바랄께요. 제가 누군가를 평가할 위치는 아니지만 @slowdive 14님 같은 분들은 그 길에 계셔야 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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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yguy님으로부터 좋은 평가 받으니 기분 좋습니다. 이 길에서 잘 버텨서 좋은 치료자로 성장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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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너무 덥습니다......덥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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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님 덕분에 스팀잇이 한결 훈훈해지는 것 같아요 스팀잇 온기 때문에 더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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